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시인 10편의 시상을 감상해 보기
1 귀향
이승하
그리 멀지도 않건만고향으로 가는 일이 참으로 힘들구나
허나, 세상의 모든 길은저마다의 고향으로 나 있는 법
그대 태어난 곳 자라난 곳꿈을 키웠던 그곳
사춘기 시절엔 줄곧 떠나고 싶었던 곳이어서
그대 고향을 버리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지
연어도 때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는데
한가위로다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두둥실 떠 있는 원반형의 달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사랑을 잃고 술에 취해서
쳐다보았던 달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
인생행로 걸어도 달려도어느 길 할 것 없이 험하기만 했다
망망대해 달려도 멈추어도어느 뱃길 할 것 없이 무섭기만 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나 있는 길에서는지친 새도 날개를 접을 수 있다
그대 탯줄이 거기 묻혀 있기에그대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기에
싸늘히 식은 가슴 지닌 이들이고향에 돌아온 날은 왁자지껄하리라
따뜻한 고봉밥 넘치는 술잔사투리가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오고
잊어버린 친척 아이 이름을 묻는다
잃어버린 내 별명을 여기서 찾는다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이여
이번 한가위만 같아라.
2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이승하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도회지의 하늘
이건별이 지천으로 돋아난여행지의 하늘
이건뼈아픈 별 몇이서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 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 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3 시간에게 묻는다
이승하
시간이여무수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데네가 필요한 것이냐무수한 생명체를 소멸시키는 데네가 필요한 것이냐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느냐영원히 나누어져 순간들이 되느냐가뭇없이 흘러만 가느냐언제 출발하여 어디까지
시간이여고통에도 무슨 뜻이 있느냐사후 세계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천국이 아니냐 혹 열반이 아니냐천국과 열반이 아닐지라도오라 고통이여인간들의 오랜 벗지층을 뚫고 별을 헤아리며화석을 부수고 미라를 만들며.
4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이승하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5 어머니가 가볍다
이승하
아이고―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공사가 한창인데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척추를 다치신 어머니
받아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내 아픈 니를 업고 그때……
어무이, 그 얘기 좀 고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
6 젊은 별에게
이승하
다시 밤이다시야에 출렁이는 겨울 별자리 어디자전과 공전의 질서를 깨뜨릴 수 없어 고뇌하는젊은 별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신호하라내 짙푸른 꿈 하나 쏘아 올릴 터이니
광년의 거리 밖 너의 괴로움과내 바람의 외투를 걸치고 길 나서던 날들의 절망감이만나서 녹아내릴 수 있다면내 아무런 확신 없이 떠돌던 삶이네 울분으로 들끓는 코로나백만 도가 넘는 뜨거움을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고생대, 중생대, 참 얼마나 많은 화석된 시간을 지나겨울 별자리와 나는 이 밤에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대좌하고 있는가, 밤마다내 참 얼마나 많은 별에다기성(旣成)에 대한 증오의 화살을 쏘아 올렸던가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은 없었으니
멀고 먼 시간의 바다인 황도12궁이 가리키는 세상을 향해 떠났었다, 그날 이후내 죄악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굴복했던가소리내어 울면서 버린 동정을얼마나 오래 저주했던가나보다 더 오래 질서이신 신을 저주한 사람이 있으면만나고 싶다, 그를 힘껏 포옹하리
지금은 밤이다, 끝 모를 어둠몸부림치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언제나 밤이지, 시작 모를 어둠이지상에 가득 찰 종말의 날이내 생애의 어느 날이 될지라도어둠 속에서 표류하는 젊은 별이여너를 축복하리, 환하게 웃으며 반기리, 환히환희의 날이 너와 나의 사후에 올지라도
왜 이리 두려울까, 두렵지만 지금은 밤이니질서에 길들기를 거부하는 젊은 별이여희뿌연 새벽이 오기 전에내게 신호하라, 내 온몸으로 뜨겁게뜨겁게 너와 결합하고 싶다.
7 짐 진자를 위하여
이승하
너의 짐을 져주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가를너는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나는 고통에 짓눌려 딱정벌레처럼 위축되어이게, 기어가는 것인지 죽어 가는 것인지촉각 잘린 귀뚜라미처럼관절염 앓는 어머니처럼나는 살아가고 있는데네가 캄캄한 밤에 돌이 되어내 앞에 엎드리면나는 너를 지고너의 짐까지 지고어디쯤에 이르러 숨돌려야 할까울음 참으며 당도한 곳이 막다른 골목이면울음을 그냥 터뜨려야 하는지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해야 하는지나는 알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사람이기 때문에 무력감에 절망하고공포에 질려 부르짖기도 하지만기적을 꿈꾸진 않으리라부끄러움에 떨며 받아들이리라 너의 짐을나의 짐 위에 너의 짐을 얹어더 어두운 세계를 찾아서 갈 터이니자거라 지금은 잠시 자두어야 할 때.
8 찬양 아침
이승하
발작이 멎고……고비를 넘겼다
밤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창 열고 하늘의 끄트머리를 본다한 뼘의 하늘이 파들파들 떨고 있다일찍 일어난 새의 무리가먼동을 어슬어슬 트게 한다
갈증 날 때 마시는 물처럼 차디찬 공기환호하며 뜀박질하는 공기의 입자들수억의 폐포를 낱낱이 일깨우며생명이 생명인 것을 확인케 한다
머리맡에 있는 몇 송이꽃힘겨운 밤을 함께 넘기느라고개 푹 수그리고 있다돋을볕 들자 그대 두 눈 가득 고인 눈물과이마 가득 돋아난 땀방울이 반짝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침이다너와 나의 머리 뒤로 놀빛이 번지는이 경건한 아침을 위해나 이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다시 살아난 것이다.
9 畵家 뭉크와 함께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우우 그런 치욕적인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10 상처
이승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어디론가 가는 광경을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비틀대며 가는 장면을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 입은 자는 알 것이다상처 입은 타인한테 다가가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 주고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상처 입힌 자들을 향해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상처 핥아주는 모습을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학과장2003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부교수1987 문예출판사 편집부쌍용양회 인사부 대리
2019 제29회 편운문학상2019.5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2016 들소리 문학상2008 시와시학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