■2023년 1월25일(수)■
(누가복음 17장)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묵상/눅 17:26-37)
◆ 노아의 때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시에 공통된 특징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이게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것은 일상생활일 뿐이다. 문제는 그 일상생활 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없이 일상생활에만 몰두하는 자들의 인생은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갑자기 닥친다. 꼭 소돔과 고모라처럼 현실에서 불과 유황에 멸망 당하지 않더라도, 최종적으로 가게 되는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종말이 다가온다. 노아의 홍수 때가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때도 그랬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만 몰두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예배하는 자가 되자.
◆ 롯의 처를 기억하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올 생각하지 말고, 밭에 있는 자도 돌이킬 생각하지 말라고 하심은 무슨 의미일까?
휴거되는 마당에 그런 세속적인 것을 챙기는 것이 아무 의미 없음을 말씀하심인가, 아니면 재앙이 너무나 급속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챙길 겨를 없이 속히 도망가라고 말씀하심인가?
마태복음에서는 재림의 날과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을 함께 그리면서 도망갈 것을 언급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6)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더욱 세밀하게 나눈다. 즉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이고,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에 대해서는 21장에서 다시 다룬다(눅 21:5-24).
주님이 오시는 그날이 되면 우리가 하던 모든 것은 멈추어야 할 때다. 주님께서 저기에서부터 오시는데 세상에 미련을 두고 아쉬워하면서 맞이하면 큰 실례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우리 생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볼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세상의 종말과 같은 의미다.
어떤 분은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은 누가 키울 것인가 무척 염려하는데,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에는 내 뒷일을 주님께서 맡아주신다는 의미다. 믿음으로 맡기고 훌훌 털고 가면 된다. 그게 믿음이다.
다만 재림 시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라, 뒷일이란 없다. 자식들도 함께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반드시 내 사랑하는 자녀와 형제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세상 것에 미련을 가지고 미적대면, 롯의 처처럼 될 것이다. 롯의 처는 소돔에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 데려감과 버려둠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데려감'과 '버려둠'이 순식간에 발생한다.
데려가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를 공중으로 끌어올리시는 일이다. 즉 휴거(携擧)다.
바울은 그의 초기 서신인 데살로니가서에서 공중 재림과 휴거를 언급했다(살전 4:17). 누가(Luke)는 바울과 오랫동안 전도 여행을 함께 한 동역자로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할 때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해서 기록했다고 본다.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이 일상생활을 했는데, 누구는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버려졌다. 구원은 결코 집단적이 아니라 개인적이다. 우리가 어느 집단에 속했다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나와 친한 친구의 믿음이 내 믿음이 아니며, 내가 속한 교회 목사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아니고, 심지어 부모님의 믿음도 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이다. 내 믿음을 돌아보자. 남의 믿음을 자기 믿음으로 착각하지 말자.
36절은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었는데,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37절은 난해 구절 중에 하나다.
왜 이것이 해석이 어려운가 하면, 질문과 대답이 너무나 문맥과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제자들의 질문을 살펴보면 주여 어디입니까 이다. 이 질문이 너무 생뚱맞아 보인다. 이 엄청난 예언을 듣고는 어디냐고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제자들의 질문은 아마도 어디로 가야 피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인듯하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가서 살았고, 롯은 소알성으로 피해서 살았다(창 19:22). 그렇다면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도 다소 엉뚱해 보인다.
장소를 물었는데, 대답은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일까?
우리는 이 시점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겨우 며칠 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피성을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어떻게해서든 주님의 죽음을 암시하셨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주검이 있는 곳'이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독수리는 시체를 뜯어먹기 때문에 비유 자체가 매우 처절하고 끔찍해 보이지만, 십자가란 원래 그렇게 끔찍한 것이다.
독수리가 시체를 뜯어먹음으로써 살게 되는 이 비유가 너무나 혐오스러운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당시에는 엽기적으로 들려서 사람들이 기겁했지만, 사실 엄청난 영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이라는 말씀과 독수리가 주검에게 다가가서 그 살과 피를 마시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십자가는 처절하고 끔찍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런 끔찍한 희생을 당하셨기에 우리는 무거운 죄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며,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야 함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묵상하는 자만이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십자가에 담긴 심오한 교훈들은 오로지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는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므로 피난처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확한 대답이다. 거기 외에는 도피할 곳이 없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뿐이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신 어린 양께 감사하고 감사하자.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모여야 하며, 모두 하나가 되어서 죽으신 어린 양을 영원히 찬양하자.
주님,
주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서, 저 같은 죄인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