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글 방

김남조 시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작성자고쿠락|작성시간23.10.12|조회수53 목록 댓글 0
김남조 시인께서 소천 하셨다는 뉴스를 듣고 명복을 빕니다 
전에 써 놓았던 '충만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소개 해 봅니다 


김남조 시집 『충만한 사랑』을 소개합니다/김문억
 
 
오늘 내 친구 김시인으로부터 ‘충만한 사랑’ 이라는 김남조 시집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이고 보니 미처 못 읽은 분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부터 천천히 ‘충만한 사랑’을 필사 해 나가 보겠습니다. 시조문학을 평생 해 오던 나로서는 자유 시집을 읽을 기회가 너무 없었으며 김남조 시집도 처음 대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 글은 평론이 아닙니다. 그냥 읽으면서 느낀 감상을 내 말 습관으로 엮는 얘기입니다. 앞부분 세 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쉽고 깊이 있고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문장 앞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의 독자들이랑 같이 읽고 싶습니다. 필사를 시작합니다.
 
충만한 사랑/김남조
 
책머리에
 
사람은 저마다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상념의 강물은 말과 글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것은 매우 특별하고 진지하며 또한 심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이 책을 읽어 줌으로써 자기 안에 잠자던 진실을 깨워내고 인간성숙의 몇 걸음을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현실은 평화와 위안이 격심한 궁핍에 처해있으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긍정적인 면은, 우리가 태어날 때 인류문화의 거대유산을 상속받았고 이것은 이후에도 절대풍요이자 인간의 영원한 대지大地이며, 따라서 지금과 후세대까지 사랑은 충만하리라 믿어집니다.
나는 만년의 으스름 저문 날을 살면서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는 바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삶의 본질, 그 의미심장함과 이에 응답하는 사람의 감개무량함, 살아가면서 더디게 성숙되어 가는 경건한 인생관, 이 모두 오묘한 축복이며 오늘 우리의 감사이자 염원입니다.
『충만한 사랑』의 글들을 쓰면서 이러한 생각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다면 이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습니다.
 
김남조
 
이 책은 2017년 가을 열화당에서 나온 책입니다. 작가는 1927년생으로 연세 94세니까 내가 군말을 더 보태지 않아도 감동은 같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이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다 하셨습니다.
 
 
 
구원/김남조
 
 
사람에겐
그의 반쪽이 어디엔가 있다 한다
눈이 안 보이거나
음성이 찾아든 이도
서로를 알아보며
이름 부를 수 있다 한다
정신이 흔미하면
영혼으로 알아낸다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외친다
주님 외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응답하신다
내가 너의 그 사람이다
와서 안기거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확신을 갖는 기독교적 신앙 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작가의 신념이 확고하다. 물론 누구나 한 번쯤은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서 왔는가 죽음은 왜 생겼나 하는 생명에 대한 의문과 질문도 하게 된다. 답을 얻지는 못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김남조는 확고한 답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반쪽으로 살아가야 하는 미완성의 나를 완성하기 까지는 또 하나의 나를 지으심으로 계신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나를 지으시고 우주를 지으신 하늘에 계신 분을 만남으로 해서 비로소 나는 완성되는 것이고 그것이 영혼과의 만남이다.
주님 외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적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적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하늘에 대고 그렇게 외치니까 주임이 응답 하신다.
내가 너의 그 사람이다 와서 안기거라
안겨서 비로소 하나의 사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반쪽짜리 미완성의 내가 살아간다는 일은 반쪽 남은 나를 향해서 살아가는 신앙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도 사람의 모양으로 만드셨으며 이는 일체의 완성품이다. 내 이웃이 곧 하나님이요 예수다. 그만치 위대한 사람과 사람이다.
시집 첫 작품으로 올린 까닭이 확고하다. 이 시집은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전제로 시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순교
 
 
예수님께서
순교현장의 순교자들을 보시다가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를 모른다고 해라
고통을 못 참겠다고 해라
살고 싶다고 해라
 
나의 고통이 부족했다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고 전해라
 
예수를 부정하지 못하고 박해를 받아들이는 순교의 시가 숭고하고 경견하다. 예수께서 순교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예수를 부정하지 못 하고 박해를 받는 고통을 보면서 차라리 살고 싶다고 해라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다. 그 인간적인 부분의 첫 단락 이면에는 예수의 지극한 사랑이 숨어 있다. 오히려 나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이 부족하여 네가 지금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내 고통과 사랑이 부족하여 네가 큰 고통을 격는다는 말씀이요 사랑이다. 이는 몇 번씩이고 반복해서 내가 죽음으로 대죄하면 너희를 살리겠다는 말씀이다.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는 사랑이다.
 
 
승천. 2
 
 
어둠에 포개진
그림자이거나
얕게 누워 오는 물결처럼
포수는
인기척 없이 다가가서
사슴의 심장에
산탄 쇳조각들을 소아 넣었다
총상을 입은
처녀인 사슴은
복된 자의 최후처럼
유순하게 승천했다
 
숨지기 전에
사슴은
사냥꾼의 눈을 보았고
용서를 구하는
그 마음을 읽었다
사슴은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죽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의 작품이다.
죄를 지어야 하는 인간 앞에 순하고 착한 순정의 처녀사슴이라고 하는 순한 동물을 설정하고 악과 선의 대척을 설정했다
내 몸의 연명을 위해서 수없이 살생이라고 하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 포수는 바로 우리들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선악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하는 동시에 사슴은 예수요 포수는 예수 앞에 대속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다. 구하라 구하면 얻으리라 했다.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포수의 눈빛을 보며 사슴은 포수를 용서하고 죽었다. 용서하지 못 했다면 승천하지 못 했으리라.용서는 용기이면서 사랑이다.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라고 하는 것이 있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용서는 실종되고 단죄만 시퍼렇게 살아있다. 진실과 정의라는 날 끝에서 용서와 화해는 힘이 없어 균형을 이루지 못 하고 있다. 오직 너와 나 여와 야 진보와 보수 갑과을 같은 이원분리 속에서 팽창하는 인간이 상실되고 있다. 용서는 말씀의 지시사항이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갈 수 없어 천국으로 승천하지 못 한다. 그것은 곧 처녀 사슴과 같은 착한 마음이어야 한다.
 
잠깐,
시조 한 수 읽어 보고 갑시다.
 
 
환한 달빛에 놀란 숫 사슴 한 마리가
제 그림자 따라 골짜기로 내려오다가
샘물에 빠져서 울고 있는 달을 물어 올린다.
-김문억의 ‘키스’ 전문-
 

아버지의 초상
 
 
겨울은 아버지의 계절이다
말을 줄이고 일만 하는 아버지
혹한 추운 날엔
휴우 휴우 휘파람을 분다
 
숲에 논밭에
사냥터와 낚시터에도
아버지가 있다
인류사의 첫날부터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
일하고 일하여
가족들의
먹고 마심을 채워 준다
 
자연보다
더 큰 분이 없고
자연을 눈 아래 두어도 안 된다
이 진리를 아는
아버지의 겸손은
가려진 묵시默示를 읽고
먼 우레의 구령을 들으면서
언제나 일한다
 
겨울 낮달의
어스름 희미한 달무리
웅얼웅얼 울리는
광야의 기도소리에
아버지는 눈시울을 적신다
온 세상은
아버지의 학교이고
아버지는
평생 동안 배우는 학생이다
강하고 외로운 아버지
시인이자 철학이며
무한 사랑인 우리의 아버지들을
오늘의 세상에선
문안이 아닌
문밖에 세워 두고 있다.
 
오늘의 아버지가 춥다
현실적으로 아버지가 고독하고 소외당하고 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있는 아버지도 늦은 시간에 붕어빵 봉지를 들고 퇴근하는 근로자 아버지도 춥고 고독하다.
아버지는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다윗의 자손들이다. 언제나 가족을 책임지고 노동을 해야 한다. 부지런히 이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했다.
 
어두운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이슬 맺힐 때에 속히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소명과 충성의 찬송가사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계절은 겨울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류사의 첫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지으시는 아버지의 노동은 외로운 중에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낳고 ...낳고 ... 다윗을 낳고 ...낳고 예수를 낳고 예수가 죽어서 또 단군 할아버지를 낳고 단군이 고조선을 낳고 고조선이 고구려를 낳고 고구려가 또 고려를 낳고 고려가 조선을 낳고 우리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나를 낳고 내가 또 아버지가 되고 그렇게 무궁하게 이어진 아버지의 끈은 쉼 없이 이루어진 신성의 노동이었다. 해서, 온 세상은 아버지의 학교였고 아버지는 평생 배우며 철학하는 학생이었다. 그 가르침으로 가끔 하늘에서는 천둥 우렛소리가 우릉우릉 거렸다. 하느님 아버지가 세상을 지으시고 경영한 것 같이 아버지는 가정을 만드시고 가족을 이끌어 가는 우두머리 대장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훌륭한 오늘의 아버지들은 문안이 아닌 문밖에 세워두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다.
엄동설한에 꽃을 찾아서 가출을 하고 집으로는 가끔 출퇴근을 하며 외진 구석에서 오돌오돌 땅콩 안주로 깡소주를 까다가 다 식은 그믐달 베고 밖에서만 잔다. 오호! 통재라! 아버지는 다시 위대하여야 하고 대접 받아야 하는 까닭이 있다. 아버지를 푸대접하는 일은 하느님을 푸대접 하는 것과 이치가 같다.
 
 
망부석/김남조
 
해 저문 어스름의
강 저편에
사람 하나 어둑어둑 보인다
쌓이는 나달이
책장처럼 부풀어도
그사람 한자리에 보인다
옛날의 호롱불
그쯤으로 희미해도
그 사람 보인다
사람 같은 돌 하나
돌 같은 사람 하나
어둑어둑 보인다
세월 더욱 오고가도
그 사람 저기 있다
어둑어둑 보인다
 
망부석은 어디까지나 전설적인 이야기로 그리움과 순애보의 극치다. 절개 굳은 아내가 집을 떠난 남편을 산마루 고개에서 기다리다가 죽어 돌이 되었다는 미망인의 한스러운 얘기다. 이 시가 어려울 것도 없지만 의미로 본다면 쉬운 시는 아니다 문장을 있는 그대로 조금 더 풀어 본다면 이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
 
해 저문 어스름의
강 저편에
사람 하나 어둑어둑 보인다
 
강이라고 하는 세월을 상징하는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살아 멀쩡한 사람의 힘으로는 쉽게 건너갈 수가 없는 경계가 강이다. 그도 대낮이 아니고 해 저문 어스름의 늦은 강이다. 세월이 참 많이 갔지만 그 강 건너에 사람 하나 어둑어둑 보인다고 했다. 이승과 저승 사이다. 김남조가 기다리는 그리움의 대상은 살아 집을 나간 부군을 기다리는 심사와 같다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금방 여보 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심정이다.
 
쌓이는 나달이
책장처럼 부풀어도
그사람 한자리에 보인다
옛날의 호롱불
그쯤으로 희미해도
그 사람 보인다
 
지나가는 날과 달이 책장처럼 부풀어 올라가도 그 사람 망부석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매양 눈높이의 한 자리에 서 있다. 이것은 변치 않는 사랑의 약속이다. 세월이 거듭해서 자꾸 지나가면 옛날 호롱불 같이 희미할망정 그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사람 같은 돌 하나
돌 같은 사람 하나
어둑어둑 보인다
세월 더욱 오고가도
그 사람 저기 있다
어둑어둑 보인다
 
금방 환생해서 나에게로 달려올 것 같은 사람 같은 돌 하나 변치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맞이하는 돌 같은 사람 하나가 보이지만 불안하다. 왜냐하면 어둑어둑 보이기 때문이다. 혹여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정신이 혼미하여 갖고 있던 이 그리움마저 사그러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다.
望夫石의 원 뜻은 부군을 기다리는 아내겠지만 여기서는 그 문자를 초월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이라고 하는 극단적 경계인 강물을 사이에 두고 그리워하는 망부석은 먼저 가신 분의 형상일 수도 있고 언젠가는 가서 이승에서처럼 합일 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일수도 있다. 나는 차마 따라서 가지 못하고 살아 그리워 하고 있지만 그만큼 살아있는 이의 그리움은 뼈에 사무치고 있어 서서히 망부석으로 진화되고 있음이라.
 
추신 : 김남조의 얼굴 표정을 살펴 보면 애원하며 기다리는 그리움의 상징처럼 굳어 있다.
 
 
눈물
 
 
너에게 눈물을 주마
흡족한 수량으로 주리니
넉넉히 물 쓰거라
눈물이 그리도 많은가고
너 묻는 것이냐
 
백만초목의 영롱한
이슬 눈물
땅속에 연실 푸는
지하수 눈물
눈과 비 그 습습한 우수의
하늘 눈물
내 눈물은 미세한
그 한 방울일지라도
다른 눈물은 더 없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 먼 사람아
 
김남조의 눈물은 별나다. 작품도 별나지만 실제로 김시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항상 그득하게 고여 있다. 그립고 기다리는 눈 탓일까 그의 눈은 항상 우수에 젖어 있고 찰랑거리는 눈물이 고여 있다. 겉보기로는 눈물이 대단히 많은 사람 같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눈물이 대단히 많은 사람, 하지만 밖으로 보이는 눈물은 단 한 방울이면 족한 사람일 거다. 지성의 눈물이 소낙비처럼 그리 흔하고 헤프게 많은 눈물은 아닐 것이다. 밖으로 많이 흘리는 눈물 보다 속으로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이 더 슬플 수도 있다. 오래전부터 김남조 시인의 눈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마침 눈물시를 감상하는 기회가 되었다
시인은 항상 눈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을 자주 한다. 그런 시인이 가끔 눈에 보인다. 더불어 눈물이 많은 시인은 속눈썹이 길고 검다. 눈물이 없는 눈은 눈동자가 부지런하고 건조하여 반짝거리며 속눈썹이 짧죽짧죽하다.
눈물이 고여 오는 진원지는 가슴 저 아래 깊은 곳이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고리가 있듯이 눈물의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즉 욕심을 버리고 가슴에 늘 진한 사랑을 담고 살아가는 시인이다. 시인의 눈동자는 응시하고 머무를 뿐 자주 돌아가지 않는다. 시인의 눈은 미세하고 하찮은 것으로도 남다르게 감동하고 출렁인다. 고여 있는 눈물은 말씀이다. 그 눈물을 찍어서 문장으로 이루어질 때 따듯한 시가 생산된다.
 
