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2(월)■
(사도행전 2장)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묵상/행 2:42-47)
◆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생활상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베드로의 메시지에 무려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
최초의 부흥이다. 그후로도 끊임없이 주님께로 사람들이 돌아왔다.
성경도 없던 시절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을까?
▷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오늘날의 사복음서와 서신서를 육성으로 들었던 시절이다.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한 논문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들었던 시절이다.
오늘날의 이들의 육성이 책으로 남겨진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이것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서로 교제했다.
교회란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다. 모름지기 성도들이 교제하는 곳이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따라 서로에게 기여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공동체다.
▷ 떡을 떼었다.
이것은 성찬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식사와 성찬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진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서로가 하나님의 식탁에 앉은 한 가족임을 날마다 상기할 수 있었다.
▷ 기도했다.
교회사를 보면 주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이 임하시면 기도가 뜨거워졌다. 기도는 부흥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부흥의 결과다.
성도의 삶에서 기도가 사라지면, 그의 삶은 안봐도 뻔하다. 그는 세속적인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약간 신학적 지식으로 교회에서 인정받고 경건한 성도 행세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가 없는 그의 삶은 외식적이고 무기력할 것이다. TV도 안보고 오락도 하지 않고 사역도 제법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기도가 없다면 그는 여전히 세속적일 것이다.
새벽기도, 철야기도에 참석한다고 해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도가 정말 주님과 교제하는 기도인지 단순히 앵무새처럼 자기 필요만을 늘어놓는 기도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이 당시에 헌금이란 오로지 형제들과 나누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이런 헌금에 눈을 뜬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도들이 받기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고, 받을 때보다 줄 때 기쁨을 더 느끼며, 형제들이 서로 힘써 돕는다면 교회공동체가 얼마나 멋있을까?
▷ 모이기를 힘썼다.
그들은 성전에 날마다 모였다.
당시에 성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예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전에서 모인 것은 성전이란 장소가 예배의 핵심요소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에 성전 뜰은 수천 명이 모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성전이란 장소를 결코 고집하지 않았다. 이들은 집에서도 모이고 들판에서도 모였다. 이들은 점차 구약교회의 모습을 벗고 신약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팬데믹은 장소 개념을 초월해서 모일 수 있음을 다시금 깨우치는 계가가 되었다. 나는 온라인의 세계가 열리면서 더 많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 집에서 떡을 떼었다.
이것은 성찬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기 집에서도 성찬 예식을 행했다.
46절에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밥 먹을 때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임을 기억하며 식사에 임했음을 의미한다. 식사조차 거룩한 신앙 행위가 되다니! 이것은 너무나 놀랍다!
오늘날의 식사기도는 그런 것을 이어받은 전통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식사기도 속에는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만 있지,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생략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식사 기도가 생명의 양식되신 주님을 고백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성도들의 거룩한 삶은 바로 십자가를 묵상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성찬은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너무나 지혜로운 묵상 수단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성찬 집례를 오로지 성직자들의 권리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모든 가정에서 성찬이 실종된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조차 성찬을 일년에 한두번 정도 밖에 안함으로써 완전히 연례 행사와 박제된 의식으로 만들어버렸다. 성찬의 중요성을 깨닫고, 각 가정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 집은 밖에서 근무하는 딸이 오랜 만에 집에 오면 성찬 예배를 드린다. 그동안 가정예배가 다소 형식적이었는데, 성찬을 함으로써 예배가 예배다워졌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되고, 각자가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찬미하게 된 것이다.
▷ 하나님을 찬미했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해있음을 보여준다.
과연 나의 삶 속에서 이런 찬미가 저절로 흘러나오는가?
찬미하는 입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교회는 전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이런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지향했다. 그리고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모습은 재현되었다. 나와 우리 집과 우리 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가 이런 초대교회 모습이 재현되기를 간구한다.
주님,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건함과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들이 제 안에 형성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