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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7장26-34 / 십일조, 첫 열매 드리는 것과 신약적 헌금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0.09.17|조회수870 목록 댓글 0

■2020년9월17일(목)■

(레위기 27장)

26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 만일 부정한 짐승이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르지 아니하려면 네가 정한 값대로 팔지니라

28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34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묵상/레 27:26-34)


◆ 서원 예물로 부적합 한 것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26)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렇게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을 서원 예물로 사용하면 안된다. 서원한 예물은 그 외의 것으로 드려야 한다. 그리고 드리고자 한 것이 부정한 가축인 것이 드러났으면, 그대로 드릴 수 없으므로 물러야 했는데, 무를 때는 가격의 오분의 일을 추가해서 물러야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은 지극히 공경받으셔야 할 분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만일 온전히 바쳐진 것은 짐승이든 사람이든 죽여야 했는데, '온전히 바친 것'에서 히브리어 '하람'과 '헤렘'이 사용되었는데, '하람'은 진멸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출애굽기 22장19절에 의하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라고 했는데, '멸할지니라'라는 단어가 바로 '하람'이다. 그리고 '헤렘'은 화가 미칠 대상, 저주 받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온전히 바쳐진 것은 진멸해야 할 대상을 가리킨다. 여리고 성에서 물건을 훔친 일로 백성들에게 큰 화가 미치게 한 아간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멸하게 된 물건조차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므로 '거룩'하다라고 하신다(28).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거룩'이란 단순히 정결하고 신성한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구별된 것이라는 의미로서 인간이 임의로 처리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저주를 받아서 멸해야 할 대상은 사람들이든 가축이든 인간들이 임의로 대속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멸해야 했다. 그리고 땅의 경우는 황무지로 방치해야 했다.


◆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


가축이 처음 새끼를 배어서 처음 낳은 새끼는 무조건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매년 토지 소산에서 처음 익은 곡식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매년 곡식과 새로 증가된 가축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이렇게 드리는 것이 매우 고달팠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기쁨이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신정국가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십분의 일정도 되는 것은 부담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지주들이 소작농들에게 무려 80%를 가져갔다. 일본 강점기 시대 때 전라도에서 소작농들의 항거로 지주가 50%만 갖기로 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것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 신약적 헌금


구약에서 드렸던 첫 열매,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 이런 개념이 신약에서도 계속 존재할까?

일단 복음서까지는 존재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레위지파, 제사장, 성전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것"(마 23:23)을 명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율법의 실체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율법적인 신앙방식이 아닌 복음적인 신앙방식으로 모두가 바뀌어져야 했다. 성도들은 믿음이 온 후에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갈 3:25).


따라서 사도들은 이방 성도들에게 율법적인 규례를 요구하지 않았다(행 15:19, 20). 오히려 그런 것을 들이미는 유대인들을 책망했다(행 15:10).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방식을 달리 했을 뿐 하나님을 공경하는 개념은 동일하다.

구약에서 신자들은 처음 익은 곡식을 드릴 때 늘 이렇게 말해야 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신 26:10). 이 고백을 보라.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께 일정부분을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신앙의 태도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마치 나라에 세금 내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세속적이고 불경스러운 사고 방식이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는 신앙고백의 일부다.


율법은 그림자다. 그것을 실체로 보고, 본받는답시고 매년 첫 월급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강요하면 안될 것이다. 또한 율법을 들이밀면서 십일조를 강요해도 안된다. 김태규 목사는 십일조가 한국교회를 율법주의로 빠뜨리게 한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한국 교회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자기 일생을 드렸다.


이제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롬 7:6). 더 이상 율법적인 십일조가 강요되면 안된다. 각자가 기쁨으로 자원한 믿음의 헌금을 드려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헌금을 드리기를 아까워 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없다는 증거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율법으로 협박하여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생을 얻은 자로서 적어도 구약의 신자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넘어서서 십이조를 드리는 분도 보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가르쳐야 한다.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주님, 참으로 암울한 시대에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음을 기뻐합니다. 옛사람의 행위와 습관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구약의 신자들보다 더 나은 믿음의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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