사랑을 모르면서 마음 편했던 잠을 깨고
사랑하는 괴로움이 더욱 기쁨임을 알고부터
맨발로 당신 앞에 무릎 꿇어 내 자유를 구속할 때
-김문억의 눈물 중에서-
 
미진이던 강진이던 가슴을 흔들어대는 지진이 일어나면 눈물이 고여 올라 눈이 축축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 보아도 그 샘은 진하고 깊다.
눈물에는 가식이 없다. 참물이다. 욕심 없이 샘을 비웠을 때 맑은 물이 고여 오는 이치다. 천만구비 핏줄을 다 돌고돌아 맑게 정수된 물이 진정한 눈물이다. 그래서 짜다.
 
이 눈물 시에서 너라고 하는 상대는 모든 사람일수도 잇고 한정된 상대일수도 있다. 시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많은 갈래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좋은 시라고도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무엇이고 다 공짜다. 비나 눈이나 바람이나 황사 먼지까지 다 공짜다. 오늘도 서울에는 참이슬 같은 소주가 공짜로 내리고 있다. 벚나무 개나리가 후유증으로 뽀드락지가 불거져 올라오고 조금 있으면 홍역 같은 꽃이 피어 오를 것이다.
 
영롱한 이슬 눈물이나 지하수 눈물까지 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똑 같은 공짜 눈물이다.
 
내 눈물은 미세한
그 한 방울일지라도
다른 눈물은 더 없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 먼 사람아
 
어찌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얻은 나의 미세한 눈물일망정 귀한 눈물을 만들어 주신 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눈물은 없다고 했다. 이 눈물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 준 유일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길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고 있는 나그네에게 이 귀한 눈물 한 방울을 준다고 했다. 역시 내가 가는 신앙의 길로 들어오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 먼 사람아
라는 탄식 같은 부름이 그렇다.
 
 
 
나그네
 
 
내가 성냥 그어
낙엽 더미에 불붙였더니
꿈속의 모닥불 같았다
나그네 한 사람이
먼 곳에서 다가와
입고 온 추위를 옷 벗고 앉으니
두 배로 밝고 따뜻했다
 
할 말 없고
손잡을 일도 없고
아까운 불길
눈 녹듯 사윈다 해도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내가 불 피웠고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내 마음 충만하고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이대로 한평생인들
좋을 일이었다
 
나그네 라고 하는 제호를 맞고 보니 문득 최희준이 부른 노래 한 소절이 생각난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주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가사로만 보면 금지곡이 되어야 할 맥 빠지는 노래다. 키가 작고 몽탁한 가수가 저음으로 부르고 보니 정말로 한강 저 아래 김포 포구쯤에 누워서 흘러가는 물이 서해로 들어가는 것 같아 음산하고 칙칙하다. 그건 그렇고 -
김남조의 나그네 시에는 낙엽더미에 불을 붙이는 꿈같다는 이야기가 있다. 낙엽은 물론 죽음을 암시하고 누구나 불태워져야 할 운명의 검불더미다 그 안에 김문억이도 한 장 바싹 마른 낙엽으로 들어 있다. 하지만 꿈속의 모닥불 같이 따스한 불이 되었다 먼 곳에서 온 나그네 한 사람이 곁에 와서 불을 같이 쬐니 밝고 따듯하기가 두 배라고 한다. 동행자다. 혼자서 가기에는 인생길이 두 배로 더 멀다 남녀가 같이 가면서 생산도 하고 사랑해야 한다.
혼자서 가기에는 인생길 나그네가 너무 외롭고 춥다. 김남조가 성냥불을 그어 댄 불은 빛이고 나그네는 동행자다. 죽음이라고 하는 불랙홀로 같이 빨려 들어가야 하는 조금은 모질기도 한 여행이다.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도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 먼 길을 걸어 온 현실 앞에서 딱히 할 말은 없다. 손 납아 줄 일도 없다. 왜냐하면 목숨의 빛이 꺼지고 눈 녹듯이 어둠이 온다 해도 나로서는 도리 없는 일이었다. 다시 내가 불을 피웠다고 한다.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같이 쬐니 마음이 충만하고 영광스럽다고 한다. 이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일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이 한평생 좋을 일이라면 추운 나그네를 위하여 모닥불을 피우는 방화범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다. 나도 지금 3년 째 혼자서 외롭다.
개미마을
 
 
산불이 이어져
죽음의 파도가 횝쓸었다
나무들이 죽고
돌도 피부가 불에 타 벗겨졌다
그러나 개미들은
일부 살아남았다
땅속에 길을 트고
둥지도 얼마간 수습했다
살아남은 개미들이 만나
네가 살아 있어 고맙다
너도 살아 있어 고맙다고
서로 인사한다
개미들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황금찬 시인의 글 중에서 눈 내리는 날 산새들이 먹을 것이 없겠다 춥겠다 하고 걱정하는 문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분 역시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면서 눈물이 많은 시인이다 사랑 바이러스 탓이다
개미는 물론 민초들을 비유하고 있다. 땅 속에 굴을 파고 집을 만들고 땅만 기어 다니면서 먹고 사는 등치 작은 무리들이다. 우리는 흔히 말단직을 일컬어서 개미라는 이름을 얻어 쓰고 있다. 잠시라도 일하지 않으면 그냥 굶어 죽고 마는 막다른 길에서 연명하는 무리다. 문득 60년대의 청계천 하꼬방-판자촌의 비표준어- 촌이 생각난다. 그곳 역이 가난한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조개껍질 같이 붙어서 사는 개미굴이었다. 그무렵 수시로 불이 나는 바람에 다 타고 없어졌다. 그 때 마다 소방차에도 불이 났었는지 다 타고 난 뒤에 왔다고 한다.
산불은 가해자고 갑질하는 무리다 상대적으로 개미는 박해받으면서 숨어서 사는 민초들이다. 툭하면 태풍 불고 산불 타는 바람에 땅바닥에 바짝 붙어서 사는 개미들은 편한 날이 없다. 그냥 목숨이라도 붙어 있는 것이 서로 반갑고 다행일 뿐이다. 개미들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여 있다고 한다. 시인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보지 못 하는 눈물이다. 곤고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이야기가 개미로 희화되고 있다.
 
개미 이야기 하나 더 : 일전에 어느 소식지에서 읽은 것인데 개미들의 무리가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들 중에서 3/1은 실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휴식 중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3/2만 일을 하고 나머지는 휴일 나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3부 교대다.
누가 할 일 없이 그런 것까지 연구 했느냐고 웃지 말자 일본 사람들의 집요한 학구파들의 연구 끝에 나온 결과다. 놀랄 일이다. 이런 것 마저 그네들이 자랑하는 기초과학인가? -계속.
 
 
 
석류
 
진홍 장미
일만 송이의 즙이
석류 살비듬에 고여
진홍의 단맛으로 영글었다
 
나는 붉은 사랑이야
붉은 유혹이야
붉은 가책이야
나는 붉은 노을이야
붉은 불면이야
나는 붉디붉은
심장이야
 
이 작품에서는 마지막 심장이 佳句다. 석류의 이미지를 모두 모두어 놓은 단편으로 딱히 감상문을 쓰지 못 하다가 문득 입스로 꽉 물고 있다는 영상 때문에 자작시 석류를 쓰게 되었다. 이렇게 남의 작품을 읽다가 얻는 작품도 있게 마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오래간만에 내 시라고 내 놓을 수 있는 글 한 편을 지금 막 쓰게 되었다.
 
무게를 못 이기고
놀 밭으로 툭 떨어졌다
지붕위로 던진 어린 치아 몇 개와
가마 솥 불덩어리와
부활하던 숯불까지
 
빨갛게 익어터진 뜨거운 눈물방울
해 떨어지기 전 아우성치던 하늘까지
입으로 꽉 물고 있다
두근거리고 있다
-김문억의 석류 전문.
 
 
그들의 봄
 
 
봄이 아슴할 무렵
나는 겨울나라에 도착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가
겨울의 원주민이며
환한 미소로 달걀의 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은 자애롭고 강건한 아버지
그 품속은 졸음 오도록
따뜻하다
 
삼동三冬의 주름살 갈피에서
노란 햇솜뭉치의
병아리들이 태어날 때
이곳 사람들은
서로 머리를 끄덕이며
더러는 포옹을 하면서
이제 봄입니다
이제 봄입니다라고
인사를 나눈다.
 
그들의 봄은 여느 사람의 봄과 다르다
희미하고 아슴한 봄이 미적거리면서 연착 할지도 모르는 불확실시대의 봄이다. 마냥 기다릴 수만 없는 봄이어서 서둘러서 만들어야 할 까닭이 생겼다. 그들은 봄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네들이 만드는 봄은 알을 잉태하고 낳고 품어야 오는 창조하는 봄으로 온몸으로 투신하기 때문에 열이 나고 따뜻하다. 아버지의 봄이다. 삼동의 추운 겨울을 다 이겨내야 보장되는 봄이다. 이곳이 하느님 아버지의 겨울이기 때문에 겨울 원주민일 수밖에 없다. 겨울은 춥고 배고프다. 고난의 잿배기를 다 넘어야 부화의 생병 봄을 맞는다. 막연하게 기다렸던 불확실의 봄이 아니고 겨울을 체험하여 얻은 봄이기 때문에 서로 머리를 끄덕이고 해냈다는 경이로움에 취해 서로 끌어안고 인사를 한다. 우리가 봄을 만들었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었다고.
 
시는 이렇듯이 사실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진정 좋은 말로 남게 되는 작업이 시 작업이다. 글로 만드는 예술이다. 바로 이 부분이 산문과는 너무 다른 장르가 시문학이다. 소설이나 수필 같은 산문은 일단은 체험이나 간접 체험 또는 문장의 유기적 연결고리로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시는 얼마든지 바깥과 안으로의 세계를 펼치면서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널뛰기는 시에서만 가능한 일로 대단한 상상과 힘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의 말뜻이 갖는 능력에서 가능해진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일수록 이 부분이 많이 미약하다. 내가 늘 안 보이는 것을 찾아서 쓰라고 하는 주문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시를 이렇게 써도 될까 하는 의문이 날 때 바로 그 길이 창작의 길이다. 그 곳을 파고 들어가야 금강석을 칼 수 있다. 광맥 앞에서 서성이거나 뒤돌아서면 안 된다. 시문학에도 뷰전 시대가 오고 있다 서정시 극시 산문시 뭔 시 아무개 시 등등을 종합하여 한 편의 시를 내놓는 시대다. 물론 시험적인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이 나오고 있다. 독자는 늘 새로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니까.
 
 
우는 사람
 
 
누가 우는가
울려고 내어난 사람인가
울면서 한평생이려 하는가
그 사람의 그 사람이 함께 우는가
그래서 더 섧은가
 
울지 않는가
울음 그쳤는가
울음 끝내고 멀리멀리
손잡고 사라졌는가
 
생명에 대한 시다
이 시인은 끝없이 생명에 대하여 질문하고 자답하고 있다. 이는 확고한 신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갈등하면서 묻는 내면세계의 적나라함이다.
우리는 종종 왜 사느냐 어찌 사느냐 나는 그럼 어디서 왔느냐 하는 자신에게 또는 생명자체에 질문하고 답을 얻으려고 하지만 확실한 답을 얻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작품에서도 처음부터 끝가지 의문의 질문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서 묻는 누가는 바로 나 일수도 있는 충분한 까닭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 자신도 우는 사람 축에 들 것 같다. 소리 내서 엉엉 울기 보다는 그럴만한 고독과 슬픔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삶의 불행이기 보다는 어쩌면 시인이 생의 동반자로 느끼면서 즐기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 어느 누구도 가늠되지 못하는 시인만의 속사정이다.
그 사람의 그 사람이 함께 울어주어서 더 서러운가 라고 묻는다. 같이 울어 주었다면 지극한 사랑이다 이는 우는 사람의 신앙적 대상이 될 수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다. 울음 그치고 멀리멀리 사라졌느냐고 묻고 있다. 나를 지어주신 분을 따라서 갔기 때문이다. 아직도 긍정의 질문에 대하여 진정 그러냐고 묻지만 아무튼 울면서 온 세상을 울음 뚝 그치고 간 것 같아 좋다.
 
 
 
낙엽
 
 
단 한 번
결연한 추락으로
땅 위에 뛰어내리는 낙엽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처음으로 눈 뜬 사람처럼
오래 바라본다
 
날이 저문다.
 
 
 
 
단순하고 무심한 사람에게 낙엽은 그냥 떨어지는 가랑잎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눈으로 詩力을 주입하고 보면 떨어지는 한 장 낙엽에도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 온다. 시창작의 출발점이다.
사과나무 아래서 책을 읽다가 툭 하고 떨어져서 굴러가는 사과를 바라봤던 물리학자는 순간 포착으로 우주는 피차간에 밀고 당긴다는 만유인력을 발견한다. 시인은 늘 보아왔던 낙엽 한 장이 어느 날 새삼스럽게 눈을 찌르면서 아프게 들어온다. 깨달음이다. 그런가 하면 오 헨리는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고통과 외로움을 위문한다. 단 한 번
결연한 추락으로 땅 위에 뛰어내리는 낙엽이 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반추하면서 끌고 왔던가. 그것은 위대한 삶의 승리이면서 가치 있는 죽음을 맞는 승리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보아왔던 한 장 낙엽의 의미를 이제야 새삼 깨닫고 보니 오래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날이 저무는 황혼에 들어 깊은 회한에 젖는다.
 
