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목)■
(마태복음 20장)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묵상/마 20:1-16)
◆ 포도원 품꾼의 비유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1)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특이한 고용인을 보게 된다.
이 고용인은 이른 아침, 제 삼시(오전 9시), 제 육시(정오), 제 구시(오후3시), 제 십일시(오후 5시) 등 모두 4번에 걸쳐서 일군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의 노동 종료시간은 오후 6시다.
이른 아침에 들어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다. 원래 그렇게 계약을 맺고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뒤늦게 들어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는 것에서 원망이 발생했다. 똑같이 주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고용된 사람들은 모두 주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하마터면 하루 종일 빈둥대다가 빈손으로 집에 갈 뻔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단지 남이 나보더 덜 수고 했는데, 나와 똑같이 대우받는 것에 대해 원망하는 것은 시기심 많은 인간의 죄성일 뿐이다.
여기서 한 데나리온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할 필요는 없는 듯 하다. 이 비유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영역에 적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종종 우리는 남보다 스스로를 더 낫다고 여겨서 동일하게 취급받는 것에 대해 불평하기도 한다.
가령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갓 믿은 형제 안에 계신 주님이나, 내 안에 계신 주님이나 동일하고, 동일한 믿음, 동일한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동일함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됨을 유지하며 형제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된다. 모두 은총으로 받은 구원이다. 비교하지 말고 감사할 따름이다.
◆ 처음된 자와 나중된 자의 의미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이 천국 비유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이다.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마당에 먼저된 사람이 나중이 되었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처음 온 사람이 섭섭해하기는 하겠지만, 나중된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처음 온 순서와 품삯을 받는 순서가 뒤 바뀐 것을 말씀하신 것인가? 전혀 아니다! 품삯 받는 순서에 대해서는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불평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된 자가 나중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것을 관계의 차이를 의미한다고 본다.
누가 더 주인과 가까워졌는가?
이론적으로 볼 때 주인과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은 처음 온 사람들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은 주인을 원망했고,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 그러나 나중에 온 사람들은 주인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주인이 고용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은 빈손으로 배고픈 가족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향한 감사와 관계의 친밀도로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될까? 과연 갓 믿어서 주님에 열광하는 사람보다 점수가 높을까?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이 비유와 비슷한 사건을 찾아볼 수 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사건이다. 한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면서 그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 때 이 바리새인은 마음 속으로 이 여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여자는 알려진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말했다. 백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와 오십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많이 탕감받은 자입니다. 네 판단이 옳도다.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눅 7:36-48)
분명히 바리새인은 수고도 많이하고, 생활도 더 충실했다. 이 여자와 동일하게 대우받는 것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더 주님을 사랑했는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누가 더 친밀할까?
종종 갓 믿은 사람들이 오래된 신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열심을 내는 것을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을 망치는 사람들이 대부분 오래된 신자들이다.
늙은 닭은 햇 닭을 쪼고 거만을 떠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우리는 구원받아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은혜를 더 이상 은혜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심술궃은 늙은 닭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만일 처음 온 사람이 끝까지 주인을 신뢰하고 고마움을 버리지 않았으며, 나중에 오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주인을 칭찬하고 찬양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그는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결코 나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된 자로서 나중으로 밀려나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남과 비교하지 말자. 나보다 부족하다고 믿은 사람이 나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해서 배아파하지 말자. 항상 내게 주신 은혜를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 사는 것이 나중으로 밀려나지 않는 비결이다.
주님,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결코 나중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늘 감사하고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