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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장23-28 / 미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3.04.21|조회수990 목록 댓글 0

■2023년4월21일(금)■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묵상/살전 5:23-28)

 

◆ 영,혼,몸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기원한다. 영은 하나님과 교류하는 영역이고, 혼은 인간의 정신 영역이며, 몸은 세상의 물질세계와 연결되는 영역이다.

 

신학적으로는 인간을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삼분설과 영과 몸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분설이 대립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삼분설이나 이분설(롬 8:10, 고전 7:34)이나 모두 바울이 쓴 서신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분설을 받아들이면 여러 영적인 활동을 설명하고 분석하는데 유용하다. 그러나 영혼을 혼과 영으로 나눔으로써 두 개의 자아가 되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벌코프에 의하면 아폴리나리우스가 삼분설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인성을 손상시키고 난 뒤에는 급속하게 삼분설이 쇠락했다고 한다. 오늘날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이분설을 지지한다고 한다. 나도 삼분설보다는 이분설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어차피 영과 혼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삼분설을 지지하기 보다는 활동 영역 상 두 개로 말해졌다고 본다. 예를 들면 '마음과 뜻'이라고 해서 뜻이 마음과 분리된 어떤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어차피 인간의 자아는 하나인데,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로 심하게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뇌가 좌뇌, 우뇌 두 개로 구성되었는가, 아니면 그냥 하나인가로 논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좌뇌로 수학을 풀겠다고 해서 결심했다고 좌뇌가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만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을 모두 흠없게 보존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미쁘시다(faithful)!

미쁘시다는 말은 절대로 약속을 깨지 않는, 그리고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고 끝까지 신용을 지키는 분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미쁘신 하나님께서 흠 없게 내 영과 혼을 보존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 뿐만 아니라 몸도 부활시키심으로써 온전하게 해주실 것임을 의미한다. 

오, 미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루실 것이다. 

 

◆ 도움기도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같이 사도 된 자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중에 다른 형제들의 도움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의 슈퍼맨은 없다. 모두가 서로의 기도가 필요하고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극히 연약해 보이는 형제에게도 기도를 부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미약한 기도조차도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다.

 

사람들은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나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기를 꺼려한다.

 

'중보'라는 말은 중간에서 양쪽을 중재하는 자가 사용하는 단어다(갈 3:20). 서로 화해시키는 위치인데, 특히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화해시키는 일을 '중보'라고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중보는 위대한 일이다. 이러니 함부로 중보라는 말을 쓰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나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기가 황송하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중보기도라는 말이 적합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고자 할 때 중간에서 모세가 말리는 기도(민 14:11-20)와 같은 것은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신다(롬 8:26).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불편하다. 도대체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어떻게 바울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는 말보다는 '도움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바울도 형제들에게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도움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성령충만하고 능력이 많다고 해도 형제들의 도움기도가 필요 없는 자는 없다. 사람은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움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심으로써 우리가 서로 형제됨을 각인시키신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면 5분도 안 되어서 기도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을 위해서 도움기도를 하려면 수십 분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하루에 다 할 수 없어서 요일별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런 도움기도를 많이 하라. 내 기도도 못하는 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내 기도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마 6:33).

 

도움기도는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고 그의 심령을 더욱 성장시킬 것이다.

 

 

◆ 문안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당시에는 뺨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했는데, 바울은 여기에 '거룩하게'라고 덧붙임으로써 어떤 불순한 동기도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문화적인  명령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다. 어떤 문화에서는 뺨에 입 맞추는 인사가 무례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끔 발견되는 문화적인 명령에 대해서는 우리가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는 명령은 실천할 필요가 있다. 친한 형제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한다. 교회 내에서 편 가르기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스르는 셈이다.

 

문안하려면 발로 뛰어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문안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내키지 않아도 문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신앙생활이다. 예배에 빠진 형제에게 연락해 보고, 무슨 어려운 일이 없는지 알아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살아갈 용기가 되기도 함을 기억하자.

 

문안하라와 같은 명령은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것도 신앙생활의 일부다. 공동체는 그런 관심과 교제 속에서 점점 더 튼튼해진다.

 

주님,

악하고 부패한 세대에서 제 영과 혼과 몸을 제대로 잘 보존해주실 것을 믿고 의탁합니다. 날마다 조그마한 일에도 순종하며 형제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한 도움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https://youtu.be/j7N33YzBp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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