 
 
천일千日
 
 
천 번의 해돋이와
천 번의 해넘이
내 침묵의 천일쯤이 저물 무렵에
천둥번개가
단칼로 번득였다
「그대 생각을 많이 합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천일千日은 온蘊이다. 옛날에는 무궁하도록 많이 쌓았다는 만당의 표현으로 百을 蘊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지만 요즈음은 천일을 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심으로 지내고 있을 적에 나를 일깨워주는 천둥번개가 단칼로 명료하게 번득이면서 그가 말했다 「그대 생각을 많이 합니다」라는 응답을 받는다.
하늘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일갈의 할을 듣게 되었다. 번개천둥은 순간의 일깨움이다.
이 시를 감상하면서 문득 무산 큰 스님 작품이 생각난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조오현 스님의 아득한 성자. 전문.
 
 

행복
 
 
후두둑 주룩주룩의 빗소리
듣기 좋은 것이구나
날 저물고 밤 깊도록 음악만 듣는
청승도 괜찮은 것이구나
내 몸속 오장육부의
오늘 날씨 쾌청하니 고맙구나
바람 오는 거 가는 것도 오묘하구나
오만 가지 조화 중의
사람 사는 일 신비이며 복이구나
오늘은 기도조차
송구한 공휴일이구나
 
그러고 보면 김시인의 말씀처럼 행복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늘 바람 앞에 찰랑거리는 물결과 같아서 수시로 움직인다. 차고 넘친다. 더구나 시인의 감성은 그 진폭이 크다.
날 저물고 밤 깊도록 듣는 빗소리가 감미로운 음악으로 들려올 때야 말로 더 없이 행복하다. 자연에서 듣는 생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듣는 빗소리에 취하는 청승이라면 행복하고 말고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아무 욕심도 없이 생각도 없이 듣는 음악시간이다. 지금이야 말로 오장육부까지 편안한 무욕의 경지고 보면 사람이 산다는 일까지 새삼 신비하고 복인 것 같다. 빗소리에 만취 해 보니 오늘이 공일空日이다. 사람은 왜 빗소리가 그리 좋을까? 어쩌면 하늘에서 물줄기를 가늘게 찢어서 골고루 뿌려주는 감미로움 때문일 것이다. 지붕위로 떨어지는 소리 양철통을 때리는 소리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가 모두 음악적 화음을 갖고 있다.
목 타고 메마른 것들 풀이나 나무들이 빗물을 받아먹고 산다. 산과 들이 밥 먹는 시간이다. 어쩌면 빗소리를 듣는 사람까지도 그리 행복하다고 하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액液으로 된 영양제다. 필자도 김시인과 같이 빗소리에 푹 빠지는 날이 종종 있다.
 
 
 
장엄한 오키스트라
지휘자는 누구냐
 
물 막대로 현弦을 켜는 관현악의 앙상불,
연주자의 가슴에서는 태풍 일고 천둥 치고
오선지는 하늘 땅 사이에서 비바람 번개 치며 뒤집어지며 고꾸라지며
사랑이여
이별이여
죽음이여
통곡이여
휘몰아치는 휘몰이 악장이 거듭거듭 너머 가고 있다.
 
만취한 객석에서는
그치지 않는 박수 소리.
-김문억의 ‘소낙비2’ 전문.
 
 
 
상사병
 
 
불치의 내 상사병
백 년 세월에도 못 고치는
만성질환이
죽을 죄로 부끄럽습니다
 
철거덕 철거덕
철로 위를 달리는
무쇠바퀴 한 톨도
더러는 멈추었다 가련만
원수 같은 상사병은
나 죽은 후에도
심장이 살아남아 두근두근
맥박 치면 어이할까요
 
아닙니다
생손톱 하나 뽑아
피 묻은 그대로
그 사람의 속주머니에
넣어 보내지도 못했으니
참 상사병이나마 되겠는지요
그저 아득합니다
아득합니다
 
상사병으로 김 시인의 신앙적 믿음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죽도록 불치병이 되었으니 이쯤 되면 님을 향한 믿음은 숭고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죽은 후에도 심장이 살아남아 두근두근 맥박이 치면 어찌 할 거냐고 자책하고 있다.
그런 믿음이 최고 절정에 이르고서도 자신의 상사병조차 다시 거짓이 아닐까 하고 자문하고 있다.
 
아닙니다
생손톱 하나 뽑아
피 묻은 그대로
그 사람의 속주머니에
넣어 보내지도 못했으니
참 상사병이나마 되겠는지요
그저 아득합니다
아득합니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괴로워 하고 있다. 참 상사병이나마 되겠느냐면서 그저 아득하다고 거듭 탄식을 하는 것은 님으로 부터 받은 만큼의 사랑에 대한 행동하지 못 하는 양심의 고백서다. 믿음의 대상, 님과 나의 거리는 너무 까마득한 것이고 그런 뉘우침이야 말로 일방적으로 받고 있는 님의 지극한 사랑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이 아득할 뿐이다. 작품 전편을 보면 순교의 정신마저 보이는 매우 숭고한 분위기다.
 
 
성냥 2
 
 
성냥을 그어도 될까
유황과 화약지가
몸 서로 맞닿으면
불의 병정들
순식간에 모여 붐빌 텐데
바람 한판 거든다면
불의 전쟁터 뻔할 텐데
 
그렇거나 말거나
성냥 확 그어 버릴까
아니야
성냥을 멀리 던져 버려
커다란 포물선으로
아득히 보내버려
 
그런 다음
땡볕에서 온종일
슬픈 곰처럼 울어버려
 
 
성냥은 유혹이고 사탄이다
그러면서 성냥은 원인제공의 원죄 위치가 된다. 한 알의 성냥개비가 일으키는 불길의 위력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형체도 없이 순간적으로 변이하는 불의 바이러스는 분명 귀신이다. 불귀신 사탄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한 번 확 그어대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이 문제다. 그렇지만 바로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사탄이 들어와서 꼬드기고 있었지만 바로 신앙심이라고 하는 이성이 들어와서 사탄을 쫓아낸다. 아득히 멀리멀리 보내버리자고 했다. 죄와 벌 믿음과 사랑이라는 극과 극의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다음
땡볕에서 온종일
슬픈 곰처럼 울어버려
 
곰은 참을 인忍자다.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영물로 인내하고 생각하는 대상이다. 땡볕은 이름 그대로 빛이면서 양성이다 그 땡볕 아래서 곰처럼 웅크리고 실컷 울고 싶다 했다. 그러면 작품에 올라 온 성냥과 땡볕 곰은 무엇을 상징하는 관계일까. 시적 화자는 지금 매우 을씨년스럽고 춥다. 외롭고 고독하다. 추위를 달래기에는 우선 성냥불을 그어 대서 모닥불을 피우는 것만큼 빠른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성냥불은 항상 위험을 갖고 있다. 회오리바람이라도 휘리릭 불어오는 날엔 화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장은 추운 몸을 녹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꺼진다. 바람이 불어오면 번지기도 하지만 꺼지기도 하는 것이 불길이다. 믿음이 안 간다. 위험하여 사탄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땡볕은 자연적으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빛으로 사랑의 상징이다. 포근한 손길이다. 그 볕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추위를 가실 수 있는 좋은 빛이다. 슬픈 곰처럼 울겠다는 생각은 잠시나마 성냥의 유혹을 느꼈던 자신에 대한 통한의 눈물이다. 그렇게 회개하면 하늘에서 그 음성이 내려올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일어나거라 아니면,
야곱이 잠깨어 일어나서 듣던 그 천사의 노랫소리가.
 
지금 나는 ‘충만한 사랑’의 시집 속에서 십여 편 이상의 시를 감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인즉 주일 날 훌륭한 신부 앞에서 예배를 올리고 있는 기분이다. 앞으로 무슨 시가 몇 편 더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읽어 본 편편마다 기독교적 신앙 속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답을 구하고 있다. 시 한 편의 깊은 의미가 나에게도 空日을 제공하고 있다.
김남조는 대가의 위치에 있는 유명작가지만 나는 시조를 쓰는 무명작가다. 그분의 작품을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전체가 다른 하나의 이야기로 은유되는 알레고리 비유법으로 관철되고 있다. 나의 창작기법과 너무 흡사하다. 왜 내가 갑자기 이분의 작품에 매료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풀리고 있다. 다음 작품을 또 읽어 보기로 한다.
 
 
동행
 
 
그대 함께 가고 싶어
등짐 무겁고 신발 해져도
포승으로 두 팔이 묶인다 해도
그대 있어 그대 있어
안도하고 싶어
다음 세상의 끝날까지
끝날 그다음에도
그대 함께 있고 싶어
 
천하시공天下時空과
무궁세월無窮歲月 마저 뭉개지는
어느 때 그쯤에는
어떤 연분도 손 놓고 쉬리니
우리도 그리하자
 
사랑과 영원의 대화다.
그대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면서 골고다 산상을 오르는 예수의 고통도 함께 감내할 수 있다 그대만 곁에 있으면 이세상 끝까지가 아니라 저세상의 또 저세상 끝까지도 함께 하고 싶다 했다. 영원의 무궁한 세월이다 그 영원으로 함께 들어가면 어떤 연분까지 다 소용이 없이 편히 쉬는 천국의 나라가 될 것이니 우리 그리하자고 한다.
‘충만한 사랑’ 책에 오른 시편은 문장에 어떤 근사한 수사 같은 것은 없다. 신앙인 입장에서 묻는 삶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질문서기 때문에 문장이 수려하다거나 호화로운 수사 같은 것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다만 꼭 필요한 말을 제자리에 앉혀 놓는 일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역시 시의 중심은 意 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햇빛 쪼인다
 
 
죽음이 업고 간 아들
아니 돌아오고
절통의 가슴앓이도
뒷소식 못 들었으나
보아라 푸르청청 아른아른의
햇빛 피륙들이
부시게 너울거려
빛의 금가루 자욱하다
 
한데 이를 어쩌나
자신의 재주가
옛날에 못 미친다며 눈물 흘리는
늙고 초췌한 마술녀魔術女 옆에서
내가 그녀라는 생각
아무래도 그녀라는 생각
거듭 치받는다
 
그러면서 지금
내 몸의 뼈의 골수까지도
햇빛 쪼이니
복 받는 일 아닌가
복 받는거 모른다면
안 되는 일 아닌가
 
나는 거듭 죄를 지어도 죄의 값을 묻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준다는 말씀이다. 김남조 시를 읽고 나면 먼저 성구聖句 같은 메시지가 툭툭 튀어 나온다. 먼저 간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좌절이 되었을까 먼저 간 아들이 되돌아오는 소식은 없이 애통해 하는데 금가루 같은 빛은 여전히 나를 비쳐 주고 너울거린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도 빛은 빗겨가지 않고 나를 위무 해 준다. 살아있는 사람은 또 살기 마련이어서 긍정과 송구함이 엇갈리고 있다.
영구차를 따라서 장례식을 하다가 보면 눈길 닿는 곳곳 마다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지나가는 자동차 풀숲 나무들까지 하나의 죽음 앞에서 살아있는 것들이 위대하기도 하고 시시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심사가 혼란스러우면서 슬픔의 잣대가 마구 흔들리게 된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먼저 가는 생명과 비교를 하게 되고 안부를 묻게 되고 진정 이것이 영영 이별이란 말이냐고 질문도 던져 본다. 죽음은 살아 있는 식구들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늙고 초췌한 늙은 마술 녀 앞에서 자신을 오버랩 해 보는 이 딱한 현실이 양심에 마뜩치 않아 치받친다고 했다. 자신이 그러할진대 못 미치고 부족한 것을 너무 절감하는 이 현실 앞에서도 나는 뼈의 골수까지도 볕을 받고 살아 있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심장 안의 사람
 
 
사람 하나
나의 심장 안에서 산다
착오로 방문한
우주의 여행자였으리
 
아찔하게 감당이 어려운
이 손님에게
나는 머무르라 했고
나 사는 동안
떠나지 말라고도 했다
 
그다음엔
눈 내리듯 춥고
겸손한 소망 하나가
보호자 없이
태어났다
 
제목에서부터 뜨거운 사랑을 느낀다
심장 안에서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얼마나 간절하고 질실하고 뜨거운 사랑이었나. 그 필연 마저 겸손하게도 착오로 방문한 우주의 방문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천한 나에게 오신 것이 착오라는 겸손이다. 나에게 들어 온 목숨 하나는 내치지 못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 또한 신의 명령이다. 나 살아 있는 동안 떠나지 말라고도 했다 이는 영혼까지 맹세한 결합의 악속이다. 하지만 그는 나 보다 먼저 가셨다. 그가 떠나고부터 크고 작은 소망들이 보호자 없이 태어났다. 그는 나의 보호자였기 때문이다.
눈 내리듯 추웠다니 너무 슬프다 그 추위 속에는 눈송이 만큼 많고 많은 이야기를 끌고 내려왔으리라.
김남조의 시를 계속 읽는 동안 간절하게 슬프고 희망적으로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살아 있다는 생명 자체가 축복이었으니 행복하고 죽음을 이야기 하면서도 의지하고 믿는 큰 사랑의 밧줄을 잡고 있으니 행복하다. 슬퍼도 그냥 슬픈 것만이 아니어서 인생은 또 살아 있는 사람끼리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인생을 희 노 애 락의 겹 색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나 보다
오늘은 청량리 시장을 가면서 경동시장 네거리에서 구두수선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먼저 들렸다. 어제 김남조 시를 읽으면서 그 친구에게 자주 가지 못하고 지낸 것이 너무 양심에 찔려왔다. 어려서 크게 다친 바람에 큰 장애를 갖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절룩거리면서 살아가는 그가 어찌어찌 바람을 타고 그곳까지 와서 구두수선을 하면서지내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깨에 책 보따리를 두르고 절룩거리면서 지각을 하던 그의 모습은 영영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영상이다.
 
