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김문억
송곳날 같이 뾰족하고 단단한 사람이 있다
눈과 귀 코와 입이 모두 뾰족하게 생긴 사람이 땅 구멍을 후벼 파서 땀방울로 날을 갈았다
밤낮없이 날을 세워 숫돌질을 하던 그는 송곳날 하나만 갖고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산속 깊이 묻혀있는 금을 꺼내 대장질로 두들겨 펼쳐 지평선에 걸쳐놓고 담금질로 몇 번이고 죽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뜨거운 해 하나 산꼭대기 높이 떴다
시상대 높은 곳에서
금빛 환한 맑은 해
김문억 시조집<김문억의 사설시조2019파루>중에서
내가 가장 부끄럽고 몸이 작아지는 때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올라가는 태극기를 바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금메달 수상자를 보던 때다. 아시아 1위고 세계 1위다.
물론 그네는 육체적 훈련을 그와 같이 했겠지만 정신적 노동이라고 해도 내가 지향하는 학문에 대해서 견주어 보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그네만큼 시간을 할애해서 노력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는가 하고 반문을 해 보면 절대 아니면서 내 입장이 초라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가끔 tv에서 세계 4강에 들어갔던 2002년 서울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여주는 때가 있다. 그네들을 일컬어서 戰士라고 한다. 지금 새삼스럽게 경기장에서 뛰는 그네들의 얼굴을 살펴보면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빛만 반짝거리고 깡마른 뼈만 튀어 나와 있다. 히딩크 감독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시켰는지 알 수가 있다. 그 결과가 세게 4강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BTX를 비롯한 유수한 음악가 또는 미술가 영화인들이 그렇다.
젊은 시절에는 1등이 가장 훌륭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1등이 아니고서는 2등 이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살았다. 나의 어줍잖은 시조문학 역시 1등을 하고 싶었다.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하고 시인은 시를 잘 써야 한다는 단순 논리였다. 심지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는 대학생을 앉혀 놓고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써빙을 해 보라고 주문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네들은 역시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직장에서 퇴직을 한 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주차요원이 되고 싶어서 주차를 하는 차는 모두 물세차를 해 주었다. 차 주인으로부터 키를 받아서 좋은 자리에 주차를 해 주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1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 무렵에 나는 태극기를 올리면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금메달 수상자를 존경하고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했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차츰 금메달 수상자와 학문을 비교한다는 일이 어쩐지 어색한 비교 같아서 문학에는 오직 개성이 있을 뿐이라고 자위하는 일이 생겨났다. 체육은 경쟁이지만 학문은 경쟁이 아니고 탐구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선생님이 있고 교수가 있고 더 높은 곳에 碩學이 있다.
아무튼 이 작품 금메달을 쓸 무렵에는 앙큼스럽게도 경거망동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타고 싶다는 엉큼한 생각마저 하던 때다. 시를 빨리 쓰는 습관도 있지만 어느 해는 다음 블로그 회사에서 작품을 많이 올렸다고 축하 한다면서 별 다섯 개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 왔다. 내가 전국에서 10% 안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70대인데 70대 이상만 따로 순위를 정한다면 어쩌면 내가 1등일 것이라는 합리적인 확신을 해 보았다. 다른 카페에 올린 글은 빼고 블로그만 갖고도 그렇다고 하니 나도 깜짝 놀랐다. 아, 나도 1등 한 번 했다. 작품성이 아닌 작품 생산 숫자로 1등을 했던 것이다. 내친김에 일 년치 올린 작품을 헤아려 보았다. 4백 편이 넘는다. 그 때 내가 나에게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었다. 아침내 나도 금메달 수상자가 되어 베란다에 서서 멀리 있는 수락산을 응시하는데 허공중에 태극기가 올라가고 어디선가 애국가 연주가 은은하게 흘러들었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더 무디기 전에 더 흐리기 전에 -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또 한 번의 은퇴 생각으로 솔직히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를 썼다는 이유로 그 많은 상 한 번 타 보지 못 하고 도중하차를 했으니 나무래도 나의 정신세계는 짝 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남은 인생살이에서 무엇인가 또 다른 금메달을 따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