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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39-46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3.02.21|조회수147 목록 댓글 0

■2023년2월21일(화)■

 

(누가복음 22장)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묵상/눅 22:39-46)

 

◆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예루살렘 전체가 하나의 산인데,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은 그 산 위에 다시 솟은 봉우리다. 과거에는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어서 감람산이라고 했지만, 오늘날에는 올리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감람산은 아주 낮은 봉우리로서 오르내리는 데 큰 부담이 없는 언덕과 같다. 

 

예수님께서 이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직전의 마지막 기도를 하셨다.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감람산보다 더 구체적인 지명을 말하고 있다. 곧 겟세마네 동산이다. 감람산 안에 있는 조그마한 장소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사유지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자들도 있다. 

 

이제 아침이 되면 예수님은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피곤해서 그냥 잤다. 제자들의 이런 행태는 정말로 실망스럽다. 그러나 이들도 모두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모하였다.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주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그는 각종 유혹과 시험에 쉽게 빠지게 될 것이다. 육신의 욕망이 성령의 욕망보다 더 커지기 때문이다.

 

신실한 성도가 범죄하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기도다. 성경연구, 봉사, 각종 모임 등은 그대로 계속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타락한 상태인지를 눈치챌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은 자기 생활 속에서 골방에서 하는 찬송과 기도가 사라졌음을 알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겠는가?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나는 기도가 사라진 사역자는 틀림없이 타락하고 부패했거나, 생명이 없는 무기력한 사역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특별한 죄를 짓지 않았어도 이미 그의 사역은 메마르고 죽은 사역이며, 그의 삶은 율법적인 삶에 불과할 것이다.

 

다윗이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구한 것 중의 하나가 범죄하고 난 뒤에 사라진 찬송과 기도의 회복이었다(시 51:15).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기자.

단순히 오랜 시간을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 몇분 만이라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얼굴을 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

주님의 말씀을 내게도 적용해야 한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 시 31:16)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수 많은 채찍, 사람들의 조롱, 그리고 벌거벗기운 채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수모…. 엄청난 사건이 닥칠 것이다.

 

제자들은 대략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눈치 보며 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힘을 다해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기도가 얼마나 결사적이었는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의 결사적인 기도는 절대적인 순종을 위한 몸부림이셨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인생 속에서 이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언제나 우리는 내 원대로 해달라고 떼쓰는 자들이 아닌가? 주님의 절대적인 순종은 우리가 영원히 본받아야 할 본이다. 

 

이 때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누가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이라고 하셨다.

 

상상되는가?

예수님은 파도도 잔잔하게 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무화과나무를 단숨에 말려 죽이시는 슈퍼맨보다 더 능력 많으신 분이시다. 그런 분께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약하디약한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있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 과연 믿어지는가?

 

우리는 종종 존경하는 사람이나 대단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절대로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이 없을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예수님 같은 분도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셨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가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는 심각하게 들어줄 줄 알아야 하고, 비록 무능한 나일지라도 힘닿는 데까지 도우려고 애써야 한다. 어떤 때는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예수님의 고민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셨다(마 10:28). 그런데 막상 자기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과도 위배되고, 후에 죽음 앞에서 당당할 제자들에게도 본이 안된다.

 

주님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온 인류의 죄악을 짊어진 최악의 죽음이다. 주님의 고민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인간도 그런 죽음을 죽어본 일이 없다. 온 세상 죄악의 무게가 짓누르는 그 죽음을 우리로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피땀을 흘리시며 울부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절대로 평범한 죽음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겟세마네에서의 결사적인 기도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리고 온 인류 죄악의 무게를 감당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희생과 사랑과 절대적인 순종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땀방울은 피로 변했네

하나님을 거역한 나를 위하여

순종의 속죄 피를 흘려주셨네

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복음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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