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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나의 인생 견문록(9)/ 정관일

작성자jungkwanil|작성시간22.06.27|조회수155 목록 댓글 0

대만, 한진해운 타이페이지점

 

  • 대한항공 암스텔담지점 근무를 마치고 본사 발령을 받아 귀국한 필자에게는 놀랄만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그룹내 해운회사로 발령이 난 것이다. 만년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한진해운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약 20여명으로 구성된 대한항공팀이 해운사로 이적된 것이었다.

  • 본인에게 사전 통보나 의사타진 같은 절차는 그 당시에는 모두 생략 되었지만 이에 대하여 항의를 하거나 따지려는 강심장은 없었다. KAL 스탭으로 미주에서 근무를 최우선 순위로 삼았던 필자는 몹시 서운했지만 그러나 회사를 박차고 나가, 버튼 전화기를 생산 한다던지 맥도날드 햄버거를 국내 최초로 팔아 돈을 벌어 보겠다는 꿈은 이미 접은지 오래여서 목구멍이 포도청인걸 어떡하나 하며 대세에 따랐다. 

  • 우리는 한진해운에 출근 하자마자 곧바로 본사조직및 해외 영업망을 대폭 개편하고 전직원이 회사가 더 이상의 적자를 감내 할 수 없다는 자각하에 열심히 노력했으며 한편 세계 해운시장도 호황으로 돌아 한진해운은 불과 1년 만에 흑자로 전환한다. 이에 대한항공으로부터 내려온 경영개선팀은 회장님으로부터 치하를 받고 상당히 우쭐한다.

  • 그리고는 또다시 회사조직을 정비한후 회사목표를 글로벌 5위 이내의 컨테이너선사로 세운다. 그 중 하나가 역시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 합병하여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세계적인 대형선사로 도약한다는 취지였다. 이 또한 약간의 잡음은 있었으나 역시 대 성공을 거둬 당시 현대그룹의 현대상선을 모든 면에서 저 멀리 따 돌린다.

  • 그룹간 조선업 경쟁에서 밀려 ( 현대중공업은 일취월장, 한진중공업은 지지부진 ) 사기가 떨어져 있던 회장님께서는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자신의 결단이 또 한번 맞아 떨어졌음을 재 확인하셨다.

  • 그 와중에 필자는 현안이었던 타이페이의 한진해운 지점과 대한선주 지점의 합병을 서두르기 위해 타이페이 지점으로 장기 파견을 나가게 된다.

  • 지금은 중국 영토의 일부로 유엔에서도 쫒겨나 국가로서의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만은 아시아의 네마리 용으로 또는 강소국 (強少国) 으로 불리며 아시아의 후진국들로부터 온갖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때이기도 했다.

  • 때는 바야흐로 일본의 대형 전자업체들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대만으로 생산기지를 옮길 때여서 해운 물량이 한국보다 더 많아 한진해운 타이페이 지점은 미국의 LA, 뉴욕과 함께 3대 거점 지점이었다.

  • 한진해운이 대한선주를 합병해서 세계 5대 컨테이너 선사로 거듭나려는 이 때 타이페이 지점은 이 두 지점의 합병을 막는 여러가지 장애요소들이 있었다. 외국선사 ( 특히 한국 선사 ) 의 약진을 막고자하는 해운정책 뿐만 아니라 두 지점의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합병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 직원들의 반대 이유는 합병에 따른 인원감축이 주 였으나 또한 두 지점의 급여차이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대한 급여가 높은 쪽의 불안감이 가세했다. 두 지점이 각각 80 여명의 직원이 있었으나 합병후의 통합 지점 인원은 120 여명으로 잡고 있었다. 따라서 40여명의 직원을 해고 해야하는 실정이었으니 직원들의 불안감은 이해할 수 있었다.

  • 직원들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되었기에 더욱 더 주의를 기해야하는 상황이었다. 

  • 장개석국제공항 ( 당시 타이페이공항 이름. 최근에는 그저 타이페이공항 또는 타오위안 桃園 공항으로 불리운다 ) 에 내리니 그 규모가 어마무시 했다. 지금은 우리의 인천공항이 규모나 시설 그리고 편의성 등등 에서  타이페이공항을 압도 하지만 당시는 김포공항 시절이었다.

  • 우리의 국립박물관에 해당하는 국립고궁박물원에는 본토에서 가져온 전시물 (보물) 들이 너무 많아 6개월에 한번씩 전시물을 바꾸는데 그래도 20년이 걸려야 모두 전시가 된다고 했다.

  • 이 보물들은 장개석 국민당정부가 공산당에게 밀려 대만으로 후퇴할 때 본토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를 수송하기 위해 대만과 면한 대륙의 해안에 수 백대의 차량에 실려 수송 대기중인 때에 모택동의 공산정권에 발각 되었다.

