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드림
김 진 양
겨울이 지나갈 무렵 어느 날 우연히 인스타그램(Instagram)을 열어보니 샌디에이고에 사는 조카 유미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보낸 날짜가 이미 닷새나 지나 있었고, 봄이 되면 이모와 이모부를 보러 아기 둘을 데리고 샌 프랜시스코에 사는 제 언니 유리와 함께 방문 오겠다는 내용이다. 이미 며칠이 지난 터라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서 환영한다고 바로 답신을 보냈다. 무작정 대답을 해놓고 그로부터 이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밤낮으로 큰 숙제가 되었다. 젊었을 때와 달리 사소한 일에 신경이 많이 쓰이고, 그로 인해 잠을 설치면 다음날이 무척 피곤하고, 게다가 돌봐야 하는 동반자가 있으니…! 이삼일 고민하다가 밴쿠버섬에 사는 큰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희 이종들끼리는 코로나 유행 시작한 해 봄에 하와이에서 만나 일주일 동안 휴가를 보낸 일이 있었고, 그때 유리는 뉴질랜드에서 왔다. 또 지난가을에 아들이 출장 기회가 있어서 유미 가족을 방문한 일이 있었으므로 본인도 반갑다며 내 청을 받아주어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을수 있었다.
조카들이 여행 계획을 구체적으로 정한 뒤에 뉴욕에 사는 내 동생도 합류하도록 제안했다. 동생 제인은 고운 목소리를 갖고 태어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음악 공부가 소원이었으나 어린 시절 사정이 여의지 않아 꿈을 접고, 일반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 하던 중에 1976년 나의 초청으로 밴쿠버에 이민 오게 되었다. 몇 달 뒤에 지인의 소개로 한 남성을 만나 결혼하고 그의 직장을 따라 에드먼턴에 정착해서 딸 둘을 가졌다. 고집, 아니 집념이 매우 강한 내 동생, 어떻게든 자기의 꿈을, 자녀들을 통해서라도 이루어 보려고 애쓰던 중이었는데 딸들이 14살, 12살 된 해에 갑작스레 남편을 하늘나라에 보내는 엄청난 일이 생겼다. 홀로 남아 갖은 애를 다 써서 딸들을 고교 졸업 전에 뉴욕에 있는 쥴리아드 음악학교 (Pre-College)에 바이올린 전공을 위해 입학시키고, 본인의 뜻대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자 1996년에 거주지를 미국으로 옮겼다. 보호자 신분으로 살면서 경험이 없는 일들을 하며 홀로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일이 힘겹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딸은 어려움 속에서 장학금과 학자금 빚( Student Loan) 을 써 각각 대학원 과정까지 마치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각자 가정을 이루고, 심포니 단원으로 연주하며 가르치며 생활 기반을 잘 닦아가고 있다. 동생은 늘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서 뉴욕주 훌러싱에 있는 퀸스 장로교회에 출석했고 그에 속한 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십 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주일 성수뿐 아니라 성가대원으로, 또한 교회도서관에서 봉사하다가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모든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한다. 그런 가운데 권사직임을 받는다는 소식에 주님께 감사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ipad을 선물해줌으로써 손 편지 쓰는 대신 인터넷으로 국제 통신을 좀 더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 미국 국경을 벗어나면 다시 입국할 수 없던 상황이어서 이십여 년이 넘도록 고국 방문은 고사하고, 제2의 고향 캐나다 국경도 건너지 못하다가 마침내 작은딸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발급받아 꿈꾸던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 이번에 밴쿠버 방문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난 날 만났던 것은 15년 전 큰딸의 결혼식이 Lake Tahoe에서 있어서 참석했을 때였고, 그 사이에 동생은 칠십 대 후반이 되었다.
동생과 조카들이 각각 도착하여 마련된 숙소(B&B)에 짐을 풀고 밴쿠버 일정을 시작했다. 날씨가 꾸물거리긴 했지만, 가끔 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춰주어 감사하며, 짧은 일정 동안 보고 싶은 친지들 만나보고 악기도 같이 연주하며 즐겁게 지냈다. 일 세대는 지나고 이제는 이 세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경험이 되기도 했다. 조카들이 에드먼턴에서 자라는 동안엔 만나기가 쉬웠지만 성인이 되고 지역이 멀어지고 각각의 생활이 있어 마음은 있어도 만남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 조카들을 안아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팔 개월 된 조카 손주를 품에 안고 있으니 스르륵 잠이 든다. 헤어지기 매우 아쉬웠고, 다음 방문 때는 시간을 좀 더 넉넉히 잡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