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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고보서 1장22-27 /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19.12.05|조회수521 목록 댓글 0

■2019년12월 5일(목)■

(야고보서 1장)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묵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

예배당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해서 믿는 자가 아니라,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가 진짜 믿는 자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믿고 있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믿음은 매우 오묘한 경지다. 진짜 믿으면 그는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과 이야기 하던 유대인 남자가 메시야임을 깨닫자,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외쳤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유독 그런 속임수에 잘 넘어간다.
목사나 장로만이 아니라 직분이 신임 구역장일지라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나면, 마치 나는 잘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내 삶 속에서 진짜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야고보가 지적한 대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믿고 천국에 갈지 모르나, 막상 나는 버린 바 되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고전 9:27)
우리는 사람들에게 줄서라고 말하고 자신은 열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줄에 서는 사람들이다.
주님, 이런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25)

이 말씀은 오해되기 쉬운 구절이다.
이것을 모세의 율법으로 해석한다면, 명백하게 바울과 대립된다.
바울은 율법을 '얽매였던 것'으로 말하고,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났고,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롬 7:6)
우리는 야고보가 오래된 중고품을 '자유'라는 색깔을 칠해서 신상품으로 제시한 몰염치한 자로 몰아가면 안된다.
일부 주석가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바울과 야고보를 싸우게 하고 있다.
우리는 야고보서로 바울의 복음을 폐기하면 안된다. 오히려 바울의 복음으로써 야고보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대인들 사이에 율법에 대한 논쟁이 크게 벌어졌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이에 대해서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렸다.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0,11)라고 말했고, 야고보도 여기에 동의하여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 것'(행 15:19)을 주장했다.
만일 사도들의 그 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기쁨으로 지키도록 결의했더라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전락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던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다시 모세의 율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야고보서를 해석할 때 사도행전에서 야고보와 사도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복음의 진리, 곧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 15:9),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행 15:11)을 받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안된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쓴다면,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믿음으로써 깨끗한 마음이 되어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0,21)이라고 표현했고,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용어를 달리 썼을 뿐이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자이나 무법자는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다. 즉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형제사랑'과 '복음증거'를 삶 속에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27)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이런 경건은 어떤 경건인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에서 사람들은 종종 산 속에 틀어박혀서 도를 닦는 수도사를 연상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경건'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산 속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즉 야고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경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고아와 과부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약자였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의 이러한 약자에 대한 관심과 돌봄은 믿는 자의 마땅한 바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떠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유행과 세상 철학과 세상 가치관에 물들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TV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소설을 읽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다만 거기에 담겨진 있는 철학과 가치관에 나도 모르게 물들어버리는 것, 바로 그게 문제다.
불신자가 툭 던진 한마디를 무심코 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만일 물들지 않을 자신이 없으면, TV를 멀리하고 영화와 소설을 외면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주장과 철학은 언제나 거리를 두고 살펴야 한다.

매일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경계하며 나의 사상을 진리로 무장하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자.

주예수님, 제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혀에 재갈을 물리고 말을 절제하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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