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시원한 강 바람 불어오는 선창가 봄을 맞이하는 상춘객으로 들끓는다. 어느새 겨울옷 벗고 밝고 상쾌한 차림인 그들의 소곤거림과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고 있다. 난 아직도 거무튀튀한 겨울의 칙칙함을 몸에 칭칭 감고 있다. 그러나 햇살은 영락없이 봄을 쏟아내며 현란한 빛을 자랑한다. 냄새와 실바람은 감미로운 아이스크림같이 영혼에 스며든다. 강둑에 넘치는 자연의 유희는 찰랑이고 아득한 산자락은 산봉우리 꼭대기 흰 눈을 마지막까지 고집한 채 열정으로 거머쥐고 있다. 똑같은 푸른 하늘이건만 다정함은 다른 것이어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애써 애꿎은 냉이, 달래, 쑥 내음 기억을 찾아 킁킁댄다. 꽃비 흠뻑 맞은 나무 의자는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동물적 감각으로 뒤적이던 강둑에서 고향을 건져 올려 보지만 태평양 간격만큼 아득하기만 하다. 이대로 그리움 숙명처럼 보듬어 안고 내내 살아가겠지.
깃발을 들고 무언가를 선동하던 한 시대 속의 무리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도도한 강물에 떠내려가 묘지의 한편이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문명은 계속 편을 가른다. 정치가 이념이 경제가 그리고 문화까지도. 어디서나 예외 없이 너와 나를 구분하며 대중을 선동하여 좁은 울타리 안에 줄을 세운다. 무디어진 감각과 이성의 마지막 노구를 만족하게 해 줄 대상을 찾아본다. 하지만 모국이란 어미의 품에서 떨어져 생경한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속한 곳 없이 떠도는 유목민은 어디에서도 끼어들지 못한 채 훈수 들지 못한 채 삶 속에서 삐걱 인다. 일 년이면 반이 차가운 비에 장기까지 파고드는 냉한 기운은 타향살이에 뼈마디 깊은 외로움과 을씨년이 탑을 쌓아 올린다. 차가운 겨울 강줄기는 죽음을 연상시키며 희뿌연 자태로 흐른다. 사나운 태풍이 뿌연 강 위로 부유물을 퍼 날랐다. 강물은 차갑고 시리다.
그러나 계절은 바뀌고 이내 봄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 개구리 잡으려 검정 고무신 벗어 들고 맨발로 디뎌보던 감각일까? 고무신에 담아 올린 송사리를 바라보며 어린 벗들과 우정을 쌓으며 까르르 터뜨린 웃음 속 인물들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다. 그래도 머리 위를 비추는 가녀린 오늘의 햇살은 다정하다. 화분에 심어 놓은 선인장이 어느새 쑥쑥 자라 밀도 높은 좁은 집이 되었다. 세상은 넓은데 공간에 가두어 둠이 미안하고 서로 몸을 비비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하여 분 갈이를 해 주었다. 널찍하게 자리 잡은 모습에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비좁은 나의 마음속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겸손으로 위장한 자기 사랑이 숨어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뼛속 깊이 흐르는 천성을 숨길 수 없나 보다. 자식이 묻는다. “인생은 무엇인가요?” “더 높은 곳에 오르렴” 나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며 선으로 위장한 감춰진 욕망이 머리를 쳐든다. 차마 내가 이루지 못한 꿈과 야망을 다음 세대에 은근히 전가하고 있다. 숨을 고르며 느린 걸음 걸어보라고 들려주어야 할 지혜는 머릿속에 지식으로만 남아있다. 숲속을 기억해 본다. 그곳에서 주님이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가르치신다. 어지럽고 힘부친 왜소한 삶에 오늘도 주님의 따스한 음성은 속삭임이다. 용기를 내어보라고. 삶을 인내하며 살아 보라고 그리고 감사를 잊지 말라고. 그래서 다시 삶을 향한 봇짐을 꾸린다.
박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