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으로 본 그림자/김문억
잃어버린 봄, 80년대.
개인적으로는 깨진 사금파리를 맨손에 쥐고 뛰면서 인생의 환승역을 찾아 헤매던 시기였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내 방에 엎어져서 한 없이 울었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제법 무거운 질문을 던져 놓고 답을 얻지 못 하던 때다. 조화가 아름다운 네 식구와 함께 건강한 육신과 먹을거리가 부족하지 않던 생활이었지만 남모르는 허기로 늘 가슴 한편이 비어 있었다. 어지럽고 더운 바람이 가슴 깊은 곳에서 휘몰아치던 때다
억지로라도 무엇이고 토설을 하고 싶었지만 대답이 궁색하고 내가 너무 작았다 내 스스로가 참으로 불쌍했다 적어도 지금 보다는 좀 더 키가 크고 넙적한 잎이 펄럭이는 큰 나무여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 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울음 우는 머리맡에 집사람이 성경책을 놓고 나갔다. 그 무렵 중앙일보 신문을 보다가 발견한 시조 지면이 우연히 눈에 들면서 나의 시조문학은 참말로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눈 꽉 감고 한 번도 소리치지 못했다
창살 없는 옥살이 무서운 사슬에 묶여
애타게 나울거리는 수화로 흘러갔다
한 겹 걷히지 않는 깊은 장막에는
종내 막을 수 없는 삼탄강(森歎江)이 넘치고
돌아갈 영혼 한 점이 햇살을 켜고 있다.
다 퍼내고 엎어진 바가지 내 무덤가에
바람이나 핥아 먹고 한 백년 또 늙으리니
우리가 인연을 두고 생사(生死)로는 가늠 말자
모스크바에서 온 그는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애초부터 짧은 혀에 이빨은 다 빠지고 한여름 학질에 떨며 두터운 외투를 입고 거리에 나와 태양을 등지고 서성거리다가 해 기울면 골짜기로 사라지는 비밀 아무도 모르거니와 주로 빌딩 숲 속에서 난장이로 기어 다니며 엿듣다가 바람결대로 따라 눕고 천추유한 따위 묻지도 않더니 급기야는 깜깜한 무인도에서 극도로 쇠약하여 체중은 제로 상태 시력도 0 점 이하, 이놈의 세상 우라질놈의 세상 여기도 내 살 곳 아니라고
밤마다 슬픔을 꿰어 별빛으로 달아 올린다.
「그림자」전문. 김문억 시집『문틈으로 비친 오후.1985.동환』중에서
암울한 시대의 틈 속으로 비쳐오던 그림자의 잔영을 지금도 뒤집어쓰고 있다.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 장마가 왔다. 나의 시조문학은 숙명적으로 암울할 수밖에 없는 군부독재 시작과 함께 출발했다 동대문 언덕 6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거리는 어둡고 칙칙했다. 거리엔 사이렌이 자주 울리고 군용 앰블런스가 자주 지나갔다. 운명치고는 묘한 만남이었다. 문틈으로 내다 본 바깥세상은 그림자마저 자갈을 물린 벙어리였다. 어제는 닥터박이 암으로 죽고 오늘은 김변호사가 옥사를 했지만 국정교과서를 따라 읽으면서 질문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 전횡이었다. 밑그림도 그려보지 못하고 겉모양만 보고 달려든 시조쓰기는 한참을 지나서야 인기가 없는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될 만큼 숙맥이었다. 역사적으로 시조(時調)라는 이름에 값 될 만한 작품이 이호우의 바람 벌 외 몇 편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회의했다. 도봉산 속으로 들어가서 종일 시조를 쓰고 늦은 시간에 산 속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시조집이 「그림자」작품이 들어있는 『문틈으로 비친 오후』다.
처음부터 단시조 연작과 사설시조를 묶는 일도 관념과 주정(主情)에서 탈(脫)하고 싶던 실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파격이 아니라 자유로운 확대였다 옛사람도 잔칫집이나 기방에서 흥이 도도하면 소리를 하다못해 춤을 추었으리라. 표현의 방법 중에서 가장 빠르다는 춤과 소리를 글로 마무리 한다는 일이 얼마나 멋스러운 일인가. 세 수를 쓰고 나서도 내 가슴 속에서는 또 다른 소리가 우렁우렁 솟구치고 있었다. 아직 토할 것이 더 남아있는 활화산의 용암 같은 것이다. 차고 넘치는 흥을 어찌 감당할 수 없어 사설로 길게 풀어냈던 것이다. 이는 시조가 지향하는 생략과 절제의 균제미와는 또 다른 표현의 방법이었다. 문학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끼와 흥의 소산이다. 시조형식 속에서 굿거리장단으로 무당이 되고 광대가 되고 싶었다. 시소를 타다가 널도 뛰고 덤블링을 하고 싶었다. 이를 두고 무슨 이유와 까탈을 부린다면 그는 이미 문학이라고 하는 질펀한 판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첫 시집 첫 장부터 사설시조를 올렸다. 그만큼 매력적이었고 나의 입놀림과 잘 맞아 떨어졌다. 전두환의 구둣발 소리를 풍자하기에는 사설시조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나의 시풍은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시조이기 때문에 그렇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혼자서 그냥 무진장 썼다. 시조를 쓰는 자체가 너무 행복해서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더 많이 공부하고 쓰고 싶어서 늘 혼자였다. 문틈으로 비친 오후 전편이 다 그렇게 엮어졌다.
시조를 만나기 이전부터 나는 지독하게 촌스러운 토종이었다.
시조가 우리 것이라는 겉모양만 보고 처음부터 홀딱 반해 마치 편식을 하듯 파고들었다. 하지만 막상 시를 좋아하는 일반 독자들은 시큰둥하는 편이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런 결과엔 분명한 까닭이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미치면서 막연하게 관습적으로 따라서 작업 해 오던 단시조 연작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었다. 세 수 내지는 다섯 수까지 반복되는 같은 길이의 반복 리듬은 작품성을 떠나서 지루하여 읽는 재미를 잃는다.
나 역시 막연하게 단시조 연작을 쓰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지만 그 연작쓰기가 시조문학을 한 번도 한국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지 못 하는 이유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시조는 단시조 쓰기로 다시 돌아가야 하다는 생각이다. 인터넷네트워크 속에서 스마트폰 시대를 맞는 지금은 더 없이 좋은 시기다.
스스로 던져보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한 실험으로 그림자를 쓰던 초기부터 나의 패기는 매우 시건방져 있었다. 파격이기 보다는 시조 독자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80년대라고 하는 어두운 시대를 투영하는 수단으로 공산당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에서 검은 두건을 쓰고 말 못 하는 그림자를 끌어다가 붙이게 되었다.
문틈으로 비친 오후 발간으로 당시, 삼백 명도 못 되는 시조작가들로부터 받은 축하 편지가 105통이나 되었으며 이름 모르는 시인이 내 시집을 평론으로 쓴 작품「틈의시각」이 계명문화제에서 장원으로 당선 되면서 덩달아 나 역시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림자를 쓰면서 비겁하지 않았다. 시인의 관을 자청해서 썼기 때문에 당연히 현실 문제를 써야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지금 이렇게 착하고 순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까닭도 그림자를 쓰던 시대의 중심에서 하고 싶던 말을 이미 다 했다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밝은 날은 무엇인가를 들키면서 쫓기는 것 같아 어둡고 비오는 날이 편하다 회색빛 어스름과 잿빛 땅거미 속에서 빨간 모자 빨간 티 빨간 시집의 추억에 젖어 본다. 세월이 많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