“야? 어제는 김남조 시를 읽었는디 그 분 말씀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축복이란다 야”
“그려 그려 암 그렇구 말구 나는 또 가만 있으면 안 되어 일을 해야 되는 사람여”
“지금 우리 나이에 일하는 현역이 몇이나 되겠냐 너는 행복여 ㅎㅎㅎ”
 
그렇게 너스레를 피고 윌 한 병씩 나우어 마시고 왔다 그는 지독한 천주교 신자여서 더 맘이 편했다.
말을 하고 보니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 역시도 김남조 시감상 이야기에 속한다.
 
 
거울
 
 
오늘도 날 저무는구나
혼잣말했을 뿐인데
한 메아리 빛살처럼 돋아나
함께 울리고 사윈다
 
누군가가
거울 속에 그 모습 비췄는데
다른 누군가가
설풋이 어른거리곤
무형의 지우개로 지워진다
 
마음의 글씨도
복사기에 찍히나 보다
두 마음 하나일 땐
이리되나 보다
 
 
이 작품의 거울은 실물을 비쳐보는 거울이 아니고 마음의 영상 목소리를 듣고 보는 대단한 거울이다 깊은 신앙심이나 간절한 기구에서 오는 마음의 거울이 있을 수 있고 적어도 진심어린 詩心으로 무엇을 기도 했다면 천착하는 시인의 마음도 마음의 거울을 보았다고 쓸 수 있다. 요술쟁이도 못 보는 시인의 능력이다. 말을 하고 보니 나 같은 어설픈 시인은 고통의 거울을 몇 개 소리 내서 깨 부셔도 마음의 거울은 안 떠오를 것 같다. 혼탁한 마음에 도봉산 미세먼지 같은 희뿌연 것이라도 떠오를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렇고-
혼잣말을 했을 뿐인데 소리의 응답으로 메아리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나타나고 누군가가 지워지는 환영에 마주친다
결국 간절한 희구로 마음과 마음이면 하나가 된다는 신앙적 고백이다.
 
작품 속의 화자는 종일 무심히 외로웠고 종일 무심히 누군가를 기다렸음이 맞다. 오늘도 날 저무는구나 혼잣말을 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밝은 해가 다 사위고 늦은 저녁이 되기까지는 무료와 외로움의 하루가 또 사위고 있다. 때문에 그런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오게 된다
시 감상에 있어서는 시적 율을 맞추기 위해서 때로는 적당히 어울리는 허사 같은 것도 따라다니지만 문장 하나 마다 감추고 있는 기막힌 뜻을 놓치게 되면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말마디 한 소절이 어우러져서 문장이 탄생하기 때문에 작은 소리도 중요하지만 시 전체가 의미하는 메시지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
비가 그쳤다 심던 나무를 마저 심어야겠다 라고 했다면 큰 의미는 없다 하겠지만 비가 그쳤다 또 길을 찾아야 한다 라고 말을 했다면 비가 그치고 또 찾아야 한다는 말을 건너 뛴 그 이면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문장이다. 시는 어차피 고도의 생략이고 비유니까 그런 연결고리에 숨어있는 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오늘도 날 저무는구나 라는첫 구절이 그냥 허사는 아니었으며 마음의 글씨마저 복사되는 거울이 있다면 초월적 신앙 속에서만 가능하다.
 
 
대륙의 산
 
 
미국 대륙은
명산 하나 보고 오는 일이
세상 한 둘레 같다
가로등 줄무늬 황황한 불빛이다가
산 첩첩 그간엔 검은 색 한 빛이다
다시는 못 오리니
인사하고 가야지
「산 중의 산이시여
한국에서 온 개미 하나
다녀갑니다 내내 평강하십시오」
산이 대답한다
「낯선 사람아 잘 가거라
그리고 내 옷깃의 한 자락을
추억으로 지니거라」
 
 
명산 하나 보고 오는 일이 세상 한 둘레를 도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미국 대륙이 크기는 큰 가 보다. 대도시의 가로등 황황한 불빛 아니면 산 첩첩 검은 색 한 빛 뿐
다시는 못 오리니
라는 표현은 실지로 다시는 못 올 사정이라기보다는 다시 오고 싶지도 않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인사나 하고 가겠다는 말이 된다. 인사하는 말과 대답을 하는 산의 말을 묶으로 중히 표시하는 작가의 의중은 동서양의 이질적인 문화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 더구나 동방의 작은 나라-땅덩어리로만 작은- 한국에서 온 개미 하나 다녀갑니다 라고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다. 내내 평강하십시오 라는 인사 투는 약간 빈정거림으로도 들린다. 나는 미국은 바 본적은 없지만 그림이나 영상으로 자주 가 보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가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는 시를 쓰고 있는 딸깍발이의 삐딱한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 나라는 그 나라대로 그냥 미국이 아니라는 위대한 것들이 있겠지만 이번에 코로나 돌림병이 돌고부터 그 쪽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그 쪽 문화에 조금 실망했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이 말은 풀벌레들이
한 철을 울고 간
끝의 말이다
수틀에 수실을 기워 넣는
겨울 산수화의
으스스 추운 말이다
 
잘 가세요
공중에 뿌리는 뼛가루의
희디 하얀 말이다
천지간에 자욱한
유언이다
 
 
바늘에 색실을 꿰어 수틀에 수실을 한 땀씩 수놓는 일은
아주 섬세한 손재주가 있어야 하고 정신 집중이 필요한 정서적인 가사 노동이다
한 철을 마감하면서 울고 가는 풀벌레의 가녀린 울음소리를 이에 비유하고 있다. 가을 풀벌레의 스산한 별곡은 으스스 추운 말이면서 끝의 인사말이라고 했다.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는 추운 날씨로 생을 마감 했을 것이다. 잘 가세요다
사람이 죽어 희디 하얀 골분을 허공중에 뿌리는 일까지도 천지간에 자욱한 유언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보는 슬픈 죽음의 흔적이 그냥 허공에 대고 외치는 인사말이 아니다 천지간을 자욱하게 덮는 유언이라고 한다. 김남조는 내세로 들어가는 관목의 죽음에 대하여 끝없이 천착하는 글을 내 놓고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잡았던 끈을 놓아야 하는 절박한 때에 남기고 싶은 인사말이라면 잘 가세요 외에 달리 무슨 새로운 인사말이 있겠는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이렇듯이 아름답게 표현하는데 잠시나마 노동운동에 관여하던 시절에 쓴 나의 귀뚜라미 소리는 야간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미싱소리로 들려왔던 적이 있다.
 
열아흐레 심지 짧은 달빛으로 등불 달고
졸음을 달래가며 야간작업 하고 있다
고달픈 조각들을 모아 재봉틀로 박고 있다.
-김문억의 ‘귀뚜라미’ 첫 수.
 
 
겨울 초대장
 
 
어서 오십시오
공해 없는 하늘에서 몽롱히 내리던
옛날의 백설白雪로 오십시오
 
더 어른이 된 추위
더 장중해진침묵
봄을 잉태한 모성의 몸으로
한 땀 한 땀의 마느질처럼
생각 깊게 오시는
올해의 겨울이여
당신의 숙소를 마련하고
저희가 기다립니다
 
창호지 한 장의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도
집과 바깥세상이
넉넉히 평온하던 시절
그 때의 아이들이
어른 되고 노인되어
당신을 기다립니다
 
지금 세상은 꽃과 사람까지도
기계로 만드는
촉광 밝은 문명이지만
옛날의 예술이 존경스럽고
그 덕성이 빛부십니다
 
서릿발 같던 충절과
순교도 불사하던 신앙을
오늘의 저희가 배운다 해도
안 되는 일 아니겠지요
 
겨울이여
평생에도 못 써 볼
준열한 시여
 
 
이 시의 대미는 마지막 연에 있다
 
평생에도 못 써 볼
준열한 시여
 
이 부분에 있다.
그림으로 친다면 그 유명한 세한도에 비견되는 차고 냉정하면서도 멋스러운 구절이다
이 작품은 계절로 치면 겨울과 봄의 비유지만 시절로 친다면 옛 것과 현대문명의 대비된 이야기다. 서릿발 같던 충절과 순교도 불사하던 신앙을 오늘의 저희가 배워야 한다는 변질되고 있는 시대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세상이 변하면서 종교적 신앙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올라와야 할 꽃마저 혹은 사람마저 기계로 만들어낼 만큼 밝은 세상 문명이라 하지만 공해 없는 하늘에서 꿈꾸듯이 내리는 백설 같이 옛날의 예술이 덕성스럽다 한다. 봄을 잉태한 모성의 몸을 잘 모시고 싶은 집 한 채 마련 했다고 한다. 그 때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봄을 잉태한 겨울을 초대한다고 했으니 분명 반복되어 오는 내년의 봄이 아니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내세의 희망이다. 봄부터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거쳐 오는 겨울은 새 생명의 희망을 기대하는 어른의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는 봄은 느닷없는 혁명과 같기 때문이다.
 
 
 
사치한 농담
 
 
아침엔 내가 가라 해서
그는 일터로 간다
그래서 내 옆엔 그가 없다
저녁엔 내가 쉬라고 해서
그는 그의 낙원으로 가고
내 옆엔 그가 없다
저만치의 아련한 웃음소리
 
무슨 말인가고?
쓸쓸해서 지껄여 본
내 사치한 농담이야
 
 
이 시집의 이름이 충만한 사랑이다 작품 곳곳에서 우리는 충만한 사랑가를 듣고 있다. 그 대상이 하느님이던 예수 던 마리아 던 사랑하는 남편이던 깊은 신앙에서 울려오는 송가를 듣고 있다. 마치 녹음이 시작되는 4월이 오면 겨우내 쓸쓸하던 빈산에 연두 빛 속이 차오르면서 각가지 새들이 숲에서 노래를 하는 풍경이다. 줄줄이 다가오는 시의 내용은 슬픈 것도 있겠지만 슬픈 것은 그것대로 아름다운 노래로 들려 온다.
사치한 농담은 쓸쓸한 진담의 역설적인 노래다. 어느 날 갑자기 착오로 방문한 우주의 여행자라고 했던 평생의 동반자가 없어졌다. 그러나 화자의 동반자는 지금도 늘 곁에 있다. 비록 먼저 가셨지만 놓지 않은 동반자다. 아침엔 내가 일하러 가라 해서 나가고 없고 저녁엔 쉬라고 해서 그의 낙원으로 가고 없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님은 가마득 멀리 간 것이 결코 아니고 저만치의 아련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려온다고 한다. 이승과 저승간의 문턱이 없다. 님은 내일 아침 또 내 곁으로 돌아와서 일하러 가야지 하고 말해서 출근을 시키고 저녁때가 되면 수고했으니 좀 쉬라고 위로해서 내 곁에 없을 뿐 아직도 같이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이 비현실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처럼 아주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무슨 말이냐고 자문을 한다
 
쓸쓸해서 지껄여 본
내 사치한 농담이야
 
스스로 사치한 농담이라고 속맘을 숨기고 있지만 진짜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고 있다. 농담이야 라는 단어 하나가 오히려 진담이야 로 들려오는 까닭은 그 단어 하나가 꼭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풀들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풀들은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교과서가 어려워
진도가 느린 풀이 있습니다
사람도 학교에 다닙니다
사람이 배우는 책은
저마다 다른 내용이어서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슴과 호랑이와 갈매기들
바람과 비와 무지개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학교에 갑니다
 
이 학교들
졸업이 없습니다
 
 
 
5 부작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책은 이제 3부로 너머 왔다. 이 책을 다 읽기 까지는 앞으로 두 달 이상은 걸릴 것 같다. 글자판을 치는 속도가 전과 같지 않다
학교라는 제목을 대하면서 얼른 짐작이 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전 과정이 학교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터다. 모든 생명이 낳고 살고 죽는 과정을 생각 해 보면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학교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만이 똑 같은 무게를 받고 태어나더라고 사람 마다 살아가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몇 달란트를 남기는 가에 대한 값은 다를 수 있다.
같은 학교에 나오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식물체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사슴 갈매기 바람과 비 무지개 따위가 다 사람이 배워야 할 교과서다. 하지만 이 모든 생명체는 미완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수료 아니면 중퇴다. 때문에 이 학교는 졸업이 없다는 말이다.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
 
 
겨울비 멈추고 눈 내릴 때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눈 멎고 그믐달 아슴할 때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달이 사위고 온 하늘 별밭일 때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기막힐 그만큼
지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태어나서 가장 기막힐 만큼 느낌을 받은 때는 변화하는 자연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위대함과 함께 고독이 엄습 해 올 때다. 눈이 내릴 때 그믐달 아슴할 때 온 하늘 별밭일 때와 같은 자연의 위대함 속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세상도 나 없이는 없는 것이고 아무리 소중한 나도 세상없이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명을 받은 희열과 행복을 느낄 때에 나를 있게 해 준 어머니가 그립다.
태어나서 가장 기막힐 그만큼 지금 보고 싶다 했다면 언제나 보고 싶다는 말과 같다. 모든 과정은 지금이라는 흐름의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고요
 
 
눈 그친 밤
고요한 밤
눈 그친 밤
고요한 밤
눈 그친 밤
고요하지 않은
이 밤
 
 
눈을 씻고 싶을 때나 하늘이 보고 싶은 때는 불곡산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차 소리도 없고 사람이 없어 정말 고요하지만 고요라는 인식을 하지 못 하다가 하늘에서 우웅 하고 비행기 가는 소리가 난다거가 저승사자 같이 생긴 산 까마귀가 머리위에서 까 악 하고 울음 울면서 비로소 고요를 깨뜨리면 고요라는 느낌이 잠자는 나를 깨운다. 비유가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시끄러운 기찻길을 걸어가면서도 생각의 길이 엉뚱한 곳을 헤매게 되면 주변의 잡소리가 안 들리기 때문에 내 머리 속은 고요하다
눈 그친 고요한 밤 같이 고요한 밤이 또 있을까 영창으로 비쳐오는 달빛이라도 있는 밤은 사람을 정말 환장하게 만드는 고요뿐이다. 태풍 전야 보다 더 고요한 밤이다. 이 작품에서 거듭하여 말하는 고요는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은 고요하지 않은 불면의 밤이 된다. 자연의 신비와 그리움 같은 생각의 눈보라가 얼마나 아우성치며 불어오겠는가.
 
