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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감상실

2023 제30회 김유정 기억하기 대상 작품

작성자박오은(소교)|작성시간24.05.06|조회수71 목록 댓글 0

길 

 

                                                                                      박병렬

 

수십 계단을 공처럼 구르고 튀어 올라 몸 실은 전철 안

이쪽 칸과 저쪽 칸의 열려진 문으로

그물무늬비단뱀 같은 길이 길게 뻗어 들어오고 있었다

휘어진 곳에서 토막토막 잘려 일부는 사라졌다가

곧은 곳에서 이어져 다시 꿈틀거리며 나타나는 길,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틈새로 보이는 길은

낡은 푯말조차 찾을 수 없는 아득한 오솔길이었다가

신호등이 대낮에도 삼색으로 반짝이는 신작로이었다가

그 길 허공에는 꽃을 찾아 맴돌고 있는 나비처럼

인생의 손잡이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역을 지날 때마다 나선 나무들이 심어지고

가시덤불 가득한 숲속으로 접어들자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온몸을 파고들어

나비가 움찔하며 멈춘 날갯짓에 손잡이가 달아난 탓일까

나는 살얼음 위의 팽이처럼 서서

균형을 잡으려고 빙글빙글 돌다가 종착역이 아닌

푸른 별의 이름을 가진 작가의 역에 튕겨 내리자

또 다른 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백꽃

                                                                                     박병률

박물관 같은 사무실 모퉁이에 앉아

점심시간도 잊고 창문 너머를 보아요

 

저쪽, 금병산은 발 뻗고 잠결에 취한 코끼리

원창고개 쪽으로 얼굴을

실레마을 쪽으로 다리와 꼬리를 내려놓고 있는데

점순이가 코끼리 다리를 타고 비탈을 내려와

발바닥을 간지럽히지만 꼼짝하지 않아요

 

박물관 바닥을 뚫고 솟구치듯 피어난 한 그루의 동백꽃은

붕새 같은 날개 활짝 펼쳤어요

 

일벌이 꿀 독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오후

산자락이 달려와 알싸한 향기를 잔뜩 실어 가고

가지 사이사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닭들이 날개를 한 번씩 펼쳤다 접을 때마다

꽃잎 한 잎 한 잎 날아가 산등선을 넘어요

 

코끼리가 향기를 맡고 잠에서 깨어나

점순이와 나를 등에 태우고

실레마을 쪽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코에 입에 귀에 등에 옆구리에 다리에 꼬리에

동백 수십 그루 심고서

 

 

<심사평>  - 심사위원 : 최현순 시인 

 

김유정의 작품 제목을 시제로 한 ‘김유정 기억하기’공모전은 학생 일반인에게 작가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당초 일부 시제의 제한(특히 운문에서)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평한다.(중략)

 

예선을 거쳐 10여 편을 두고 최종 대상을 포함한 세 편 수상자를 변별함에는 향후 작품의 발전 가능성과 시심에서 엿볼 수 있는 순수성의 선택에서 다소 고심이 있었다.

 

대상을 차지한 박병렬의 ‘길’은 보편적 이미지로서의 ‘길’이 아닌 일상에서 흔히 접하면서도 무심코 간과할 수 있는 전철역에서 마주칠 수밖에 시멘트 계단 또는 금속 조립의 에스컬레이터 계단, 심지어 객차와 객차 사이의 분절된 계단(길)까지도 지나치지 않고 세심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적 형상(방향을 잃은 현대인의 길)로 끌어내는 착상과 표현이 뛰어났다. 현대인들의 혼돈된 정체성을 외진 오솔길부터 삼색 신호등 교차로에서, 허공에서 맴도는 나비처럼 흔들리는 길에서의 인생을 끝내 종착역이 아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 자유 의지로서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작품‘동백꽃’에서도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매몰되지 않은 한 그루의 동백꽃을 스케일이 큰 코끼리나 붕새의 날개와 같이 활짝 펴는 삶의 웅지를 적절한 객관적 상관물을 도입하여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으로 대상으로 선정하기에 망설임이 없었다.(후략) - 운문, 대학·일반부, 발췌

 

<수상 소감> - 박병률

                                                                                          

“알 수 없는 그 아픔 잊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스스로 세운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김유정기억하기 전국문예작품공모 담당자로부터 당선 축하와 함께 수상 소감 요청을 받고 기쁨도 잠시 심장이 무거워졌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의 깊은 산골에서 독자로 출생한 소년은 숫기 없는 데다 말더듬과 잔병치레가 많아 늘 혼자였고, 20리 오솔길 걸어 초등과정을 마치고 중등과정 시작부터 등하교길 거리가 너무 멀어 가족 곁을 떠나 자취생활을 하면서 생에 대한 아픔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또래들보다 일찍 결혼하고, 한 세대가 끝날 때 춘천에서 두 번째 직장 생활로 또 한 세대 이상 지나는 동안에도 대인 기피와 공포증이 사라지지 않아 아픔은 계속되었지만, 사무실에서 혹은 고향가는 관문에서 늘 접하는 금병산과 매년 찾은 실레마을은 처방전 같은 알약이었고, 지금도 고향의 품처럼 편안함을 주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그 아픔 잊기 위해 사색하고 간간이 기록하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향수병에 걸친 환자처럼 세월로 걷고 원초적 고향길로 걷고 시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면서 가족에게 용서받으며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 사랑이 계속되리라 믿습니다.

 

먼저 본 공모전을 주관한 강원일보사·김유정기념사업회와 저의 졸작을 수상작으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사랑과 실력의 채찍질로 지도해주신 이영춘 선생님,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시를뿌리다’시문학회원님들, 먼저 공직 입문과 수필 등단으로 모범적인 인생 길잡이 역할의 박상식 사촌형님, 아직도 카톡 등으로 문학적인 소통을 이어가고 있는 직장 선배 김태영·김성곤 형님과 후배 박정주·박상현·박종석 아우님, 저의 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낸 지인들과 친척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늘 부족하고 상처만 안긴 못난 가장이어서 너무 미안한 문학 동반자 아내와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사랑의 메아리를 보냅니다. 막 첫돌 지난 우주의 선물 외손주가 “할부지”하고 활짝 웃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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