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기와 푸른 알약, 그 중간 어디쯤의 식탁
“김 노인, 오늘은 웬일로 풀때기가 풍년이구먼?”
단골 대포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최 영감이 종수의 식탁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나 자글자글한 돼지 오겹살 수육과 노란 양은주전자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오늘 종수의 식탁은 조금 낯설었다.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툼한 오겹살 수육이 중심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춘자 아지매가 갓 무쳐낸 쌉싸름한 미나리무침, 싱싱한 상추와 깻잎, 그리고 쌈장 옆에 단정하게 놓인 마늘과 고추가 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양은주전자 옆에는 시원한 보리차 컵이 놓여 있었다.
종수는 허허 웃으며 지팡이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최 영감, 나도 백 세 시대의 노예는 안 되겠다만, 이 맛있는 걸 ‘오래’ 먹으려면 대가(代價)를 치러야지 않겠나.”
사실 종수도 불과 일주일 전까지는 의사의 경고를 귓등으로 들었다. 수치의 노예가 되어 평생 풀때기만 씹다 갈 수는 없다는 반골 정신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지나치게 과식을 한 탓인지 새벽녘에 찾아온 지독한 두통과 속 쓰림은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진짜 행복을 느끼다 가는 것과, 미련하게 몸을 망가뜨려 맛을 느낄 기회조차 영영 잃어버리는 것은 다르다.’
종수는 다음 날 아침, 며느리가 차려준 브로콜리와 현미밥을 무조건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며느리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야,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긴 한데, 이 풀만 먹다가는 내 영혼이 먼저 시들어 죽겠다. 그러니까 우리 타협을 하자.”
종수가 제안한 타협안은 단순했다. ‘일주일의 80%는 절제하고, 20%는 온전한 해방을 누린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종수는 며느리가 정성껏 차려준 저염식 국과 채소 위주의 식단을 군말 없이 비워냈다. 싱겁고 밍밍했지만, ‘주말의 축제’를 기다리는 설렘이 있으니 기이하게도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아삭한 브로콜리를 씹으며, 그 안의 은은한 단맛을 발견하는 뜻밖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의사가 권한 ‘하루 30분 걷기’도 숙제가 아닌 ‘맛있는 여행’으로 바꿨다. 대포집까지 가기 위해 일부러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려 동네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을 느끼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즐겼다. 그것은 치료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오늘 밤 마실 막걸리를 더 달콤하게 만들어줄 최고의 마중물이었다.
“자, 보라구.”
종수는 젓가락을 들어 잘 익은 오겹살 수육 한 점을 집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 입으로 직행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먼저 커다란 상추 한 장과 향긋한 깻잎을 손바닥에 얹었다. 그 위에 미나리무침을 듬뿍 올리고, 고기 한 점을 쌈장에 콕 찍어 얹었다.
향긋한 깻잎과 미나리 향,고소한 지방의 풍미, 아삭함과 쫄깃함의 완벽한 조화
“키야~
바로 이 맛이지.”
예전처럼 고기만 마구 삼킬 때보다, 채소의 쌉싸름함이 더해지니 고기의 고소함이 오히려 극대화되었다. 게다가 고기 양을 반으로 줄인 대신 채소를 듬뿍 곁들이니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편안했다.
종수는 막걸리 잔을 들었다. 하지만 단숨에 들이켜지 않았다. 입술만 살짝 축이듯 반 잔만 음미하며 목을 축였다. 그리고 남은 잔에는 시원한 보리차를 채웠다.
옆 테이블의 노인들은 여전히 “당화혈색소가 어쩌니”, “혈압 약이 어쩌니” 하며 표준 수치라는 감옥 안에서 서로를 감시하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건강을 위해 맛을 포기했고, 맛을 포기하면서 삶의 생기마저 잃어버린 듯 보였다.
종수는 그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종수의 노년 처방전
-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닌 영리한 타협으로 평소에는 몸을 돌보고, 가끔은 영혼을 달래는 음식을 허락한다.
- 양보다는 질, 그리고 조화, 고기를 끊지 못한다면 푸른 채소를 두 배로 곁들여 몸의 부담을 덜어준다.
- 스트레스 없는 관리, 운동과 식단을 ‘의무’가 아닌, ‘즐거움을 연장하기 위한 투자’로 바라본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길게 지고 있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그 빛깔은 여전히 찬란했다.
종수는 푸른 알약의 노예가 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붉은 고기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도 않았다. 그는 그 중간 어디쯤, 자신만의 행복한 균형점 위에서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내 몸을 존중하면서도 내 영혼을 굶기지 않는 삶. 종수는 다시 한번 쌈을 크게 싸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노년은 그 누구의 표준보다 건강했고, 그 누구의 삶보다 진짜 맛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