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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 터는 여인

작성자고쿠락|작성시간23.05.05|조회수23 목록 댓글 0
깨 터는 여인/김문억




淸學亭은 천보산 골짜기 입구에 있는 작은 정자다
저 아래로 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있다
김과장네 밭 더미는 산자락을 까 내리고 만든 경사진 작은 밭으로 올해는 주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참깨 모종을 내서 수확을 보고 나머지 몇 두렁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아침에 해가 들면 산등성이를 등지고 지나가는 곳이라서 종일 선선하면서 어둡고
저녁나절이 되면 잠시 해가 들다가 차양 같은 산 그림자가 드리우는 음전한 곳이다.
김과장과 나는 이런 지리적 조건을 탐하여 이곳에 정자 짓기를 했던 것이다.
아까부터 청학정에 혼자 앉아 무료하게 막걸리 잔을 비우고 있는데 탁! 탁! 탁! 탁!
저 만큼 깨밭에서 들려오는 깨 터는 소리가 고요를 흔들고 온다.
석양이 설핏 기울고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늦은 오후다
청학정은 본디 이 동네 아이들이 무더운 여름에도 더위를 피해서 논술공부를 잘 하라고 김과장이 거금을 들여서 손수 만든 정자다.
어쩌면 그건 핑계였는지 모른다. 관계에서 퇴직하면서 시를 쓰는 나랑 같이 이 곳에서 풍류로 여가를 즐기고자 하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처음 얼마동안은 문학을 놓고 담론도 하면서 아이들 훈장 노릇도 했지만 건축업에 다시 뛰어든 김과장은 청학정에 올라오는 일이 뜸 했다.
오늘은 아이들이 현장학습으로 멀리 소풍 길을 나선 날이어서 나 혼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시를 쓴다는 일이 꼭 이런 정자 같은 분위기에서만 쓰는 일이 아니다. 시 쓰기는 길을 가다다도 쓰고 잠에 들다가도 쓰고 악다구니 시비를 하고나서도 쓴다.
몇 잔의 자작 술을 비우는 중에 다시 탁! 탁! 탁! 탁! 아까부터 희자엄마가 두드리는 깨 터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온다.
나는 평소에 논술공부를 하러 오는 희자 이름을 빌려 그렇게 부르고 있다.
김과장은 같이 역사문학기행을 다니면서 알게 된 사이니까 내가 이 동네를 다닌지가 하마 십년도 더 된다.
밭고랑 한 편에 고추도 심고 채소도 심어서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로 같이 키우기도 한다.
깻단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숲에서는 구구구 구구구 비둘기가 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멀지않은 곳에서 희자 엄마가 동그마니 앉아 막대로 깻단을 두드리고 있다.
개울 건너편에 있는 작은 논에서는 가을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만추의 계절이다.
몸 배 같은 검정색 바지에 하얀 티셔츠 바람으로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동그마니 앉아 단말마적 리듬으로 계속 깻단을 두드린다.
아까부터 고요한 산중에 들려오는 그 소리가 뭉클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서정이 담뿍 배어든 모습이다.
마치 리듬이라도 맞추듯이 숲에서 우는 비둘기 소리가 가끔 추임새를 넣고 있다.
막걸리 한 모금을 더 삼키고 그 서경으로 눈이 간다. 옆으로 보이는 여인네의 모습이 호롱불 앞에 앉아있는 황진이 보다 더 잔잔한 음영이다. 막걸리를 마실수록 목구멍이 점점 매 말라 간다.
깻단을 집어 들기 위해서 팔을 올릴 때는 허리춤이 드러나면서 속옷이 냉큼 보이기도 한다.
저것은 더 없는 자연 앞에서 전개되는 한 컷 드라마요 고전이다.
화면이 바뀌지 않고 정지된 상태에서 들려오는 깨 터는 소리로 마른 목구멍에 꼴깍 침을 삼킨다.
마침내 정신이 아련해지면서 나는 힘을 못 쓰고 무너진다.


고요한 저녁풍경 속으로 허름한 한 사내가 천천히 등장한다.
깻단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일까 여인은 사내의 발소리를 듣지 못 한다.
다가 선 사내가 여인의 뒤로 꿇어앉으면서 가느다란 허리를 살포시 감싸 안는다.
여인이 흠칫 놀라서 돌아본다. 아는 얼굴이다.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떤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소리를 친다거나 반사적 행동을 보이기 전에 이미 여인은 깨밭으로 아낌없이 무어지고 만다.
마치 고요한 산중에서 수리 한 마리에게 잡아먹히는 산비둘기 같이 사내의 품 안에서 꼼짝없이 퍼덕거리는 꼴이었다.
자갈밭에 여인을 그냥 눕혀도 좋으련만 달빛이 하도나 밝아서 물레방앗간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 허 생원보다 더 성급하고 격정적이다.
아직 털지 못하고 세워 둔 깻단이 가림 막이 되어 참깨가 가마니로 차오르도록 깨 방아를 찧는다.
지는 해의 열기가 더 해서 산자락이 훈훈하다. 고소한 참깨 냄새와 차거운 느낌의 흙내음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살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진동한다.
날개를 버둥거리다가 이미 숨이 끊어진 비둘기는 조용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몸을 공양하고 있다.
크게 저항하지 못 하고 말간 눈빛으로 올려다보던 희자엄마를 내려다보다가 비로소 꿈을 깨고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 온 나는 나에게 퍼뜩 놀라고 만다.


저 만큼 앉아서 깨를 터는 여인네는 지금껏 고요한데 나 혼자서만 홍역을 치른 것인가. 집요하게 끈적거리는 감정은 무서운 태산으로 덮쳐왔다
서둘러서 책가방을 챙겨 청학정을 부지런히 내려간다. 탁! 탁! 탁! 탁! 등 뒤에서 들려오는 깨 터는 소리를 두고 가는 발걸음이 조금 불규칙하다.
그러고서 또 십년이 훨씬 더 되도록 그 청학정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가끔 생각 날 때 마다 궁금증마저 잊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고서 또 세월이 가고 김과장으로부터 청첩장 한 장이 날아 왔다.
나에게 논술공부를 하던 희자가 시집을 간다는 소식이었다.
예식장에 가서 그 여인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동안
‘왜 그렇게 무심하도록 한 번도 안 오시나요?’
까닭도 없이 발길을 끊은 내가 궁금했던 것이가
‘이 다음에 말 할 게요!’
대꾸 할 말이 궁색하여 패시시 웃음으로 속맘을 지우면서 희자엄마를 바라본다.
한 알의 깨알이라도 밖으로 떨어지면 그 동안 숨겨왔던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말과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쓴다.
희자엄마도 한복으로 신부엄마 치장을 곱게 했지만 그 날 청학정에서 만난 토속적인 모습은 아니었고 그 여인도 중년 이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고서 또 몇 년의 세월이 그냥 갔지만 아직 더 와야 할 청첩장은 오지 않았고
가끔 스스로 자문 해 본다. 나에게도 이렇게 진한 감성을 제압 할 만큼 냉냉한 이성이 있었던 것 인가! 살아오는 동안 잘 한 일 중에 한 편인 것 같다고 스스로 채점 해 본다.
만추의 풍경이 준 한순간의 감정으로 한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말았지만 1부1처 제도로 묶어놓은 사람의 사회적 제도 속에서 본분을 다 한다는 일은 나 같이 착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생각을 넓혀 보면 지우개 하나쯤은 갖고 사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고 누구나 다 착하다.
-2023. 4. 2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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