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7(금)■
(예레미야애가 3장)
1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묵상/애 3:1-26)
◆ 예레미야의 투정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11,12)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죄에 동조하지 않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에서 열외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릴 때, 자신도 굶주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동체가 받는 고난 정도에서 끝났으면 예레미야는 함께 견뎌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백성들의 고난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소외당하고 핍박과 갇힘과 매맞음과 죽음의 위협까지 수시로 받았다. 그가 물없는 깊은 진흙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렘 38:6)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처한 기가 막힌 상황을 투덜거리며 쏟아낸 글들이 가득하다. 하나 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처절한지 모른다.
자주 자주 나를 치시는 하나님(3)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6)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8)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신 하나님(12)
조약돌로 내 이빨을 부러뜨리시는 하나님(16)
심지어 예레미야는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을 자기를 찢기 위해 기다리는 곰과 몰래 숨어있는 사자와 같다고 말한다(11,12). 예레미야의 이런 투정은 결코 추천할만한 믿음의 태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기도 속에서 오히려 연약한 나의 모습을 보며 친근감을 느낀다. 아마 나도 예레미야와 같은 환경에 처했으면 그렇게 묘사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투덜거리지 못하면 못견딜 것 같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투정은 욥의 투정과 비슷하다. 욥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욥 9:17,18)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욥 40:2,8).
◆ 예레미야의 믿음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21)
예레미야의 투덜거림은 20절에서부터 반전된다.
예레미야는 그의 고난을 생각할 때 깊이 낙심이 되고 하나님께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었지만, 놀랍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서 용케도 믿음을 가지고 일어선다. 그는 절망과 좌절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자, '그대로(켄)'되었다고 할 때도 사용되었다. 원인이 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다.
예레미야가 고초와 재난 속에서 낙심이 되지만, 그 결과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그래서 나는 히브리어 '켄'을 영어성경들의 'therefore'보다 '오히려'로 번역한 한글 성경이 훨씬 더 잘 번역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레미야의 '오히려'의 믿음이 앞서 말한 투덜거리는 기도와 불경스러운 말들을 모두 휴지로 만들었다. 앞에서 무슨 말을 했든 그 마지막 결론이 믿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 투덜거림을 받아주신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2,23)라고 하는 예레미야의 고백에 나는 눈물이 난다. 나는 이 아침에 이 구절을 암송한다. 예레미야의 고백은 진짜배기 신앙고백이다. 그냥 립서비스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고백이 아니다.
심각한 고난 속에서 이것이 오히려 주님을 향한 희망이 되었다고 말하는 믿음,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에서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하는 믿음, 그리고 고초와 재난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삶 속에서도 '여호와는 선하시도다'라고 외치는 그 예레미야의 믿음이 오늘 내게도 있기를 바란다.
주님, 주님은 나의 기업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소망으로 삼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는 이 믿음이 항상 제게 있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