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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12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0.10.19|조회수1,481 목록 댓글 0

■2020년10월19일(월)■

 

(마태복음 6장)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묵상/마 6:12)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2)

어떤 사람은 주기도문이 구원 받은 자들의 기도문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십자가 이후의 신자들은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 사해달라는 기도는  믿음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주장은 맞는가? 아니다. 오류다. 이것에 대한 긴 설명을 용납하라. 이것은 죄사함의 확신과 연결된 것으로써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단 한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영원히 해결하셨다(히 7:27, 히 10:12). 그리고 예수님의 속죄는 십자가 이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이전까지 포함된다(히 9:26). 즉 십자가의 대속은 십자가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나 다윗같은 사람들도 모두 십자가의 은총을 받은 것이다. 율법 하에서의 동물제사는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림자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도 십자가에서 단번에 해결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래의 죄도 다 해결되었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오해한다. 그것을 마치 미리 용서받고 죄를 그 후에 짓는 과정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치 커피숍에 미리 10만원을 지불하고 보너스 포인트와 함께 여러 번을 커피를 주문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무율법주의로 빠지게 하고, 방자함과 오만한 생활로 이끌게 한다. 구원파는 이런 면에서 큰 오류를 범했다. 

구원파가 놓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죄책을 예수께서 다 짊어지셨으므로 십자가 이후에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그러싸해서 흠 잡을 때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궤변이다. 그들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죄사함의 사실을 아는 것만이 중요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구원은 죄사함의 사실만을 깨달음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다(롬 10:9).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내가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죄사함을 받은 것은 아니다. 거듭말하지만 죄사함은 오직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은총이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엡 2:8)라는 말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라는 말을 유의하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곧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다. 그러나 이 은혜는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다(갈 3:22). 성경은 명백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음을 밝힌다(롬 5:1).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이 놀라운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지만,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그 음식을 맛볼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눅 14:16-24). 잔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참여하지 않는 자는 결코 배불릴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라고 함으로써 죄사함의 약속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임을 거듭 확인시킨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고 난 이후에 짓는 죄는 어떻게 용서받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요한일서 1장 9절을 인용하며 구원 이후의 죄는 자백함으로써 용서된다고 했다. 하긴 자백만 해도 용서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그러나 이것은 곧 어려움에 봉착한다. 매일 자백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기억력의 문제도 있지만, 편향적인 사고의 문제도 있다.  

예를 들면 내 아집과 날카로운 혀로 많은 형제들이 상처를 입고 사는데, 나는 매일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지 못하고 사는 삶을 자백한다. 북한 사람들은 저렇게 굶주리고 사는데 나는 너무나 먹기를 탐하고 사는 것을 자백한다. 성경을 더 많이 읽지 못함을 자백하고, 기도를 몇 시간씩 하지 못함을 자백한다. 오, 자백만 들어도 저 사람은 의인이라고 느낄 정도다. 이런 허접한 자백을 통해서 내가 죄사함을 유지한다고?  만일 자백이 죄사함의 수단이라면 나는 죄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복음을 더 연구하면서 사도 바울이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런데 도대체 구원 이후에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사도 바울은 구원 이후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단 말인가?  

그러다가 어느날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고백하고는, 믿고 난 후에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가?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죄사함의 은혜는 한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죄와 허물이 발생할 때마다 필요한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롬 1:16, 17).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미리 죄사함이 주어지고 그 후에 거기에 힘입어서 죄를 지어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어떻게 그를 거슬리면서 우리 양심이 편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는 죄를 짓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늘 죄사함을 받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자백을 하든 안하든 그런 것에 의지해서 죄사함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음으로써 끊임없이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미 거듭난 성도들은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함으로써 죄가 용서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만일 용서의 기도를 해야 용서된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주기도문을 입에서 떼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허물과 죄투성이인데 내가 완벽해지는 순간이 언제 온단 말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용서의 은혜를 받고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허물투성이지만 다만 우리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면 우리는 정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다. 그 때는 당연히 인정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백이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잃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계 2:1-5).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미경을 들이대며 나의 죄를 트집잡는 분이 아니라, 나의 방향이 올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실 뿐이다.   

주기도문에서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 즉 내가 지금 사함을 받지 못해서 용서받기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서의 은총이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허물과 죄투성이인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죄사함의 은총을 끊임없이 누리면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상기해야 하고 늘 형제들을 용서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조그마한 일에 분노하고 원한을 품는가? 주기도문을 하면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형제들을 용서하자. 그것이 용서를 받는 자의 마땅한 바다.   

주 예수님,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이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매일 허물투성이인 저를 주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저를 보혈로 정결하게 하십니다. 제가 이 은총 아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저를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며 저도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제 안에 이 용서의 은혜가 늘 있어서 주님과 화평을 누릴 뿐더러 사람들과도 화평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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