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6(토)■
(마태복음 23장)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묵상/마 23:13-22)
◆ 예수님의 저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오늘 본문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저주가 선포되어있다. 이들은 모두 백성들을 가르치는 자들이며,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이것을 현대어로 바꾸어서 말하자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목사와 장로들이여"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당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받을 충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싸잡아서 저주하신 것은 아니고, 그 앞에 수식어를 붙이셨다. "외식하는", "눈 먼"
예수님의 이 저주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은 두 부류다.
하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며, 하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다.
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저주의 경고는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는가?
절대적인 오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경고다. 이 경고는 목사보고 교회당 다니지 말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속지말고 '목사를 잘 분별하고 교회에 다녀라'고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미숙한 선장이 운행하는 배를 타고 있는 자가, 운행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니까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배가 침몰할 때 선장만 죽는게 아니라 나도 죽기 때문이다. 성경은 거기서 나오라고 경고하신다.
◆ 화 있을진저 - 천국 문을 막고 있는 선생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장 큰 죄는 선생되면 안되는 자들이 선생 노릇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자신들만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까지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온갖 존경과 대접을 다 받고 거들먹거리기까지 했으니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 화 있을진저 - 그들의 열정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망치는 자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4)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 그들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쳤다. 그들이 미신을 전한 것이 아니다. 소위 성경을 가르친답시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었다.
차라리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면, 차라리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자기 하나 망하는 것으로 끝났을텐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돌아다녀야 후원금도 생기고, 가르쳐야 생계비도 생기니까, 열심히 돌아녔고, 열심히 가르쳤다. 개종하기 전의 바울처럼 생기는 것도 없이 단순한 종교적 열정만으로 돌아다닌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후에 구원받고 난 뒤에 이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 화 있을진저 - 맹인된 지도자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16)
눈 먼 인도자들은 오로지 자기 탐욕을 위해서만 행동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그 금을 물어내도록 했다. 이것은 실제적인 수입이 되었다. 그러나 성전으로 맹세하면 물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의미없는 맹세로 취급했다. 한마디로 진실과 믿음이 없어지고 돈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십일조가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지도자가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 그 지도자를 떠날 때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타락한 것이다.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함께 지옥가기 싫으면 떠나라.
주님의 이 경고는 참으로 두려운 경고다.
나는 가르치는 자로서 수십 년을 살았다. 돌이켜 보면 참 두렵다. 영글지 않은 과일을 마치 명품 과일처럼 판 과일장수로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겸손했다면 그나마 봐줄만 할텐데,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우쭐대며, 남을 비판하기 좋아했던 것은 참으로 너무나 부끄럽고 회개해야할 부분이다.
어떤 때는 성경교사 역할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로서 피할 수 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부분적으로 아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한 때 이것에 대해 많은 죄책감을 가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부분적으로 아는 자들이며 어차피 이것이 인간의 한계임을 알게 하셨다.
이제 선생된 자들이 할 수 있는 태도는 오직 하나다. 겸손이다. 어느 누구도 온전히 아는 자들은 없다(고전 13:12).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돕는 자들로 부르셨음을 기억하자. 어떤 상황에서도 선생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말자.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자.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자. 아는 체와 고집을 버리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자.
주님,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겸손을 잃지 않게 해주시고, 형제들을 진정으로 돕는 자로서 살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