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6월3일(수)■
(베드로전서 4장)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묵상/벧전 4:15-19)
◆ 피해야 할 고난
우리가 피해야 할 고난은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받는 고난이다. 살인, 도둑질, 악행 등은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받는 고난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사람들은 자기 죄때문에 고난을 받기도 하지만, 남의 죄에 휩쓸려 들어가 고난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남을 돕는 것은 아름다우나, 남의 죄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불필요한 고난을 야기시킨다.
예를 들면, '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잠 22:26)라는 말씀이 있다. 보증을 서는 것은 한마디로 내가 남의 빚을 떠 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돈을 꾸어줄 수는 있어도 남의 돈을 꾸는 것은 피해야 한다.(롬 13:8) 따라서 보증을 요구해올 때, 내가 이 빚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만일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보증을 거절해야 한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보증을 섰다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것이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로 받는 고난이라고 생각된다.
◆ 기꺼이 당해야 할 고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
지금이야 기독교인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힘을 갖고 있지만, 언젠가는 기독교가 소수가 되고 각종 미디어로 부터 조롱의 대상이 될 때가 온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때가 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여러 가지로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고난이 없는 이 시기에 믿음이 더욱 굳건하도록 준비해 놓아야 한다.
과거에 중국에 갔을 때 나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하는 형제들을 보았다. 그들을 보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과연 나는 고난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 생색내며, 불평하는가? 내가 예배에 늦지 않기 위해서 서두르는 것, 어려운 형제를 찾아가 보는 것, 함께 기도하는 것, 이것도 믿기 때문에 하는 수고랍시고 '고난'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런 것조차 감당 못하면서 어찌 환난 때에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 심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17)
마지막 때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한다. 그 심판이란 쭉정이와 알곡을 가르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혹독한 환난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 통해 교회 내에서 진짜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갈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 알곡들을 모두 데리고 가시고, 남은 자들을 모두 묶어서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마 3:12)
◆ 구원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18)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여 안일함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겨우'라는 말에 당황한다. 이 말씀은 마치 행위 구원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행위 구원론자들은 이 말씀에서 힘을 얻어 더욱 율법을 강조하며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행위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내 노력, 내 공로에 달린 것인가? 우리는 아직 구원을 확신하면 안되는가? 구원받기 위해서 쏟아야할 노력이 아직 남았는가?
일단 베드로는 이 서신서 앞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9)
즉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천명하고 있다. 구원은 풍성한 것이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라고 하셨다. 내가 구원을 못 받았을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과 인내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출애굽한 백성은 수십만 명이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명이었다. 성경은 오직 이 두 명만이 끝까지 믿음을 지켰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순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 남아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문제는 구원받은 것과 별개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 싸움과 고난과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구원을 잃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구원을 어떤 물건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믿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이 말씀은 믿음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아니면 배도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성경은 믿지 않는 자의 구원은 결코 보장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에 힘쓰며, 공동체와의 교제를 중시하는 것은 모두 믿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내 평생에 힘써야 할 일은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재산이 '믿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가치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죽을 때 끝까지 믿음을 지켰으면,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주 예수님, 저에게 주신 보배로운 믿음과 영원한 구원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믿음과 구원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이 믿음을 지키는 수고와 싸움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