 
 
후일後日
 
 
나는 멈춘다
당신도 멈춘다
나는 떠난다
혼자 가는 건 아니고
다섯 살 나이의 어린 당신을
귀하게 품고 간다
 
세월 안에서
세월을 섬기며
모성만발의 축복으로
아기 기르며 살련다
 
오랜 후일
당신이 다시 어른이 되는 날엔
뒤뜰 대숲의
안 보이는 바람으로
나는 살으리
오래 살으리
 
 

천금의 찰나
 
 
초침 몇 둘레가
천금의 찰나들을 싣고 갈 때
사람의 몸은
피가 역류했으련만
그 전율을 실감한 이 없다
 
초침 몇 둘레가
천금의 찰나들을 폭파시킬 때
쇠부스러기의 분진이
천지에 자욱했으련만
아무 일 아니듯이
묻혀 버린다.
 
 
사람은 찰나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운행되는 찰나를 다 느끼면서 살기는 불가능하다. 초침이 돌아가는 찰나 마다 느끼면서 살라하면 어쩌면 시간의 공포로 폭파되어 죽을 것이다. 완강한 시간 속으로 난파하는 인생의 배 한 척이 쇠부스러기 분진을 일으키면서 천지가 자욱하더라도 일상의 우리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망각 또한 찰나 못지않게 천금 같은 것이리라,
 
 

빈 의자
 
 
사랑하는 이는 누구나
운명의 끝사람입니다
다시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순열한 일념으로
그에게 몰입합니다
 
그러나 수심은 깊고
햇빛은
어느 중간까지만 비춥니다
꽃시절이거나
첫눈내리거나에 상관없는
어느 날
끝의 사람이 떠납니다
끝의 사람이 떠납니다
 
마침내
끝손님은
하나의 빈 의자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누구나 운명의 끝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끝 사람은 어느 경우나 관계치 않고 떠납니다 그가 떠나고 난 빈 자리가 빈 의자였습니다. 그가 떠나고 없음으로 해서 마침내 그 자리는 내가 평생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그 의자가 안 보입니다
사랑은 오지 하나일 뿐 복수로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누가 또 온다고 하면 끝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그냥 비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혼자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사람이 끝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운명
 
 
음식을 덜어내듯
내 안의 너를 얼마간 떠낸다
네가 줄어져
이만하면 너를 업고
사막을 건널 수도 있겠다고
적이 안도安堵한다
 
그런데 아니다
너를 덜어내고도
너는 많이 남아있고
내가 줄어져
오장육부 수척하고
눈 침침 귀 먹먹의
몰골이 되었다
 
운명이다
너는 나의 운명이고
나는 너의 운명이다
그러니 운명끼리 손잡고
땅 끝 너머 더 끝까지
가야 한다
 
음식을 덜어내듯 내 안에서 너의 존재를 미리 더 덜어 낸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무겁지 않고 짐이 안 되게 미리부터 너를 덜어 낸다 모든 것을 참고 양보하면서 살아가리라. 이만하면 고통의 사막이라도 건너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안도 한다. 하지만 인생살이가 내가 맘먹은 것 같이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너를 비우고 살아 보지만 비워 낸 만큼의 공간에 다시 네가 자라고 채워지게 된다. 네가 줄어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너의 무게는 나를 누르고 있다. 따라서 쉽지 않은 너의 무게로 내가 또 줄어져 오장육부 수척하고 눈 침침 귀 먹먹이가 되어 간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같이 비워져 가는 것뿐이지만 운명은 우리의 능력 밖으로부터 온다. 서로의 운명이라면 땅 끝 너머 더 끝 영원까지 같이 가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거역하지 못 하는 길이 된다. 운명 끼리 손 놓지 않았으니 후일後日은 행복 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문안 . 2
 
 
산불이
달리는 군대처럼 지나간 후
개미굴은 무사할까
땅속 깊은 곳의 개미 공화국은
이에 대비했을까
산새들 꿀벌들은 무사할까
저들의 나침반은
안전한 상공을 짚어 주었을까
 
옹달샘은 무사할까
백 번보다 더 많이
불에 그을린 피부를 벗겨내고
눈물 같은 맑은 물로
채워졌을까
 
판도라의 상자 속
마지막 한 부스러기의 희망은
남아 있는지
그렇다면 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의 붉은 허파가
맥박 치면 된다
 
 
누가 문안을 깠을까 같은 처지에 있는 입장일 것이다
이 작품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세가와 서민층 갑과 을의 관계로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의 사회는 지금 극도로 기울어진 상태다. 균열로 찢어지고 상처가 나 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렇다. 위정자들만 탓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국 이래 이 같이 양분으로 갈라진 경우가 없었다.
군대가 휩쓸고 가듯이 지나간 산불은 위력을 발휘하는 집단이다. 땅 속에서 사는 개미며 날개를 달고 사는 벌 나비도 잘 피해서 목숨 부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 잠자는 집이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 일 할 곳이 없어서 헤매는 실업자가 너무 많은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다만 목숨만 붙어 숨 쉬고 살아만 있어다오 너무 비참하고 안타까운 절규다. 목숨만이라도 붙어만 있으면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 선택만큼은 하지 말아달라는 호소문이기도 하다. 땅은 거짓이 없고 진실하다 개미굴을 다시 팔 수 있고 따뜻한 볕과 바람으로 꽃이 피면 다시 꿀을 딸 수가 있다. 땅은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누에 이야기
 
 
누에 하나가
천오백에서 이 천 미터까지의
명주실을 풀어낸다
사료에 색소를 배합하여
열 가지 색깔의 실을 뽑아
문양도 다채로운
비단피륙을 짠다
 
명주실을 내어 주고
누에가 생애를 마치는 과정도 달라졌다
누에는 죽지 않고
나비가 된다
비단을 선물하고
날아오르는 나비들은
사람 중의 초인超人 같다
 
나비들아 이제는
꽃밭에 들거라
 
 
‘누에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실로 집을 지어 살고 사람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로 삶을 바꾸어 간다.’ 라는 말이 있다 누에는 살아있는 생명이 입으로 실을 짜내고 있으니 누에는 살아있는 공장이다. 누에만큼 근면한 경우도 흔치 않다.
작품 전반부에서 기술 했듯이 누에가 나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신비와 초월의 극치다. 마치 노동을 위해서 태어난 미불과 같다. 그것도 사람에게 유익한 생명체다. 뽕잎을 갉아먹는 애벌레에서부터 누에가 되어 명주실을 빼서 집을 짓고 잠을 자고 나비가 되어 승천하는 과정을 보면 때 때 마다 죽지 않고 새 생명으로 탄생한다. 이것은 대하소설이면서 대하시다. 그런 끊임없이 초극하여 넘어가는 고비 마다 얼마나 많은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꿈이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뽕잎을 씹을 때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같이 목을 빼어 뽕잎을 먹고 싶던 충동이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나비들아 이제는
꽃밭에 들거라
 
꽃밭은 아무나 들 수 없다. 꽃은 절정이고 승리의 푯대다 수고한 자만이 최고의 시상대에 올라 받을 수 있는 것이 꽃다발이다. 수많은 고난의 재를 넘어 날개를 달고 승천하는 나비가 되었으니 이 보다 더 빛나는 월계관이 어디 있을까
 
안개
 
 
사람의 마음 안엔
빗장 없는 문이 있고
문 저켠엔
의자 두 개
한쪽엔 사람이 있고
하나는 비었다
누가 저 자리를 비웠는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로 유명한 고독인가 하는 것이
운집하여 안개로 서려
저기 앉았나 보다
 
진한 안개 속에 두 개의 의자가 있는데 한 개는 비어 있고 한 개는 누군가가 앉아 있다.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야 할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의 사람은 나 일수도 있고 비어있는 의자는 또 내 자리일 수도 있다. 그 만큼 홀로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상이다. 어디까지나 안 개 속이다. 누구든지 아무 때나 찾아올 수 있도록 빗장 없는 문 안에 있는 풍경이지만 불확실의 안개로 조용하고 고독하다. 가족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에서 다시 독거라는 무서운 방에서 쓸쓸하게 늙어가는 노인들이 많은 안개 속 세상이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쓸쓸하다. 지금 세상에서 제일로 유명한 고독인가 하는 것이 운집하여 안개가 되었다고 통분을 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
지루하지요? 아직 절반도 못 읽었는데 나도 손놀림이 굼뜨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김문억의 서울 안개나 읽으면서 쉬어 갑시다.
 
 
서울, 오늘 안개/김문억
 
 
아침 뉴스를 보고 있음
간 밤 소식이 매캐하게 밀려 옴
 
이것은 실제 상황임
제목 : 공포와 전율
바그다드 공습이 시작되었음
따듯한 아랫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요리 조리 채널 돌리며
전자오락 같은 전쟁 구경하고 있음
화면 아래로 자막 뉴스 지나감
자유가 답답해서 탈북자가 월북했음
조명탄 불발되고 연막탄이 터졌음
視界는 제로 상태
몸통은 다 지워지고 머리통만 굴러감
철조망에 걸렸음
 
끼이익
브레이크 밟는 소리
오리무중
소식 없음
 
바그다드 공습 이야기가 있으니 꽤 오래 전에 쓴 시다. 했음 했음 하는 말 줄임으로 표기한 것은 급박한 시대적 안개의 제목에 충실하고 싶어 시도되었다.
완전범죄
 
 
해적들이 숨긴
진귀한 보물을 찾으려고
탐험가와 국가들까지
지략과 재물을 쏟았으나
아무도 얻지 못했다
 
이에 생각할 바 있다
그들 중의 누구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던 점이다
 
사람의 보물은
사랑이란다면
영혼에 전류 오는
참사랑이란다면
누설하지 마라
발각되지 말라
 
해적들의 지혜로
광맥처럼 안전한
완전범죄를 이루어라
 
 
 
비밀유지가 잘 되어서 완전범죄가 이루어지듯이 영혼에 전류 될 만큼
참사랑을 하고 있다면 들키지 말고 비밀유지를 하라고 한다. 완전 볌죄 같이
첫 연이 뜻하는바 심상치 않다. 해적들이 숨긴 진귀한 보물이라면 해적들이 남으로부터 빼앗은 보물이 된다. 하지만 그런 무리들 중에서도 비밀유지가 잘 되어서 보물을 되찾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의 보물이 사랑이라면 더구나 영혼까지 전류되는 목숨을 건 지극한 참사랑이라면 누설하지 말고 발각되지 말라 했다. 비밀이 유지될 때 보물 같이 아름다운 것이니까. 비밀이 누설되어 각가지 수모가 따른다면 세속의 윤리와 규율의 위반으로 아름다워야 할 사랑도 추하게 전락되고 말기 때문이다. 영화제목 같이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놓치지 말아야 소중한 구절이 있다. 제목으로 올려놓은 완전범죄다. 그렇게 귀한 사랑도 해적의 보물 같이 남으로부터 훔친 사랑이리면 죄를 사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다만 완전범죄일 뿐이다.
넌지시 궁금증이 발동한다. 원로 시인이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어둠
 
 
한쪽 길은 하느님이
가지마라 하시고
다른 한 길은
사람이 못 가게 막아선다
알았다 내가 잘 알아들었다
하여 어느 길에도
들어서지 않고
눅눅한 흙바닥에
십 년도 백 년도 엎드려 있으마
한심하고 불쌍한 몰골로
숨만 쉬고 있으마
 
 
어둠은 눈 못 뜨는 자에게 드리운 장막이다 어둠은 깨어나지 못 한자의 밤이다. 진리의 길을 하느님이 가르쳐 주었지만 믿지 못하는 뭇 사람들은 그 길을 가지 마라 한다. 문제는 알아듣지 못 하는 먹먹한 귀다. 모르면 평생 고생한다는 시속의 비안양도 있다. 내가 잘 알아들었다면서 어느 길에도 들어서지 않고 눅눅한 흙바닥에 엎드려 살았다 한다. 한심하고 불상한 몰골로 숨만 쉬고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니다.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숨만 쉬고 있는 것과 같다. 광명의 빛이 기다리는 길을 알아듣지 못 하는 어둠이다. 귀머거리인가 보다. 알았다 내가 잘 알아들었다고 하는 경거망동이 일생의 길을 그릇되게 판단하였다. 세상에는 또 김문억이 같은 귀머거리가 있으니까.
 
 
시간에게
 
 
시간에게 겸손하기
시간의 식물원에 물 주기
시간 안에서 용서받기
시간의 탓으로 돌리지 말기
시간에게 편지 쓰기
시간에게 치유받기
시간 속의 꽃을 찾기
시간의 말씀 듣기
시간에게 고백하기
시간에게 참회하기
시간 안에서 잠자기
시간 안에서 오래오래 잠자기
훗날에 그리하기
 
그렇게 시간에게 모든 희 노 애 락의 권능이 있으므로 해서 시간과 더불어 시간 속에서 살다가 잠들고 보면 영원히 또 훗날에도 시간 안에서 그러하리라. 어느 누구도 시간 밖에서는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모든 일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시간의 식물원에 물주기를 하면서-시간과 물이라는 세월의 이미지 함수관계 설정- 시간 안에서 겸손하고 용서받고 편지 쓰고 치유 받고 말씀 듣고 꽃을 찾고 고백하고 참회 하다가 시간 안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다. 완강한 시간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 순종해야 한다.
 