  • 당시 공군 참모가 모택동에게 이들을 모두 폭격하자고 건의하자 모택동은 이 보물들을 장개석이 가져가면 언젠가 우리것이 되지만 만일 폭격해 없애버리면 국보급 보물들이 영원히 없어지니 폭격중지를 명했다고 했다. 그 덕에 이 귀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보존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중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큰 나라여서 이 보다 더한 보물들이 북경에 있는 국립고궁박물원 (이름이 대만 것과 같다) 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필자는 죽기전에 꼭 북경에 가서 중국의 국보급 보물들을 대만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고 싶다.

  • 한번은 대만의 동중부의 화련 (花蓮) 에 정박해 있던 회장님 가족 요트 ( 당시 대한민국의 최고 부자인 이병철 회장도 요트를 가지지 못 하였슴 ) 가 파도에 떠내려가는 사고가 발생해 회장님께 너무 충성스러운 어느 본사의 중역은 필자에게 그 요트를 찾지못하변 사표를 각오하라는 협박까지 가해왔다. 그 분은 윗사람에게 너무 양손을 비벼 손금이 다 닳아버렸다고 소문이 난 분이었다.  회장님 요트가 지점장 목과 연결된 사고였으나 다행히 2일 뒤 그 요트가 인근 해상에 표류중인 것을 한 어부가 발견해 예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막을 내렸다.

  • 그런가 하면 고진감래 (苦盡甘來) 라고 그런일이 있은후 얼마 안있어 우리 회장님의 친구인 대만의 에버그린 선박회사 장연발회장 ( 두분 모두 일본의 선원 양성소 출신 ) 의 주선으로 회장님께서 대만 유수의 대학인 대만 문화학원에서 명예철학박사를 받게되는 경사 (?) 를 맞이하게 된다. 

  • 학위 수여식이 끝난후 기쁨에 넘친 회장님께서 필자에게도 수고 많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회장님의 말씀 한 마디에  필자는 잃었던 점수를 만회하게 된다. 이를 알게된 그 손금이 다 닳아빠진 중역이 다시 필자에게 전화를 한다. 수고 많았다고. 필자는 모두 에버그린의 장 회장님 덕이 었다고 말 해주었다. 사실이었다.

  • 대만 정부 항만청에 여러번 불려가고 해고된 직원들로부터 신변의 위협도 있었지만 일은  잘 풀려 나갔다. 항만청에서 한진해운 입장을 이해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화란/독일 항만청과 일본의 항만청이 자국에 있던 한진해운 지점과 대한선주 지점의 합병을 인정해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 그리고 해고된 직원들 문제도 당시 대만은 거의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던 때여서 쉽게 해결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실업률이 10프로 정도인데 반해 대만은 4프로 정도였다.  일이 잘 풀리고 보니 우리 속담이 떠올랐다.  “ 재수 좋은 과부는 엎어져도 오이밭에 엎어진다.”

  • 대만은 2차 대전후 일본의 통치가 끝나고 대륙에서 쫓겨온 장개석 정부군에 의해 다스려지는데 정부군이 점령군으로 변해 대만 본토인들을 일본 통치에 적극 협조한 집단으로 보고 심한 차별을 하였다. 각종 규제와 높은 인플레로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자 일부 대만인들은  일본 점령시기 보다 못 하다며 봉기를 일으킨다.

  • 바로 대만의 2/28 사태로, 이 사건으로 대만인 약 2만 8천명 가량이 대륙의 정부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기막힌 사태가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태와 거의 비슷한데 우리나라나 대만은 요즘에 들어서 위의 사건을 재조명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것도 같다.

  • 이 사태 이후로 장개석 정부의 대만인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사라지지만 더욱 더 교묘한 방법으로 자행된다. 한번은 한 시민이 대표팀 축구경기 생 중계 때 TV 중계 카메라가 자신 쪽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때를 맞춰 “ 장개석 하야" 라는 구호가 적힌 조그만 플래카드를 내비친 적이 있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요즘 이북식으로 표현하자면 “ 지도자 동무의 존엄 “ 을 해친, 일어나서는 안될일이 벌어진 것이다.

  • 그 후로는 아무리 TV 생중계라지만 실은 중계 현장과 방송국 송출 시점을 5분간 차이를 두어 그 5분 동안 화면 검색을 통해 정부비판이나, 특히 국부로 호칭되는 장개석총통의 이미지를 갉아먹는 어떤 행위도 방송되지 못하게 원천 차단했다고 한다. 우리도 박정희 정권때  이 기막힌 수법을  도입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진짜 도입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 장개석 시절의 대만과 우리나라는 표면적으로는 사이가 좋은듯 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때 화교들의 현금을 만 천하에 들어나게 한 화폐개혁과 소공동 일대를 현대화 한다는 명목으로 그 일대에 밀집한 화상들을 강제로 이전시킨 정부 정책의 백미는 자장면 값 허가제에서 그 극치를 달린다.

  • 이렇게 한국에서의 화교차별은 고스란히 대만의 우리교포들에게 전해진다. 필자의 대만 주재시절 대만교포들의 삶은 상당히 어려웠다. 대만 이전에 여러나라에서 필자가 근무하며 봐왔던 그런 교포들의 삶과 많이 대비 되었다. 한마디로 궁색 했다. 정부의 정책수립 이전에 다방면에 걸친 오랜 연구, 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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