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1월 11일(월)■
(히브리서 9장)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묵상)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
인간들은 범죄한 사람에게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게 하기 위해 감옥에 가두거나, 육체적인 형벌을 내리거나 그의 목숨을 거둔다.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가장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어떻게 그냥 넘어가시겠는가?
만유인력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를 만드셨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라고 하셨다.
죄는 선을 행함으로써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죄의 값을 치름으로써 용서가 되는데, 죄의 값은 곧 죽음이다.(롬 6:23)
그리고 피는 생명을 의미하며,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것이 필수가 된다.
누구의 피를 흘려야 하는가? 바로 죄를 지은 당사자의 피다.
다시 말하자면, 죄의 값으로는 죄를 지은 당사자의 목숨이 지불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죄인들은 절망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살 길을 열어두셨는데, 곧 죄를 지은 자가 살고 싶다면, 다른 목숨으로 대신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목숨에는 조건이 붙는데, 결코 죄를 짓지 아니한 자의 목숨이다. 죄를 지은 자의 목숨은 자기 죄값을 치러야 할 목숨이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양과 소가 인간의 목숨을 대신했다. 그러나 인간이 지은 죄를 양과소가 대신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이것은 미래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들의 죄값을 위해 피를 흘려주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임시로 허락하신 은혜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써, 완전한 죄사함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리고 단 한번으로 대속의 제사를 끝내셨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통틀어서 단 한번의 속죄제로 끝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가 이 땅의 성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하늘의 성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곳은 시간을 초월한 곳이며, 영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하는데, 그 이유는 마치 십자가의 사건이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한 최종 결산인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즉 미래는 더 이상 고려치 않은 느낌을 주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으로부터 우리까지를 6000년으로 계산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점은 아담 이후 4000년이 지난 후고, 현재는 십자가로부터 2000년이 지났다. 이런 세상 끝 논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착각이 아닌가?
그리고 그 착각을 바탕으로 논리전개를 했다면 그것이 어떻게 맞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 끝'이란, 최종 심판을 말하는 종말의 의미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시점이 진정한 끝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 끝'이란 구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그림자로서의 예표가 실체로 드러난 시점이다. 곧 구약 시대가 끝나고 신약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때가 차매'(갈 4:4)를 표현을 사용했다.
이제 신약의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현재를 늘 '말세'라고 부른다. 언제라도 주님은 재림하실 수 있으며, 주님의 재림은 곧 이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 끝 시대이다. 더 새로운 신약은 없다. 이것이 끝이다.
한번 죽는 것은 인간에게 정해진 것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지금이 은혜의 시대이며 구원의 날이다. 이 기회가 지나가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주 예수님, 이 은혜의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은혜 가운데 살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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