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문이 열리다
- 다음날 빌딩 인스펙터를 만나 팀버랜드모텔 건물의 구조상 문제점은 없는지 조사를 의뢰하고 은행대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그곳의 티디은행 ( TD Bank ) 지점도 방문해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티디 은행은 팀버랜드모텔과 10년 이상 거래를 해와서 담당자는 우리가 필요로하는 금액을 대출해 주는데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해서 가장 큰 문제 하나도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나머지 자잘한 여러 문제들이 있었지만 C사장에게 일임하고 밴쿠버로 돌아온 우리는 우선 친지들에게 우리는 드라이덴으로 가서 그곳에서 모텔을 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이미 가계약을 하고 돌아왔음을 안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이 없는 곳에서 외로워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걱정 해 주었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은 달랐다.
- 한국인들이 우리까지 포함해서 3가구나 되고 현지의 좋은 이웃들을 사귄다면 여기서 매일 한인들만 만나 생활하는것 보다 오히려 현지화가 빨리 될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인교회가 없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꼭 한인교회만 복을 내려주실리도 없고 현지교회 목사님 설교를 알아 듣고 못 하고는 우리가 얼마나 노력 하느냐에 달린것이 아니겠는가?
- 밴쿠버는 단연 캐나다인들이 캐나다 내에서는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 1위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매년 5위권 이내에 드는 도시다. 필자가 다녀본 세계 40여개의 도시 중 단연 으뜸이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으며 강이 도시를 감싸고 흐른다. 4계절이 있으나 여름은 건조해서 그늘만 들어가면 시원하다. 겨울 또한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은 콘도 1층으로 에어컨도 없이 여름을 나고 겨울에는 난방을 해야하는 날이 10일 이내다. 다만 겨울이 우기로 자주 비가 내리며 일찍 어두워지니 음산한 느낌이 드는것은 사실이다. 물은 산에 내린 눈이 녹아 내리는 물이요 주변 공기는 너무 깨끗해 폐가 청결해 지는 느낌이 든다.
-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자연 환경이면 뭐하나? 주변에 공장다운 공장이 없고 임업, 수산업, 광업 그리고 관광에만 목을 매니 고용이 크게 늘어나지 않고 실업률이 높은것이 이민자를 힘들게 하는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밴쿠버와 같은 대 도시에서의 이민 생활만을 고집하는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민자들은 우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후 그곳에서 더 거주할 것인지 아니면 타지역으로 옯겨갈 것인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 이메일로 드라이덴의 변호사와, C사장과는 전화로 진전사항을 매일매일 체크하다 보니 어느덧 3월초에 이르렀다. 번즈 변호사로부터 제반 절차가 거의 마므리 단계에 들었으니 그곳으로 올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빌딩 인스펙터로부터는 팀버랜드 모텔 건물에 어뗜 구조적인 문제점은 없다고 연락이 오고 곧 청구서를 보내왔는데 자그만치 1,200불이나 되었다. 우리의 이삿짐은 한국에서 올 때 그 컨테이너 속에 그대로 들어 있는 상태로 컨테이너 터미날에서 대기 중 이었다.
- 팀버랜드 모텔 주인과 통화해서 3월 5일에 갈터이니 10일 정도 합동근무를 제의하고 모텔 방 하나를 우리를 위해 배정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텔방이 아닌 주인용 살림집 ( 모텔과 붙어 있으며 부억이 딸린 커다란 거실 + 방 3 ) 을 비워 주겠다고 했다. 자기네는 이미 시내 안쪽 호수가에 살 집을 마련 하였다고 했다. 인계인수는 아침 9시에 자기네가 모텔로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며 진행하겠다고 하는데 밤낮으로 그들에게 묻고 짧은 기간내 그들을 100프로 이용하겠다는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생각해보니 그게 서로 여러가지로 편리한 점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03년 3월 5일 우리는 그렇게 살기좋다는 밴쿠버를 떠나 3번째 드라이덴 여행길을 떠난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언제 다시 밴쿠버로 돌아올지를 기약할 수 없었다. 밤 늦은 시각에 도착했으니 그 날은 주인부부와 인사만 하고 우리는 잠을 청했다.
- 그 날 밤은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더구나 이곳에 오기 위한 준비로 무리를 했는지 지병인 잇몸이 붓기 시작하는 느낌이 왔다. 내일부터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이 무슨 추태냐 하는 생각이 드니 잠을 들 수가 없었다.
- 예상대로 이튿날 일어나 보니 잇몸이 아프고 그 부분의 얼굴이 상당히 부어 올라 보기 흉할 정도 였다. 아침에 나를 만난 주인여자는 우선 치과부터 가야 한다고 했다. 치과에서 응급치료와 진통제를 처방받고 제일 먼저 번즈 변호사를 만나 새로 등록한 회사 이름을 부여 받았다.
- Timberland Motel Inc. 이 회사명으로 구좌를 트고 대출 상담을 하러 티디은행 ( TD Bank ) 로 갔는데 담당자가 상당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금액을 모두 대출을 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그사이 본사 방침이 바뀌어 신용이 없는 ( 우리는 그들과 거래를 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신용이 있을리 없었다 ) 기업주에게는 모텔 구입비용의 50프로 대출을 금지 했다고 한다.
