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蘭 이야기
春蘭/김문억
전라도 산골에서
새벽차로 올라온 촌년
종각 지하도에서 손님 기다리다가
나랑 눈 마주치고 싼 값에 따라온 너
푼돈 몇 닢 주고 데려왔지만
양반 집 규수보다 때갈 좋고 수수한 애
천연덕스러운 지지배
아무렇게나 흙 묻은 바람자락 걸쳐도
세수도 안 한 얼굴 이슬처럼 맑고나
이쁘다
고개를 들라 아가야
총명하고 날랜 모습 수줍음이 더하여
칼같이 곧은 눈매에 물이 촉촉 맺혔도다
오뉴월 땡볕에 눈이 오는
절개는 너무 높아 숨이 차더냐
춤사위 소매끝동에 고개 사뿐 숙인 너
입 한 번 떼어 보거라
너는 대체 누군고
춘란春蘭1/김문억
-처녀가 애를 낳다.
종각 지하도에서 나랑 눈 마주치고 헐값에 따라 온
지난번에 얘기했던 전라도 촌 지지배가
오늘 아침 우리 집에서 애기 하나 낳았다
오롯이 눈을 뜨고 젖니 하나 돋았다
두고 온 고향을 못 잊어하여
바람 냄새라도 맡아보라고 가끔
창가에 내놓은 것뿐인데
혹여 빛과 바람이 와서 간음을 하고 간 것인가
난 그 지지배가 하도나 이뻐서 가끔
목욕을 시켜 책상에 올려놓고
가슴이 마구 뛰도록 짝사랑을 해온 것뿐인데
오메-
이 지지배 보게 난 정말 눈빛만 준 것뿐인데
어쩌자고 내 앞에 새끼를 내 놓는고
술이나 마시고 세월이나 희롱하는 나를
꼼짝 없이 끓어 앉히고
동정녀로 내 앞에 오셨네요
춘란春蘭2/김문억
-미학美學
아름답다
네가 홀로 청상靑孀일 때에
풀 살 센 조각 달 하나 떨어져 나간 하늘 가로
백로白鷺 한 마리 홀로 날아간다
일몰을 때맞춰 물고 있던 먹이도 놓고
속뼈까지 환하게 보이는 가장 가벼운 새여
눈물까지 하얗게 표백된
슬퍼서 아름다운 새여
아무하고도 눈길 닿지 않는 너를
뭇 사람들이 올려다본다
세월을 시늉하여 물결치는 소매 끝동에
어스름을 끌고 범종 소리가 내려앉는 지금
내가 난을 키운다고 하니 망나니가 갓 쓴 격으로 어울리지 않는 얘기지만
영풍문고 앞 지하도에서 난을 팔고 있던 영감님 빨리 집으로 가시라고 몇 뿌리를 사서 이웃에 나눠주고 남은 것을 데리고 있다. 이런 글을 쓰고 보니 저 이쁜 아가씨가 백태 낀 내 눈을 씻어준 격이다.
김문억 시집<지독한 시2008파루>중에서
春蘭이 꽃 피우다/김문억
꽃가마 타고 오셨네
고개들지 못 하네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족두리 눌러 쓰고
옷고름 풀어줄 낭군
기다리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