시집 충만한 사랑은 5부로 되어 있고 오늘로 3부까지 37편을 같이 읽었습니다. 필사가 좀 힘들지만 감상하기는 아직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 쉬었다 가겠습니다.
 
 
 
주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두드려서 다시 불에 굽는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주물기법이
나는 무섭다
내가 저 쇠붙이라면
사랑도 버릴지 몰라
시앙도 버릴지 몰라
다만 영혼은 영생이니
수없이 불에 들어가
불에 굽히리라
 
 
천국을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 했겠는가. 얼마나 몸을 사리고 겸손하고 나를 내려놓고 죽고 또 죽어야 작은 바늘 귀 만큼 내 몸이 작아질까 그래야한 그 작은 구멍을 통과하여 자격을 취득한다니 말이다.
대장간에 가서 보면 수 천도의 불가마에 쇠붙이를 달구면 함마로 연신 두들겨 패기를 거듭하여 연모를 만들어 내고 있다. 화자는 그런 과정을 보면서 무섭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약에 자신이 쇠붙이처럼 그렇게 된다면 항복하고 말 것이라면서 자신의 신앙마저 의심하고 있다. 지극한 인간의 심성이다. 다만 영혼은 영생이니까 굴하지 않고 불 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굽히겠다고 했다. 연혼의 가치는 그만치 깊은 것이고 믿고 싶은 것이다. 주물을 다루는 대장장이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한 번 더 추스르고 있다.
사설시조 한 수를 찾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대장장이/김문억
 
 
쇳덩이를 火葬 한다
쇳덩이가 부활을 한다
 
텅텅
쇳덩이가 울부짖는 소리
백지장 같이 창백한 달빛을 찌르던 칼
남의 떡 베어 먹던 욕심 묻은 더러운 칼
녹나고 부러진 것들 부스러기 폐품들
불구덩이로 던져진 죄 노골노골 하도록 두들겨 패며 쇳덩이를 반죽하며 연장 제대로 만들어낸다
남루한 대장장이
 
예수의 재생 공장은
하루 벌이도 안 된다.
 
 
 
하느님의 조상
 
 
암암한 허공이
검은 새들의 날갯짓 사이로
밤눈처럼 내려 쌓일 때
내가
한 장의 종이로
추락하고 있었다
 
백날의 낮밤 같던
시간의 길고 뻑신 기력이 마침내 쇠잔하여
종이가 땅에 닿을 때
한 분 어른이
먼저 와 계셨다
 
누구신가
하느님의 조상이신가
젊고 아름다운
주님 그리스도가 아닌
늙고 자애롭고 지친 모습이나
압도하는 신비로움으로
분명 하느님이셨다
 
둘레가 천지개벽하여
아침으로 바뀌고
흩어져 있던 가련한 종이들의
멈추었던 심장이
일시에 맥박 쳤다.
 
시인 김남조는 수시로 하느님과 내통하고 있다. 그것은 행복한 신앙생활에서 얻는 믿음의 결과물이다. 우주 만물의 존재 앞에서 나라는 사람 하나를 가늠 해 보면 가볍게 내려앉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한 나는 가차 없이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 백날의 긴긴 세월과 뻑신 시간에 시달리면서 마침내 쇠잔할 즈음 한 분 어른이 먼저 와 계신다 했다. 나를 인도하는 분이시다.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그렇게 언제나 먼저 와 계시다. 시험을 줄 때나 기쁠 때나 사랑의 약속을 지켜주는 분이다.
예수도 하느님도 이미 우리 곁에 오래 전에 강림하셔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인도하고 있음이다. 허름한 시장 바닥에서 다리 밑 걸인 곁에서 고아원에서 옥탑 방에서 하느님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계시다.
내가 어떤 고난에서 허덕이다가 구원을 받았을 때 느끼는 환희는 천지개벽으로 온 둘레가 빛의 아침으로 바뀌고 가련한 종이들의 멈추었던 심장이 맥박을 치며 부활을 한다. 우리가 흔하게는 곤경에 처했을 때 부르는 입버릇도 ‘아이고! 하느님! 이고 뜻밖에도 우연치 않게 곤경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길 때 역시 ’아니고 하느님‘을 읍소하게 된다. 다 그런 얘기를 멋스럽게 시로 말씀하시고 계시다.
 
 
 
기도 연습
 
 
강하신 주님
주님께선 이기시고
저는 패하였습니다
하오니 이쯤으로 접고
주님과 제가
다시금 평온하길 바랍니다
주님께선
힘을 더 기르시고
저는 날마다 밤마다
지는 공부에
충실하겠습니다
 
기도 연습을 제대로 잘 하고 있다 주임 앞에서는 언제나 패자가 되어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 회개하고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즐겁게 하고 영광되게 하는 패배자다
강하신 주님이라고 했으니 믿음이 대단하다. 지고이기는 것을 이쯤으로 접고 다시 평온하자 했으니 패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믿음의 신앙에 의심이 있었고 갈등이 있어 힘이 들었다는 증거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순종하며 따르겠으니 평화가 올 것이었다. 그런 평화의 방법은 절대 진리인 힘 센 주님 앞에서 지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믿음과 순종이다. 작품 전편이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순국 용사들
 
 
국기를 한 치쯤 내리고
장중한 연주를 올리며
도열한 병사들이
오열로 바치는 묵념
그러나 이쯤으론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눈물 한 주름을
흘려주셔야 합니다
 
살려주소서
도와주소서
죽어 가면서 되풀이 되풀이로
탄원을 바친
가련한 당신의 자식이
이들 순국용사입니다
 
국기를 한 치쯤 내리는 경우는 최고 권위의 국가마저 당신 앞에서는 경의를 표한다는 겸손의 뜻일게다. 왜냐하면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기를 계양하고 조포가 울려 퍼지고 묵념을 올려 보아도 나라 위에 나라이신 당신의 눈물이 진정한 눈물이라는 뜻이다.
살려주소서
도와주소서
하고 절규하면서 부르짖던 음성도 분명 당신에게 올린 탄원의 외침일 것이다.
하느님!
 
주일 미사
 
 
천주교 성당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십자가 틀에 얹은 채
제단 정면에 모셔 둔다
 
기도소리 찬미성가 우렁찬데
한 분 구세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모습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이해 나를 버리시옵니까」
그 말씀 뿐이다
높고 높은 정수리까지 서려 있는
구제주의 고독은
홀로 장엄하다
 
죽을 때는 누구든지 혼자다 아니다 태어날 때도 혼자고 태어나서도 혼자다 쌍둥이도 나는 혼자다. 다만 더불어 살아 갈 뿐이다. 나는 아직 죽어 보지 못 했지만 그 죽음조차 어떻더라고 다시 살아 말을 해 볼 수가 없는 절대적인 처지다. 목숨이 다 하는 날도 웃으면서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싶은 것이 평소의 생각이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그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눈앞에 오면 평소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생길 것이다. 다만 죽는 자는 그 어떤 힘이 없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에게 의지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죽음까지도 삶의 마지막 완성의 단계라고 할 수도 있다. 성인 예수도 골고다 산상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를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독했겠는가
예수의 부활은 신앙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가 부활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있기 까지는 예수도 하느님의 큰 사랑의 뜻을 다 헤아리지 못 했으리라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이 해 나를 버리시옵니까
지금도 성당 단상에는 예수가 죽어가고 있다. 신자는 그 고통을 받아들여 같이 아파하고 회개하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서면 다시 일주일을 사는 동안에 알게 모르게 죄를 또 짓는다. 그런 가엽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는 늘 십자가를 벗지 못 하고 있다. 주일 미사다.
 
 
 
낙태아를 위하여
 
 
시인이 세상 떠나면
시의 올챙이들은 개구리 되어
개굴개굴 우는 일 못 하겠구나
하물며 모태에서 죽은
사람의 낙태아들
이를 어쩌나 어쩌나
 
사람은 잉태 순간에
몸의 짝인 영혼이
먼 데서 깃을 치며 온다는데
몸 없는 아가의 영혼
어이되나 어이되나
아가의 심장을 부풀리던
생명의 풀무는 누가 불 껐으며 이때
천둥도 아니 울렸는가
 
죄 없이 돌아가신
하느님께서
죄 없이 죽은 아가들을
품에 안으시고
천국으로가자 천국엔 죽음이 없다고
없다고 없다고
울며 달래신다
 
 
국가에서는 산모의 건강이 위태로울 때 낙태수술을 허용하고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살인이다. 시인이 죽으면 시의 올챙이들은 자라야 개구리가 되어서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데 모체에서 죽은 태아를 이에 비유하고 있다. 감동이다.
 
 
지진
 
 
사진 찍지 마십시오
티브이의 영상도 삼가 주십시오
모두 비켜 서십시오
침묵만 놔두십시오
지진의 파편 더미에서
살 터지고 피 마르며
죽은 이들입니다
절망이나 비통쯤이 아닙니다
훨씬 그 이상입니다
 
누가 갚을 죄일까요
혹은 하느님의 잘못일까요
그럴까요
 
 
지진 현장을 뉴스로 보게 되면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비극의 현장이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 아연 실색 할 뿐이다. 어찌 인간세계에 이런 가혹한 비극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찌 피할 수가 없는 불가항력의 위력 앞에서 사람의 존재는 더없이 작어지고 비참할 뿐이다. 지진은 어떤 계획도 이해관계도 선악의 갈등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방적이고 야만적인 자연재해다
사진도 찍지 말고 영상도 보내지 말고 다 저리 비키고 침묵하라고 한다.
사람이 감당할 수가 없는 큰 재난 앞에서는 자신도 감당 안 되는 트라우마로 실신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여북하면 이 세상을 지으시고 관장하신 하느님의 실수냐고 원망하며 들먹거린다.
 
 
 

 
 
올올이 숨 쉬는
생모시 한 필을
날이 선 가위질로 두 조각 낸 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도 혈관들의 피륙인걸
검은 손으로 잘라 버린
내 죄를 어이하리
 
천 길 벼랑에서
사람 하나 뛰어내리게 한 일
아니고
사람 하나 버려두고
내가 뛰어내린 죄여
 
아마도 백 번은
벼락 맞을 거야
 
혈관의 피륙 같은 사람의 마음도 올올이 숨 쉬는 생모시 한 필 같은 것이어서 미움의 눈빛으로 날선 가위질을 하듯 사람을 갈라놓는 일은 죄가 된다. 남의 처지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도 죄지만 불행한 처지를 모르는 체 외면하는 일도 죄가 된다. 남의 불행을 알고도 감싸주지 못 하는 죄가 더 크다.
 
 
내가 흘린 피를 닦아 내기보다는
남이 흘린 피를 닦아 내기가 어렵다
그 흔적 표 나지 않게 빨아두기는 더 어렵다
-김문억의 시 ‘하얀 스펀지’전문
 
하얀 스펀지는 늘 하얗게 빨아 두어야 한다. 남을 위해서 조금 수고 했다고 해서 그 흔적을 갖고 자랑하기 보다는 보이지 않게 실행하는 겸손이 미덕이다.
 
 
비통
 
 
비통도 양식이니
朝夕으로 내가 먹으리
바다 한자락이라도 삼키리
다음날 다음 날의
슬픔까지 줄지어 오렴
꼬리 긴 행군처럼 오렴
달빛 별빛도 없이 밤길에서
내가 기다려 섰으마
 
정녕 무량한 슬픔이거든
떼구름처럼 두둥실 오렴
먹구름처럼 검게 오렴
문 열고 내가 기다릴 때
어서 들어오렴
 
기쁨의 쌀 알갱이만이 인생의 양식이라 하지 못하리라
인생을 관조하는 철학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 한다면 기쁨만으로는 삶의 쾌락이 없을 것이다. 인생은 희 노 애 락의 징검돌 건너기다. 더구나 知性과 신앙으로 생의 마지막을 희구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황혼 길에서 조차 자신이 바라던 빛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화자는 지금 매우 고요하고 외롭다. 어찌 비통의 양식을 거역하겠는가. 비통은 쓴 음식이지만 식욕을 증진 시킬 수도 있다. 더구나 시인의 양식은 눈물도 탕약이다. 슬픔이 불행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고독하지 않고서는 예술을 승화시키기는 더 어렵다. 그런 절정의 고독에서 문제를 풀지 못 하는 경우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본다.
이쯤 되면 비통을 오히려 즐기려는 순교의 정신까지 보아야 한다. 달빛 별빛도 없이 밤길에서 내가 기다려 섰으마 했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무욕의 상태다. 차라리 비통의 도가니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 있다가 숙성이 된 뒤에 구원의 깨달음을 얻는 독한 술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으리
아, 진정 비통도 양식이라는 독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차복아 차복아
 
 
유년의 추억 그 골목길엔
공동 우물가에 빨래가 펄럭거리고
간간이 우체부가 다녀갔다
문둥이 부부가
어린 딸을 데리고 구걸 다녔는데
소녀는 백옥처럼
흠 없이 어여뻤다
그 아이를 잊을 수 없다
 
「차복아 차목아」라고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이웃집 할아버지가
핏빛 한 색깔의 노을 무렵이면
하늘을 향해
구령처럼 우렁차게
아들의 이름을 연호하던
그 음성을 잊을 수 없다
「차복아 차목아...」라고
 