- 그러면서 건너편에 있는 몬트리올 은행 ( Montreal Bank ) 에서는 그게 가능할지 모른다는 투로 이야기 해주었다. 그런 사정을 진작 알으켜 주어야하지 않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꾹 참고 그곳에서 나와 모텔로 향했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몬트리올 은행으로 가지않고 모텔로 간 것은 상담 약속을 하기 위함이었다. 모텔로 돌아온 우리를 보고 레나 ( 모텔 여주인 ) 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정 이야기를 하자 레나가 몬트리올 은행으로 전화를 걸어 그곳 지점장에게 자초지종을 길게 설명하고 마감시간 전에 약속을 받아 줬다.
- 몬트리올 은행 역시 최근에 티디 은행과 똑같은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러나 방법은 있으니 염려말라고 한다. 자기네한테 최대한 대출받고 모자라는 부분은 BDC ( Business Development Bank of Canada: 캐나다기업지원은행 ) 에서 충당하면 되는데 그건 자기네가 주선 해 줄테니 나는 그저 사인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자율이 자기네 보다 조금 높은데 대출금 자체가 얼마 안 될테니 큰 문제없을것 이라고한다. 이제야 안심을 한 나는 마고 ( Margot. 대출담당자. 프랑스계 ) 당신만 믿는다고 하며 은행을 나섰다. 벌써 밖은 어두워졌다. 길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은행이 이렇게 달랐다.
- 모텔로 돌아온 나는 레나에게 또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레나는 그렇다면 구태여 BDC까지 갈 필요없이 모자라는 금액을 몬트리올 은행과 같은 이율로 자기네가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애를 쓴 돈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 다음날 레나와 함께 몬트리올 은행으로 가서 그곳에 구좌를 트고 대출을 받고, 나와 레나는 우리의 변호사 번즈 앞에서 별도의 개인 간 부채 상환계획서에 사인했다.그리고는 바로 옆에 있는 회계사 사무실을 방문해 내가 정식으로 팀버랜드모텔을 인수하였음을 알린다. 그는 웃으며 번즈변호사로부터 이미 연락을 받아 알고있다고 했다. 얼굴은 여전히 퉁퉁 부어올라 손수건으로 그 부분을 가리며 이야기를했다. 마이크(Mike) 회계사는 자기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는데 뭘 그러냐면서 자기도 어렸을 때 치통을 앓아 그 고통을 이해한다고도 했다. 이렇게 드라이덴에서의 첫 날과 둘쨋날은 치통과 싸우며 동시에 자금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마이크회계사는 후에 팀버랜드모텔이 연방 세무조사를 받을 때 자기네 사무실을 수검장으로 제공하는 등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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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ngelcrack 작성시간 22.09.20 한국에선 회사 신분증만 보여도 대출을 받았지요.
같은 건물에 있는 은행에 얘기하니 여유운영 자금까지 대출해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역시 선진국 답다고 록키로 여행을 다녀 왔죠. 인수하는 날 갔더니 캐나다에서 아무런 신용점수가 없어 안 된다고...그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파는 쪽에서 일단 인수하고 일주일내 갚으라고...
초, 고딩 두 딸에게 맡기고, 먼저 이민 온 방송국 입사동기, 중고 동창들 찾아 다니며 별일을 다...
긴장, 노심초사해서 입안이 바싹 바싹 탄다고 하죠. 생리학적으로 입안에 침이 마르면 치통과 이비인후과에 문제가 된 답니다.
마라톤 클럽할때, 치통이 시작하고 병원 잘못 가서 다 갉아 놓은 줄만 알았는데, 거기에 신경과민이 모든 이빨들을...
다음 편이 기다려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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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ungkwani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9.20 - 이민 초기에는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가슴을 조리게 했습니다.
- 저도 신경과민 때문이었던지 원래 나빴던 잇몸이 모텔을 운영하면서 더욱 악화되어 이를 하나씩 뽑다보니 이젠 틀니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 -
작성자김경난 작성시간 22.09.22 정선생님 정말 애쓰셨습니다
그런데 정선생님의 긍정적인 인생태도는 참으로 낙관적이며 진취적인 면이 참 좋다고 봅니다 세상에 어떤일이 쉽겠습니까?
종종 아주 힘들때 치통이 생기는 경우가 많죠 스트레스와 많이 관련이 있다고 치과의도 말하죠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마음땜에 오늘의 건강을 유지하시나 봅니다
담 얘기 기대함니다 -
답댓글 작성자jungkwani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9.22 - 회사 다닐때 늘 후배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어떤 일을 추진 할 때 성공과 실패를 할 확률이 각각 50대 50이면 그 일을 추진 한다고 이야기를 해 주곤 했지요. 그러나 제가 막상 전 재산을 털어넣고 그것도 모자라 은행융자까지 받아야하는 상황에서 걱정도 되었지만 당시는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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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경난 작성시간 22.09.22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넉히 이겨내는 투지력이 있으셨기에 오늘날 회고력을 쓰실정도이시고 남은 인생도 더 의미있게 사실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