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야곱의 묵상 | 야곱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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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2월25일(토)■
(누가복음 23장)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묵상/눅 23:1-25)
◆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이 억지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며칠 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눅 20:25)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건만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씌워서 그대로 정죄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부분은 옳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박사가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마 2:2)라고 하였고, 예수님도 빌라도가 물을 때 이를 시인하셨다.
'네 말이 옳도다'(눅 23:3)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요 18:37)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역모에 해당하는 죄로서 충분히 사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세속국가가 아님을 알았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빌라도는 매우 계산적인 통치자였다. 그의 모든 판단기준은 이것이 정의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것이 내게 정치적으로 내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였다. 오늘날에도 정치인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빌라도와 같은 판단기준을 가진 자들이 많다. 진리와 정의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뭐든지 정치적으로 판단하려는 사람이 넘쳐난다. 성도는 그러면 안 된다.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자기 손으로 정죄하는 것이 싫어서 헤롯에게 보냈지만, 예수님께서 헤롯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심으로써 다시 총독에게 돌아왔다. 이때 정치적 구조는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빌라도는 유대인의 총독으로 있었다. 누가 더 높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될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에 일본 총독과 우리나라 왕이 누가 더 높을까 재는 것과 같다. 명목상으로는 왕이 높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빌라도가 더 많았을 것이다. 당연히 로마 군대도 빌라도에게 속했다.
결국 빌라도는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다. 이것은 불의와 타협한 것이며, 정의를 외면한 악행이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빌라도를 비난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역사성을 밝히는 구절이다. 즉 예수님은 이야기 속의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분명하게 빌라도 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역사적인 인물이시다.
때는 빌라도 총독 통치 8년 차였고 오늘날 달력(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AD 33년 4월 1일(히브리력 1월14일), 금요일이었다.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악행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흥미로운 것은 정작 왕권을 수호해야 할 총독이나 왕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건만 가장 정의로워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죄 없는 예수님은 누명을 씌워서라도 죽이려고 애썼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모순적이지만,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불신자에게 죽은 성도보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죽은 성도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은 종교적인 타이틀을 가진 사람에게 선함을 기대하지만, 종교적인 타이틀이 그를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종교적인 타이틀은 그들을 위선적으로 만들고, 더욱 교묘하게 자기 정욕을 채우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이틀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적인 타이틀에 연연하지 말고 '형제, 자매'로 불리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마 23:8).
개역개정성경에는 17절이 생략되어있는데, 킹제임스성경에는 (명절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게 되어 있더라.)라는 말씀이 삽입되어 있다. 마침 이날이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인지라 빌라도는 이를 빙자해서 놓아주려고 했지만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서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 곧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을 높이며 '호산나'를 외친 군중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어째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는 군중들만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시간이 새벽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잡힌 사실을 백성들이 알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리고 빌라도 법정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사람들 백여 명만 풀어놓아도 여론을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군중들이 깨어나기 전에 예수님의 죽음을 번개처럼 빠르게 진행하려고 했다. 흩어진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들이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길에 접어드셨을 때다.
예수님을 지지했던 대다수 군중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밤늦게 잡히시고, 밤새 끌려다니셨으며, 새벽에 언도받고 아침에 채찍에 맞으신 후에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도대체 자세히 살펴볼 시간도 갖지 않고 밤 중에 잡힌 사람을 그날 아침에 처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것은 재판이라는 명목만 거쳤을 뿐이지 살인과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신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통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잠잠히 이 모든 일을 감수하셨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시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 당할 때가 무척 많다.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럴 때는 베드로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20)
주님,
주님께서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품성을 본받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