 
그 시절은 6.25 전쟁으로 밥을 얻어먹는 걸인도 많았다. 살아가기가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거리나 마을은 참혹한 몰골이었다. 그래도 걸인이 삽짝 머리에 나타나면 우리 집 같이 가난한 집에서도 보리 찬밥을 차려서 내어 주면 얻어먹는 사람도 미안했던지 툇마루 끝에 궁둥이를 겨우 걸치고 앉아 밥을 한 술 뚝딱 뜨고 가던 모습이 선연하다. 더구나 문둥병자들이야 오죽 했겠는가 소록도가 생기기도 전이니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이 불행한 일가족이 떠돌던 때다. 몰골이 워낙 흉했으니 어린 딸내미의 고운 얼굴이 더 백옥 같이 보였으리라 안타까운 그 일을 어찌 잊겠는가. 더구나 우체부가 전해주는 전사 통지서 한 장으로 군에 보낸 자식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성하지 않은 사람이 또 몇 있겠는가. 어른들에게는 달리 무엇을 내세울 것도 없는 비극의 추억이 있을 뿐이다.
「차복아 차목아」
김시인이 오늘까지도 잊지 못 하고 특별히 차복이를 부르는 까닭은 어느 개인의 죽음이었다기 보다는 온 국민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며 차복이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 바쳤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자식으로 영면에 들아갔기 때문이다.
시문학은 말을 갖고 엮는 예술이다
예사로운 말도 잘 엮어 쓰면 구슬처럼 빛나지만 투박한 말이라도 적소적소에 잘 앉혀주면 詩語로 빛나게 된다. 언젠가 김문억의 시에서 사꾸라 라는 말이 들어간 시가 있었는데 어느 시인이 읽고 질문 아닌 투정을 부려왔다. 자신은 독도 지킴이 멤버라면서 왜 일본말을 쓰느냐는 것이다. 정말 황당한 일을 당했다. 그 사람은 무대나 영화를 보면서도 일본말 대사가 나온다면 항의 할 사람이다. 예술적 가치를 생각하기 전에 애국심이 발동했던 것인가. 나도 언제나 애국자다. 누구 못지않게 소리 없는 진한 애국자라고 자부하고 살아간다. 글을 쓰는 시인이라면 말로만 티 나게 체 하고 살아가지 말고 용감하게 작품으로 내 놓아야 한다.
최근에는 장애인 표현으로 글쓰기를 망설이는 이도 있는데 앞을 못 보는 이를 칭하여 봉사나 장님 같은 본래 쓰던 우리말을 쓸 수도 있고 귀가 어두운 사람은 귀머거리 말을 못 하는 사람은 벙어리라고 쓸 수가 얼마 던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시적 효과라고 하는 위대한 가치가 우선하기 때문이며 시문학의 승화는 말의 자유와 해방에서 얻어지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농 반 진 반으로 나에게 욕은 쓰지 말라는 주문에 “예” 하고 대답은 크게 했지만 동의가 안 되는 주문이었다. 본문에서도 시대적 배경과 어울리는 풍경 묘사로 문둥이 언어를 썼기 때문에 이 시에서 말맛이 더 확 살아나지만 요즈음 쓰는 표준말로 한센 병 아니면 나병 나환자 풍인 같은 말로 썼다면 시는 망가지고 만다. 시를 쓰는 매력 중의 한 가지다. 시는 비유와 은유로 만드는 보석 깎기지 설명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멀었던 신접살이 열일곱 살에
염병으로 죽은 서방 따라 죽을 걸
애비 얼굴 판에 박은 유복자나 키우면서
서러워도 서방 보듯 수절 할 것을.
-김문억의 ‘뻐꾸기’ 전문.
 
네 줄로 압축된 율시를 갖고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뻐꾸기의 구성진 소리에 담아 보고 싶던 나의 초기 작품이다. 40년 전 얘기다. 신접살이 염병 서방 유복자 서방 수절 같은 토속적 언어가 나온다. 뻐꾸기 소리에서 유출한 시어들이다
 
 
 
좀 쉰다
 
 
최선 못다 하고 좀 쉰다
상처 자국에 손을 얹고
잠시나마 기도한 후에 좀 쉰다
오늘은 울고 나서
좀 쉰다.
 
문장은 좀 쉰다고 했지만 좀 쉬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 못했으니 좀 쉬자고 한다. 최선은 다 못 했지만 지금까지는 열심히 살아왔다는 전제가 된다. 더구나 상처 자국까지 있으니 어영부영 살아 온 삶이 아니다. 2步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아니면 思考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울고 나서 좀 쉰다 했으니 반성하는 고요의 시간이다. 하루의 노동이 끝난 뒤에 석양이 벌건 얼굴을 하고 서산너머로 쉬러가는 풍경이 떠오른다.
문득 유달산 계단이 생각 난다
아주 오래 전에 유달산을 오르는데 계단 중간쯤에서 두 계단 정도가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가게 만든 곳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좀 쉰다’ 였다.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한 오르막길이었다. 영화를 보아도 중간에 다른 영상으로 좀 쉰다가 있고 긴긴 드라마를 시청할 때도 중간에 좀 쉰다가 있다.
시계
 
 
그대의 나이 구십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테지 그럴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다.
 
 
시계라고 하는 세월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속과 겉을 솔직하게 표현 하고 있다
앞부분은 이상적 고백이고 뒷부분은 현실적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면서 이상적이고 선한 고백을 선택하고 따르지 못 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주는 점수는 언제나 100점 이하다 현실이 이상을 따르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자책하는 시다
잠시 후 대답을 수정한다는 일은 어차피 사람은 표면과 속내의 이중적 사고 속에서 속물같이 실수하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숨기지 못 하고 고백서를 제출한다는 일은 대단한 용기다. 그렇게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만 하더라도 우등생이다.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테지 그럴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테지...과연 나는 그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는가 하는 자책으로 자신이 자신을 조롱하는 말이다.
그 순간에도 시계는 하마 저만치 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일종의 경고다. 자신이 이상으로 추구했던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 하여 시계가 나를 따라 오라고 한다. 세월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유행가 가사 같은 고장난 벽시계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 이야기
 
 
시 쓰다 버린
여러 구절들이 생각난다
관절이 삐걱거려 피와 살을
입혀 주지 못했었다
나 역시도
누군가의 실패한 문장일 수 있고
나를 버린 그들의 판단은
지당했으리
 
세상이 적막해진다
적막의 병정들이 구름처럼 몸 부풀리면서 온다
아니다
고요함은 탁월한 능력
사람은 소란으로 가득차 있어
어지럽다
사람은 어지럽다 맞다
 
사람에겐 은총이 있다 못다 부른 긴 악보의
찬미 가가 있다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
전류가 흐른다 맞다
 
사람에겐
주야로 고여 오는
눈물이 있다
사람은 측은한 존재이다
측은하다 맞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일
한 번쯤은 나쁘지 않다
맞다 맞다
 
 
시 쓰는 일과 일상의 일이 같다는 이야기다 글은 그 작가의 거울이라고 했다 고통의 신음 소리를 작품에 다 표현하지 못 하고 버린 파지가 마치 사람을 버린 듯이 미안스럽고 마음 아프다 한다. 때문에 나를 버린 그들의 문장도 이해가 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시적 대상으로 충만하지 못 했으니 지당하다고 받아들이며 미안해한다. 시가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시다
세상은 고요하지만 고요함조차 탁월한 능력이어서 고요 속 사람 들은 소란으로 가득 차고 맞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지럽다 한다. 조물 주와 피 조물주 간에는 전류 같은 교감이 이루어져서 무진장 나오는 명주 실 같은 악보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선택 된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삶의 노래를 다 토해내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는 시다. 사람 사는 이야기지만 자칫 놓치기 쉬운 구절이 마지막에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일
한 번쯤은 나쁘지 않다
맞다 맞다
 
자칫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다. 인생은 단 한 번의 승부로 태어난 목숨이다 한 번 이상 살아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때문에 한 번쯤 사람으로 태어난 일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맞다 맞다 했으니 나쁘지 않은 것은 좋은 일로 치부해도 된다. 때문에 사람으로 선택되어서 태어났다는 일은 좋은 일이고 죽음까지 다 포함하여 삶의 완성을 이루는 이 세상은 한 번쯤 살아볼만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천국이 바로 여기다 .
 
 
 
심각한 시
 
 
심각한 시는
편한 의자를 우리에게 권해 주며
좀 쉬게 좀이 아니고
오래 쉬어도 되네라고
나직이 말한다
 
민망하게 연민스러운
사람의 삶을 그는 알기에
위안이 모자란다
사랑이 모자란다고
그 자신의 잘못인 듯
통한의 가슴을 친다
 
심각한 시는
분장하지 않으며
훈장을 탐하지도 않는다
 
밥과 물처럼
이숙한 일상이면서
쉬라는 말을 자주 건네 준다
쉬면서 살아가고
쉬면서 사랑하고
쉬면서 시를 쓰라 한다
 
심각한 시는
밤과 새벽 사이의
어둠이자 빛이다
처음 듣는 신선한 독백이며
문 앞에 와 있는
영혼의 첫 손님이다
 
시인은
그를 연모하게 되면서
고통스럽게
언제나 배고프다
그러나 영광스럽다
 
 
심각한 시는 아무렇게나 쓴 시가 아니다. 그야말로 읽는 사람을 작가의 심장으로 끌어들여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 고달픈 발걸음을 편히 쉬게도 하며 무엇인가 모자라는 부분을 알기에 통한의 가슴을 치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심각한 시는 미사여구 같은 화장품으로 분장하는 짓을 꾸미지 않으며 되지 않는 문학상 같은 훈장을 받기위해 단상에 오르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밥과 물처럼 일상이면서 쉬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중동의 진리다 시를 쓰는 것 갖고 문학 외에 어떤 영달을 위해 숨 가쁘게 쫓아다니지 말라 한다. 쉰다는 말씀은 비우라는 의미와 같다. 비워야 투명하고 맑은 물이 차고 넘쳐서 더 많이 얻을 수가 있다.
심각한 시는 어둠을 물리치고 아침 해를 끌고 오는 여명과 같은 시다 어둠이자 곧 빛이다. 작품에서 말하는 심각한 시의 의미는 이에 이르지 못 하고 있는 시인의 반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남이 말하지 못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창작은 처음 듣는 신선한 독백이며 비로소 문 앞에 와 있는 영혼의 첫 손님이다. 최선을 다 하는 예술은 혼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고로 자칭 시인이라면 첫 손님으로 오실 영혼을 연모하면서 고통과 배고픔을 체험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은 영광이다. 시 쓰기는 취미나 여가선용이 아니다 참으로 고독해보지 않고서는 편히 쉬게 할 수 있는 좋은 시를 출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인의 길에 대한 매서운 회초리를 맞는 중이다. 오금이 저려오도록 이 시대에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 따끔하게 맞아야 할 잠언이다.
 
 
 
젊은 시인들에게. 1
 
 
젊은 시인들아
그대는 빠르고 사나운 표범을
그것도 여럿의 표범을
그대의 시 안에 기르고 있다
 
그대는 높게 빨리 말하고
나는 느리게 중얼거린다
그대는 부상負傷의 상습자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누군가의 살결에
부벼 바른다
 
그대의 시는 나에게 충격을 준다
그대의 총탄에서 흩어지는 탄피가
내 감성의 살결을 뚫을 때
나는 야릇한 낭패감과
유쾌한 상찬으로
그대에게 되갚곤 했다
 
그대는 젊다
그대는 시인이다
이로써 다 되었다.
 
 
젊음은 패기다. 용감하고 진취적이다. 누구나 가슴에 표범 같은 마음 다 갖고 산다. 젊은 작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정의롭고 진실해야 하는 시인의 자세에서 젊은 시인이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옳은 것은 옳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용감하지 못 하면 발전이 없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서 원로 입장에 있는 선배시인들이 상처를 입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대는 젊은 시인이다 이로써 다 되었다 하고 긍정하는 것은 젊은이 중에서도 시인의 길을 가는 작가에게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문학 얘기는 아니지만
젊어서는 방황하라
이어령 교수의 강의 내용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반기분 선생이 대권을 앞에 두고 젊은이들 앞에서 말 했다가 인기 떨어진 말이 되고 말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 옛날 얘기만 한다고 해서 타박 맞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삶의 가치를 생각할 때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젊음은 그만큼 희망으로 보상받은 위치고 웬만한 잘못은 용서되고 통과할 수 있는 긍정의 해바라기다
 
 
 
젊은 시인에게. 2
 
 
그대는 오늘도
밤의 불침번으로
불 꺼진 도시풍경을 응시한다
낭만과 고독을 노래하며
시대의 불행을 번뇌한다
그대의 천직이다
 
서슬 푸른 문자로
세상사 아흔아홉 가지의 부조리를
시로 쓰는 그대
이 시대의 피리이며
순정의 곡비哭婢여
 
바라건대
부조리와 낭패감
살결 베이는
분노와 좌절에도
발 구르며 세상을 꾸짖지 말고
허리를 구부려
그 짐을 지거라
 
날 선 해부도로
가혹하게 그 자신을
점검하면서
멀고 먼 시인의 길을 찾아가는
젊은 시인들아
그대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시인의 천직이 그렇다. 불 꺼진 도시 풍경을 응시하면서 시대의 불행을 번뇌하고 고독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천직이어야 한다. 어떤 의무나 결기 같은 것까지 다 안고 가야하는 위치다. 어찌 보면 선구자적 자세까지 갖고 가야 한다. 시절을 노래하고 자연을 노래하지만 누구보다 더 시대를 아파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것을 웅변하고 앞서서 나가야 한다. 격변의 시대가 많았던 현대사 속에 살아가면서 시인의 길을 가야 하는 위치가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시라고 하는 학문의 길은 서슬 푸른 문자로 외치는 구호가 결코 아니다 낮은 자세로 허리 굽혀 그 짐을 짊어지고 가라 했다. 비폭력의 독립을 외치던 간디의 물레가 생각난다. 칼 같은 날 끝으로 외마디 소리를 치더라도 언어의 웅변은 비폭력이어야 하고 어름 장 같이 차고 가혹하게 자신을 진맥하기 바란다. 젊은 시인이여.
한 편 김시인의 이런 외침은 나는 젊은 시절에 그와 같은 시인의 길을 걷지 못 하였노라 고 젊은 작가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시 학습. 1
 
 
나의 시는 애벌레들의 비애와
그 생존의 지혜를 모른다
나의 시는
격심한 아픔의 체험이 없고
단두대에 선
사형수의 심정을 모른다
나의 시는
고뇌와 탐색이 보족하고
나의 시는
감상과 회고주의에 부침하며
세계와 미래에 관해 무지무능하다
고작 부족하다 부족하다고
자주 탄식한다.
 
