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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장8-12 /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말라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1.09.28|조회수760 목록 댓글 0

■2021-9-28(화)■

 

(골로새서 2장)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묵상/골 2:8-12)

 

◆ 철학과 헛된 속임수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철학은 철학과 교수만 하는 것이 아니다. 뒷골목 깡패도 자기 나름의 인생 철학이 있다. 정치인들은 정치 철학이 있고, 목사도 목회 철학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철학으로 살고 있다.

 

철학은 나름의 논리적 체계를 갖고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바울 당시에도 사회를 지배하는 철학들이 있었다. 플라톤 사상이 있었고 유명한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행 17:18) 등이 있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의 철학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경고한다. 

 

철학이 자신을 넘어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면 그것은 주의(主義)가 되고 대중의 사상이 된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철학이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형제끼리 서로 싸우게 되고,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된다. 

 

천재들이 만든 철학은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이 보았을 때는 정말 초등학문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엉터리 세계관에서 비롯된 철학이 어떻게 제대로 진리에 도달하겠는가?

 

대학 시절에 복학생 선배 하나가 자신이 최근에 읽은 책을 소개했다.

니체가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책이었다. 감탄했다는 것을 보니 꽤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내가 그 책을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내게는 너무나 유치했다.  그 책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본다. 그 책에는 인간의 사랑은 분량의 한계가 있어서 누구에게 쏟으면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는 쏟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꽤 그럴싸하다. 그리고 이어진 논리는 이렇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그만큼 인간을 사랑할 수 없게 되므로 인간을 좀 더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무신론자들은 손뼉 치며 감탄할 만한 논리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게 됨을.

매일 부인을 구박하고 아이들을 방치한 술주정뱅이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식의 간증을 무수히 들었고 또 보았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내 경험도 그렇고, 내 주변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편협되게 살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니체도 그의 인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이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세상의 철학을 보면 초등학문에 불과하고 유치하다.

세상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니다.  

 

 

◆ 속지 않는 방법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어떻게 세상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속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우리가 받는 교육과 우리가 보는 드라마, 우리가 읽는 책들 속에 온통 국가의 철학과 작가의 철학들이 들어있다.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세상 철학의 물결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미 우리는 홍수가 난 물살에 휩쓸린 상황이다. 떠내려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구조자가 손을 내밀 때 그의 손을 붙잡는 길뿐이다.  강력한 그의 손이 나를 붙잡을 때 나는 떠내려가지 않고 살 수 있다.

 

다이아몬드 감별사가 되는 방법은 어느 것이 가짜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느 것이 진짜인가를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계속 진짜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해서 진짜를 제대로 알게 되면 세상의 모든 가짜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진짜를 배워야 하는데,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제대로 된 분별력이 생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들 위에 계시는 왕 중의 왕이시다. 그분보다 높은 분이 없다.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알자. 힘써 그를 알자.

 

 

◆ 그리스도의 할례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귀화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다.

당시 유대인 중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유대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오해한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바람에 생겨난 오해였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큰 나라임을 보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였다.

 

아이들이 부엌 소꿉장난을 하면 거기에는 솥도 있고 그릇도 있지만, 아무도 거기에 진짜 밥을 해 먹지 않는다.  그것은 모조품이고 진짜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제 진짜가 왔다. 진짜가 온 마당에 그림자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

 

손으로 받는 육체의 할례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다. 한마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베푸신 할례다.

 

어떤 성도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할례인 줄 안다. 그것은 오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방한 모조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세례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거치는 예식이다. 곧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겠다는 신앙고백이다(벧전 3:21). 매우 귀한 예식이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의 할례가 아니다.

 

세례를 통해 믿음을 고백하고, 그러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게 된 이 모든 것, 곧 거듭남이 그리스도의 할례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내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할례다. 오, 우리는 손으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다!

 

주님, 제게 이런 할례를 베푸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인생을 살게 하시고, 세상에 이 복음을 당당하게 전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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