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4월18일(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묵상/살전 5:12-15)
◆ 사역자들을 대하는 자세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수고하고 사람들을 다스리며 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를 교훈한다. 이들은 오늘날의 장로나 목사, 선교사와 같은 이들이다.
참고로 성경에서는 목사를 장로와 분리된 어떤 직분으로 말하지 않았다. 단지 장로를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로 나누었을 뿐이다(딤전 5:17). 예를 들어 베드로나 요한은 은사는 사도이지만, 교회 내에서는 장로였다(벧전 5:1,요이 1:1). 목사는 사도와 같이 은사 중에 하나다(엡 4:11).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이 목사를 장로 위에 있는 초월적 직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철저하게 세속화된 사상이다.
이하 글에서 목사와 장로를 구분하지 않고 장로로 통일하여 사용하기로 하자.
성도들은 장로들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
13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했다. 우리 번역에는 '그들의 역사(work)로 말미암아'라고 해서 해석하기가 어렵게 해놓았지만, 한글 킹제임스에서는 쉽게 잘 번역했다.
'그들의 하는 일로 인하여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라'
즉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사랑하고 극진히 존경해야 한다. 존경하라는 의미 속에는 그들에게 물질적인 공급도 할 것을 포함한다. 여기서 '극진히(가장)'라는 말이 흥미로운데, 헬라어 '휘펠 ὑπερ' 는 '~~ 보다도'라는 의미다. 즉 교회의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함을 가리킨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장로들에 대해서 서로 상충하여 보이는 이중적인 권면을 했다.
장로들에게는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오히려 수고해서 성도들을 도울 것을 권하였고(행 20:33-35),
성도들에게는 장로들을 지극히 존중하며 물질적으로도 공급할 것을 권하였다(13절, 딤전 5:17).
서로 상충하여 보이는 이 명령은 묘하게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사역자들은 전자의 명령을, 성도들은 후자의 명령을 따르면 될 것이다.
그런데 비극은 이 명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때다.
장로들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존경할 것을 강요하고, 성도들은 장로들에게 희생과 수고를 강요할 때 그 공동체는 깨지기 시작한다.
평신도교회라고 하며 개척한 교회들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문 닫는 교회의 공통된 특징을 보면 평신도교회를 오해하여 성도들이 자신들에게도 장로와 똑같이 대접해 달라고 요구하며 리더십을 1/N으로 나누기를 요구한다.
두세 명일 때는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열 명만 넘어도 그것은 어려워진다. 교회는 모든 일을 1/N으로 나누어서 사역하는 집단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서로 봉사하는 공동체다. 은사와 관계없이 성도들이 설교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은 올바른 교회관이 아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자들이 가르쳐야 하며,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다스려야 한다(롬 12:7,8). 교인들은 그런 은사를 분별하고 장로를 올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 비위 맞추는 곳이 아니다. 만일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자가 강단에 선다면, 스토리텔링 기법을 잘 배워서 성경 본문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자신과 교인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교회가 바로 서려면 장로들은 말씀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중받아야 한다. 자신들이 뽑은 자들이 아닌가? 성도들이 장로들을 존중하지 않고 뒤에서 비난하거나, 혹은 전임 사역하는 장로(목사)가 생활이 궁핍하여 쩔쩔매게 만들면 그 교회가 어떻게 제대로 서겠는가?
성도들이 자기 교회의 사역자를 존경하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정상적인 교회 기능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사역자들을 도저히 존중할 수 없다면, 그 교회를 떠나는 게 교회와 자신에게 유익하다. 교회당 시설이 좋아서, 친구들이 좋아서 다닌다는 것은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이다. 교회는 취미 집단이 아니다. 그리고 사역자들도 성도들이 신뢰하지 않는다면, 직분을 사임하는 것이 도리다. 자리에 욕심내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꺽이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다. 때가 되었을 때 겸손하게 물러나는 것이 교회와 자신을 위해서 유익하다.
장로(목사)들은 충성을, 성도들은 장로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존경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거나, 가족이라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 세상을 거스르는 성도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세상 사람들은 복수하고 싶어 한다. 사소한 것으로 분노하고, 지나치게 복수한다.
세상 사람들의 복수심에 비하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라'(레 24:20)는 율법은 오히려 온건한 명령이다. 사람들은 한 눈을 다치게 하면 상대방의 두 눈을 뽑아서 복수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 인터넷과 영화와 각종 뉴스를 통해서 모든 국민들이 분노와 증오에 길들어 가고 있다. 심지어 교회 사역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마저 '애국'이니 '정의'니 하는 명목으로 교인들 마음속에 증오와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말 말세다. 미움의 영이 목회자며, 교인이며 가리지 않고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선을 따랐다. 양보할 줄 알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했다.
적어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를 몰고 갈 때, 상대방이 예의 없이 앞지르기 했다고 해서 욕하고, 분노하며 복수를 꾀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신앙이 있는 자라면 별것도 아닌 것으로 필요 이상의 화를 내며 달려들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되받아치며 화를 내기보다는 사랑으로 달랠 줄도 알고, 사소한 것에도 미안하다며 사과할 줄도 안다.
신앙이 있는 자라면 자신이 손해 볼 줄 알면서도 양보할 줄 알고,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줄도 안다.
세상 사람들은 복수가 통쾌하다고 말하지만, 성도들은 용서가 통쾌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율법적으로 어설프게 용서하면 자신과 상대방에게 모두 독이 되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면 그것은 놀라운 열매가 되어서 돌아온다.
성도는 가시나무 속에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꽃이다.
어두움이 심할수록 빛이 더 돋보이듯이 요즘처럼 분노와 미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시대에서 관용과 사랑을 가진 성도들은 몹시 귀하고 돋보이는 존재다. 성도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복수할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자.
주님,
주님의 마음이 제게 있게 하셔서
이 악한 세대에서 빛이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