 
작품 전체를 아우를 때 마지막 장 고작 부족하다 자주 탄식한다 라고 하는 겸양의 시고 읽어 주어도 좋을 것 같다. 제목이 시 학습이고 보면 작가는 누구나 평생 시를 써도 습작기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예술품에 환성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고 언제나 학습하는 습작으로 생각 할 따름이다. 다만 나방이가 되기까지의 과정인 애별레의 비애와 생존의 지혜를 다 간파하지 못 하고 세월이 갔다는 겸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단두대에 선 사형수의 심정을 모른다는 얘기 역시 고통과 슬픔 따위를 모두 절실하게 체험하지 못 했다는 자조의 말씀이다. 어느 전문 분야도 결과에 가서는 늘 자신의 노력이 모자랐다는 후회가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나에게 시를 눈 뜨게 해 준 서벌 선생님의 시집 제목 역시 ‘습작 65편’으로 되어 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쓴 작품집 이름이다.
 
 
시 학습. 2
 
 
현란한 어휘, 안 된다
나태한 정신, 안 된다
연민과 우수의 결핍, 안 된다
희망의 촉매가 없다, 안 된다
유약한 감상, 안 된다
 
뿌리부터 살핀다, 된다
간절해서 고통스럽다, 된다
상념의 심도深度와
정직한 개성을 지향한다, 된다
깊고 멀리 보는 시력을 학습한다, 된다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된다, 된다
 
시 학습을 이렇게 하시겠다고 하니 대단한 결의다
구태여 달리 토를 달 필요가 없는 대단한 시창작 강의다
 
 
노래
 
 
깃털 고운 새
노래도 곱디고운 새
책갈피 속에 오래 간직하였더니
노래는 목쉬어 잦아들고
하르르 하르르 깃털에 남은
아련한 글씨
 
작가 자신이 새가 되어 본다
새처럼 노래했던 나의 시편도
새의 목소리 같이 변하지 말기를 바랬지만
세월과 함게 퇴색하고 있구나
 
 
시지프스의 딸들
 
 
시지프스의 딸들아
일손을 멈추고 얼음냉수로 해갈하여라
북소리 울리는 가슴 편히 숨쉬고
접었던 날개도 부채처럼 펴거라
 
운명의 사나이를 만나거든
서로 깊이 사랑하고
백일하白日下에 혼인하여라
못 견디게 사과가 먹고 싶거든
원 없이 먹고 그에게도 주어라
낙원에서 쫓겨나면
낙원 밖에서 새 낙원을 이루어라
 
그간엔
늙고 죽는 일이 안 되는
신화 속의 혈통이었거든
이제는 사람의 순리를 따라
못해 본 그 일들을 해 보거라
 
무궁세월에
날마다 돌을 굴려
산 위로 올리는 시지프스
그 아픈 뼈에서 태어난
노동의 딸들아
여자 시지프스들아
삶은 아름답고
세상은 좋은 곳이란다
정녕 그러하단다
 
시지프의 딸들이란 시를 통해서 김남조 시인은 마침내 이 곳 지상을 천국으로 인식하기 시작 한다
죄의 값으로 평생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굴례 속에 있는 시지프스의 딸들에게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형벌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편히 쉬라고 한다. 어떻게?
늙고 죽는 일이 안 되는 신화 속의 혈통이거든 해방되어 사람의 혈통으로 돌아가서 자유로운 사랑에 빠져보는 운명의 줄을 잡으라고 한다. 아픈 뼈에서 태어난 노동의 여자 시지프스의 해방을 외치고 있다. 유혹의 사과가 먹고 싶거든 실컷 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면 낙원 밖에서 새 낙원을 이루라고 한다. 삶의 진정한 가치는 자유에서 얻어진다는 진리를 외치고 있다. 그것은 신화가 아닌 지상에서 가능한 일이며 지상의 진정한 삶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가 천국이다.
 
 
화가畫家
 
 
그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담아
사랑하는 동생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한적한 밀밭에서
제 가슴을 총으로 쏘았으며
중상을 입고
사흘 만에 사망했다
 
백이십 년 후
그의 작품이 전시된
한국의 한 미술관에서
어린 학생들이
명작名作 수업을 하고 있을 때
한 여성 노인이 손에 든
화집 표지에
‘반 고흐’라는 이름이
빛살처럼 읽혔다
 
 
모든 예술적 가치는 당대에 인정받기 보다는 세월이 흐른 뒤에 후학의 전문가적 판단에 의해서만이 그 사람의 가치가 평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값이 된다. 화가뿐이 아니다. 예술적 가치는 한 시대를 건너뛰는 후학들의 가치판단에 따라 더욱 빛나게 된다. 당대는 피차간에 작품 외적인 요소로 인해서 순수하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하는 경우가 흔하다. 세월이 가고나면 작가의 발길이나 숨소리가 멈추고 나서 진정으로 작품만 남기 때문이다.
화가가 자살을 할 때 까지는 자품에 대한 고뇌와 함께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하여 갈등이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자신이 그렸던 그림에 대한 모든 열정을 쏟아 붓고도 무엇인가가 더 채워지지 못하는 좌절의 벽에 부딪쳐 자살이란 것을 책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에 미쳤을 때에 나는 사람으로 쓸모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살고 싶은 집
 
 
나지막한 산기슭
숲 하나 가까이 있는 곳의
집 한 채.
좋은 책들과 안락의자 몇 개
간혹 울리는 전화
정다운 손님 몇이 왕래하고
음악과 영상기기
「예수의 두상」작품 하나
꽃은 사방에서 피고
마음에도 피고
 
죄 없이 살면서, 는 아니고
가급 죄짓지 않으면서
나 혼자여도
은혜롭게 살아갈
그런 집 한 채
 
 
사람은 인생 황혼기에 이르고 보면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한 번쯤 설계 해 본다. 김남조 시인이 바라는 집도 보통은 누구나 바라는 그런 집이다
나 혼자여도 은혜롭게 살아 갈 수가 있다는 것은 ‘예수두상’ 작품 탓이리. 그래서 죄 없이 살면서는 아니고 라고 한다. 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어서 가급 죄짓지 않으면서 살겠다고 했다.
김남조 시인은 아직도 좋은 책과 음악 영상기기 가 있는 집을 원하고 있으니 작품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대단한 분이라는 증거다.
 
김문억이 살고 싶은 집-
뒤로 야트막한 산이 있는 조금은 언덕배기가 좋다. 그래야 앞을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주방과 거실 침대가 같이 있는 한통속 한 칸짜리 작은 집이면 좋겠다. 누워서도 하늘이 보여야하기 때문에 커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멀리 앞으로는 탁 트여서 들과 냇물 혹은 강물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는 평야가 있으면 좋겠다. 사계절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차고 이우는 달을 봐야겠다. 가끔은 기차가 지나가고 기차역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아들딸을 볼 수가 있다. 책은 없어도 되고 컴퓨터와 tv만 있으면 한다. 책은 시력이 못 따르지만 컴퓨터 글씨는 내가 조절해서 읽을 수가 있다. 산이 많으니까 화분 따위는 따로 안 기르겠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느티나무를 한 그루만 심고 대빗자루를 사 두겠다. 지나가는 몇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의자가 몇 있다면 좋겠다.
 
 
판결
 
 
사건번호도
판결문도 없는
문서 한 장이
미끄럼틀을 타고
배달되었다
 
「너무 늦었다」
「많이 잘못 했다」
「왜 그랬니」의 다음 구절은
「그러고도 살고 있니」이다
 
새벽 눈 같은 소금이
솰솰 뿌려진다.
 
 
화자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재판 해 보고 있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다 자신의 양심으로 만든 저울대에 자신의 일생을 올려놓고 죄의 무게를 가늠 해 본다. 진정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 볼만 한 재판이다. 그동안 살아 온 인생 기록이 가슴 속 블랙박스에 들어 있기 때문에 증거는 충분하다. 사건 번호나 판결문이 있을 수가 없다 미끄럼틀 같은 세월을 타고 내려오는 문서 한 장이면 된다.
그러고서 피고는 자문하는 반성을 중얼거리고 있다.
이렇게 -
 
「너무 늦었다」......잘못을 갚기에는 살아온 날 보다 남은 시간이 없다
「많이 잘못 했다」...... 진작 재판을 해 봤으면 그나마 죄를 좀 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랬니」의 다음 구절은------대답할 수가 없는 후회다
「그러고도 살고 있니」이다...... 자책하고 있다. 어쩌랴 그러고도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작품의 깊이가 있으면서도 조금은 골재미가 들어간 희극적이다. 새벽 눈 같은 소금이 솰솰 뿌려진다 했으니 아무래도 나를 더 김장배추처럼 소금 절여서 뻣뻣한 기를 죽이고 옥살이를 한다거나 아니면 능력으로는 잘 안 되고 있으니 옴 붙은 재수라도 떨쳐 내야 하겠다는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행간의 스승
 
 
어둠뿐인 어둠 없고
빛만 있는 빛도 없으리
어둠엔 빛의 가루 사금처럼 뿌려지고
빛에는 검은 씨앗 촘촘하리
사랑한 이는 지쳐 눕고
사랑받는 이는
그 사랑 갚으려고
귀로歸路에 있는지 몰라
 
한 분 스승이
어둠과 빛의 행간에 계시어
지혜의 책 한 권씩을
나눠 주시는지 몰라
 
그래도 인간은 살아 있음에 살아야 하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여기 있다. 빛과 그림자 그 행간에는 분명 님의 지극하신 관심이 사이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 계심의 확신이다. 지혜의 책 한 권은 바로 인생을 관장하는 스승님의 말씀으로 행간의 스승이란 살아가는 굴곡 마디마디에 스승님이 왕림하신다는 진리이기도 하다.
 
 
 
간절하다
 
 
비는 거대한 분무기로 뿌리는
물의 가루이련만
어둠은 바람갈퀴 타고 다니는
유랑민의 혼령이련만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한다
 
알아들을 듯
못 알아듣겠는 이거
말인가 울음인가
먼 곳의 웃음소리인가
 
한데 내 가슴 왜 이리 에이나
왜 전율로 응답하는가
유언遺言이듯 告愛이듯
간절하고 간절해서
나 못 살겠다
 
 
자연의 소리에서 말소리를 듣고 있다.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알아들을 듯 못 알아듣겠는 이거 비바람소리마저 유언이나 고애처럼 간절하게 들려온다. 그냥 듣고 지나칠 수가 없다. 넋두리 아닌 푸념으로 들리지만 실은 자연의 소리와 대화가 트이는 희열의 기쁜 소리다. 이렇듯이 사념의 깊이가 더 하면 자연의 운행 소리도 혼령 소리로 듣는다. 오래된 나무에서는 나무가 하는 음성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지금 시속의 나이로 보나 문단의 연륜으로 보나 매우 넉넉하고 단단한 오래된 나무임에 틀림없다.
 
 
 
누구인가
 
 
내 의식의 터널을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는
저 사람 누구인가
내 한평생의
여러 낮밤이 다녀갔는데
「그래 여러 밤낮이 다녀갔지」
그 의식과 무의식의
통로를 거쳐 가는
저 사람 누구인가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몰라도 좋을」
내 시공의 어디쯤에서 어디까진가를
왕래하는 저 사람
 
말없이,
그러나 모든 소리와 울림이
그의 할 말인
저 사람
 
 
나의 누구인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사랑하고 관장하시는 주님을 이야기 하는 것은 물론이다. 늘 함께 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의식의 터널을 느린 걸음으로 함께 했다고 한다.
의식과 무의식까지 통 털어서 여러 낮밤을 다시 묶음표로 밤낮으로까지 다시 지나치는 말로 강조하는 것은 작가의 탁월한 작법의 기교다
내가 믿으면서 나를 책임지고 있는 분의 사랑의 손길이기 때문에 내가 몰라도 좋을 저 사람이다
 
 
 
후기
 
김남조 시인이 제시한 이 책의 중심사상은 나라고 하는 인간존재와 나를 지으신 신과의 끝없는 대화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자신이 믿는 절대적 신앙을 찬송하고 있다.
작품의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문장은 짧고 의미는 길다. 원로 시인답게 말 줄임의 사고하는 깊이가 편 편마다 차고 넘친다. 군말 필요 없이 시문학이 지향하는 생략의 건너뛰기로 읽는 이가 많이 생각해야 한다. 역설적인 반어법으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조차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고 정감이 간다. 시문학을 하는 이로서는 교과서적 가치가 있다.
내가 왜 이 책을 필사하고 싶었는지 다 읽고 나서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작품의 표현 기법이 나의 시조문학 창작기법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물론 나의 작품 품격이 김남조 시인을 따라 가기는 어렵지만 작품 전체를 다른 이야기로 비유하는(알레고리)표현법이 나랑 흡사하다는 그 말이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 것 같아 문득 이 시를 다시 시조형식으로 바꾸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조문학을 하는 나로서 큰 공부가 되었다.
아흔 살 김남조 시인, 18번째 신작 '충만한 사랑'
올해 만 90세를 맞은 김남조〈사진〉 시인이 최근 새 시집 '충만한 사랑'(열화당)을 냈다. 1950년 등단 이후 열여덟 번째 신작 시집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