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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3-8 /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

작성자최야곱|작성시간21.12.30|조회수1,100 목록 댓글 0

■2021년12월30일(목)■

 

(로마서 5장)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묵상/롬 5:3-8)

 

◆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언급된 환난은 꼭 신앙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는 핍박만이 아니다. 세상에 살면서 당하는 여러 고통을 포함한다. 그렇게 믿음 좋은 바울도 풍랑을 만났었고, 강도도 만났었고, 광야에서 자연의 위험도 겪었고, 거짓 형제들에게 속기도 했고, 주리며 목마른 상황에 부닥친 적도 여러 번이다(고후 11:25-27).

 

바울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한 것은 자기는 배부른 상황에서 남에게 의례적인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 속에서 그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난은 결국 소망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보다 더욱 하늘을 사모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처럼 이렇게 고통과 고난에 선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문의 '연단'이란 말은 헬라어 '도키메'를 번역한 것이다. NIV는 character(인격,성격)으로 번역했다. 너무 의역했다. 연단은 좋은 번역이다. 다른 곳에는 이 단어가 시련(고후 8:2), 증거(고후 9:13) 등으로 번역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연단이라고 번역된 것은 문맥에 잘 맞다. 철을 녹여서 그대로 칼을 만들면 금방 부러진다. 그러나 망치로 두들기면 점점 더 강해지고, 수천 번의 망치질 끝에 명검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 과정을 '연단(鍊鍛)'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아주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해간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속에는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런 세계관이 있기에 어떤 일이 닥쳐도 절망하지 않으며, 심지어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더욱 믿음이 단단해진다.

 

 

◆ 하나님의 사랑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두 가지 방법으로 확증하셨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또 하나는 성령을 내게 부어주심으로써 확증하셨다.

 

어느 재미교포 실업인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부모는 먹고살기 위해 아침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들어왔다. 이 아이는 부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잠잘 때 출근하고 잠잘 때 들어오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부모님을 볼 수 없는 것에 아이는 화가 났다. 부모님이 자기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는 점점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직 채 잠이 들기 전인데 퇴근한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는 잠이 든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곁에 오더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먹고살기 위해 너무 바빠서 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들을 지켜 주세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어머니의 눈물이 아이 얼굴에 떨어졌다.

그 눈물 한 방울로 충분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신다.

그 아이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기 시작했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컸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물이 있기 전에도 어머니는 이 아이를 사랑했다. 다만 자신이 믿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사랑의 증거다. 여기에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본래 나는 자랑하기 좋아하면서 반면에 자책감도 많은 사람이다. 양극단의 마음은 나를 늘 괴롭혔다. 자책감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아무래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계실 듯하다.

 

내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도 하고 이론적으로는 너무 확신 있게 말하지만, 막상 나 자신은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을 그냥 인간 세상에서 으레 하는 덕담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하게 되었다. 온몸에 생긴 채찍 자국과 피투성이가 된 벌거벗은 모습, 너무나 끔찍한 몰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렇게 죽으셔야만 했는가? 꼭 이 방법밖에 없는가?

 

이런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께 사랑의 증거를 더 요구하는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라고 느꼈다. 

 

하나님, 충분합니다. 더 증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보여주셨다. 그런 분이 이제는 사사건건 트집 잡으며 나를 향해 인상을 쓰고 계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어찌 가당한가?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가슴 아파 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신다. 마치 탕자가 돌아오기 전에도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기다리셨던 것과 같다.

 

태양은 바닷물을 다 쏟아부어도 식힐 수 있는 열기가 아니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7)

 

나의 무수한 실수, 나의 무수한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나로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용기를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라.

 

아마도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싸움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성령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된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는 순간, 우리는 말도 못 한 감격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없다고 해서 사랑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주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이다.

 

주님,

저를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이러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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