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생각이 멈춘 시간 / 우제용
5월은 꽃의 계절이다. 장미가 피고, 백합이 향기를 내고, 거리마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에게 5월은 아름다움만으로 기억되는 달이 아니다.
오래전 아내를 떠나보낸 달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5월이 오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사진첩을 들춰보기도 하고, 오래전에 써 두었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세월은 많은 것을 흐릿하게 만들지만, 어떤 기억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것 같다.
아내와 함께 웃었던 순간들, 서로를 걱정하던 평범한 일상들이 꽃향기처럼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나에게 글쓰기는 기억을 보관하는 일이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두는 일이며, 잊혀 가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노트북에 프린터를 연결하는 순간 작은 스파크가 튀더니 화면이 꺼져 버렸다.
함께 연결되어 있던 USB도 작동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곧 복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수리점에서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기계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 안에 저장되어 있던 글들이었다.
몇 달 동안 써 두었던 에세이와 강연 원고, 그리고 아직 다듬지 못한 기록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일부 자료는 백업되어 있었지만 최근에 작성한 글들은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것은 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까지 함께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을 썼는지, 어떤 제목을 붙였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며칠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이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무기력했다. 책을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글을 쓰려고 앉아도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말들이 어디론가 숨어 버린 듯했다. 잃어버린 것은 원고 몇 편이 아니라 내 마음의 한 부분인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사람은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원고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다. 그 안에는 그 시절의 생각과 감정, 고민과 기쁨이 담겨 있다.
그래서 글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종이 몇 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일부를 잃는 일과 비슷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비록 기록은 사라질 수 있어도 그 기록을 만들어 냈던 삶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원고는 없어질 수 있지만 그 글을 쓰게 했던 경험과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당장은 기억나지 않아도 언젠가는 다른 문장으로, 다른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번 일을 겪으며 나는 말과 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의 말은 마음의 그림자와도 같다. 따뜻한 마음은 따뜻한 말을 만들고, 너그러운 마음은 너그러운 말을 만든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그 시작은 마음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그가 무엇을 품고 살아가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파일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는지도 모른다.
사라진 원고를 붙잡고 아쉬워하는 동안 정작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5월의 꽃들은 해마다 다시 피어난다. 지고 나면 끝인 것 같지만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새로운 꽃을 피워 낸다.
사람의 생각과 말도 그렇지 않을까.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은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고, 멈춘 줄 알았던 문장은 다시 이어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빈 화면 앞에 앉는다.
잃어버린 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한 줄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