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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18-22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거기에 담긴 교훈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1.01.27|조회수333 목록 댓글 0

■2021-1-27(수)■

 

(마태복음 21장)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묵상/마 21:18-22)

 

◆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19)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월요일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 정화 작업을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곧 화요일에 예수께서 저주하신 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제자들이 묻자 교훈을 남기셨다고 기록했다(막 11:13-24). 마가의 시간적 순서가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교훈을 남기신 것을 한 날로 묶어서 소개한다. 우리는 이런 불일치를 오류라고 하면 안된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데, 마태는 이것을 이틀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했을 뿐이다.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르게 된 사건은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이 주님께서는 열매없는 삶에 대해 경고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오늘 본문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아직 열매맺을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막 11:13).  만일 주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열매 맺는 삶에 대한 교훈을 남기셨다면 나는 당황했을 것이다. 무화과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저주하신 것은 횡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언제라도 열매없으면 말려죽일 것이라는 인정사정없는 무서운 경고가 결코 아니다.  이 사건은 주님의 다른 의도가 있었다. 즉 믿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함이다.

 

 

◆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21)

 

이 교훈을 남기시는 때는 화요일, 곧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겨우 3일 남겨진 시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는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교훈이다. 결코 열매에 대한 교훈이 아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배우기를 원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심지어 믿음만 있으면 산을 들어서 바다로 옮길 수도 있다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의 세계를 제자들이 보기를 원하신 것이다. 

앞으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오직 믿음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재산과 무기는 무엇인가를 일깨우신 것이다. 

 

나는 믿음만 가지고 부족하다고 외치는 성도들을 보면 답답하다. 그들은 믿음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거나 잘못된 선입견이 진리를 못보게 막은 것이다. 그들은 불도저는 마당에 두고 삽을 들고 다니면서 삽질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이 삽질을 해서 집 앞에 그럴싸한 동산하나 만들어놓고 자랑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을 옮겨본 사람들은 그런 삽질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믿음으로 백두산을 옮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삽을 들고 약간의 보탬을 주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가?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바둑알도 옮기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산을 옮길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산을 옮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며, 태산만큼 무거운 죄의 짐을 믿음으로써 벗어던진 사람들이다.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한 예화를 들어보자.

가령 삭개오에게 있어서는 그의 재산에 대한 탐욕은 절대로 옮길 수 없는 산이었다.  율법을 잘 지킨 반듯한 부자청년조차도 재산에 대한 욕심때문에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을 때 엄두를 못내고 근심하면서 갔다. 그런데 탐욕의 사신인 세리 삭개오가 어떻게 자기 재산을 남에게 준단 말인가? 그런데 삭개오에게 믿음이 생기자 놀라운 일을 했다. 부자 청년이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불가능하게 느낀 것을 삭개오는 단숨에 해버렸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다.

오, 이런 예를 들자면 무수히 많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의 세계를 깨닫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교훈을 남기신 것이다. 

아, 불쌍한 무화과나무!라는 식의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라! 지금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다. 온 세계의 무화과나무를 다 없애도 제자 한명을 건질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태산처럼 느껴지는 육신의 정욕과 곤란한 환경과 관계의 어려움들이 널려있다. 열심히 삽질해보지만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이제 믿음의 세계를 배우자. 나는 믿음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이런 찬양이 있다.

"나는 믿음으로 주 얼굴 보리니, 아침에 깰 때에 주 형상에 만족하리"

 

주님, 제가 믿음의 세계를 보다 더 알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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