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11월7일(토)■
(마태복음 9장)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묵상/마 9:1-8)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는 보다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네 친구가 이 병자를 예수님 앞에 놓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침상 채 내려보냈다. (막 2:3-11)
이들은 예수님께로 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것이 믿음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 들었다고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예수님께로 가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 믿음이 아니다. 그들이 친구를 침상채 들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것이 비로소 진짜 믿음이 된 것이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이것, 저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그것이 진짜 믿음이 되는 것이다.
희망도 없고, 더 이상 기도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상황에서 친구들이 그에게 왔고, 그들은 병자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갔다. 나는 교회가 이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절망한 형제에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형제에게 다가가서 위로하며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 작은 자여
'작은 자야 안심하라'(2)
'작은 자'란 헬라어 '테크니온'을 번역한 것인데, 마태복음 7장11절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에서 '자식'이란 말에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영어성경은 대부분 '아들(son)'로 번역했다.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가 왔을 때, 그에게 '아들아'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이 사람은 죄때문에 병든 자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징계받았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물로 후회하고, 심한 죄책감 가운데 빠져있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혼의 사막과 같은 곳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에 빠져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겔 33:10)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자에게 주님께서는 단 한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키신다.
"아들아~"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신적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종아!'라는 말도 이 사람에게는 큰 감사고 감격일텐데 아들이라니! 이 한마디로 이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나는 청년시절에 깊은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했다. 기쁠 일이 없었고, 마음은 삭막했다. 그런데 어떤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거기에서 어떤 분이 갑자기 내 주변을 가르치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 외투 속의 감추어진 옷색깔을 말하면서 나를 지목했다. 그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것은 한줄기의 빛이었고, 곧 이어서 환한 빛으로 내 전체를 비추었다.
"아들아"
자신이 버린 바 되었다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자에게 이 한마디는 감격이 아닐 수 없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와서 내가 감히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할 때 아버지는 외쳤다. 잔치를 벌려라! 풍악을 울려라! 내 아들이 돌아왔다!(눅 15:18-23)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바로 이렇게 대하신다.
◆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5)
죄사함 받았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단 교주들이 거짓으로 그런 약속을 할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주님은 진짜 죄를 사하시는 분이시다. 그 증거로 중풍병을 낫게 하신 것이다. 죄 때문에 중풍병이 생겼다면, 그가 낫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진정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죄를 사하시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안심해도 좋다. 십자가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그가 흘리신 피는 실제로 이 땅에 뿌려졌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우리 죄를 위한 충분한 대속물으로 인정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움은 헛된 상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아멘!
주님, 주님은 심한 죄인조차도 마음이 가난해서 주님께 나아올 때 '아들아'라고 부르시며 반기시는 분이십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반드시 천국으로 보상하시는 주님! 주님을 경배하며 찬양합니다. 내 평생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