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마카베오기 독서를 통해 안티오코스 임금의 최후를 목격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된 실망으로 그는 결국 죽음에 맞닥트리게 됩니다.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려옵니다.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1마카 6,11)’ 권력으로 탐욕을 부리고 무고한 이들에게 불행을 끼친 자신의 큰 허무와 잘못이 죽음의 문 앞에 무서운 심판관으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것은 그에게 등을 돌린 세상 외에 그를 구원할 그 어떤 믿음과 희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그를 기억한다면 ‘하늘이 준 그 권력을 탐욕의 도구로 쓰다가 결국 그 탐욕으로 모든 것을 잃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안티오쿠스 임금의 죽음을 보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자녀가 누리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현실 외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가이 사람들의 시선을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주셨습니다. 사람의 오감(五感)과 이성, 그리고 경험과 사고의 한계라는 울타리를 부수시고 하느님의 권능에로 나가게 해주십니다. 그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하느님 권능에 대한 믿음으로 그 한계를 부수고 나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보이고 그곳에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곧 집착과 실망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가 오고, 절망과 두려움을 떨치는 희망과 용기가 샘솟습니다.
되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성공과 재물,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내일 혹은 그 언젠가 다가올 불행이나 죽음에 대한 최선으로서 붙잡은 것들이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하고 그래서 참 주인으로서 잘 활용해야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되었을 때 곧 그것들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의 삶은 결국 안티오쿠스 임금이 걸어가 마주했던 그것뿐입니다.
사두가이 사람들이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단순히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에만 고정시켜 놓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과 태도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없을까요? 분명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육신과 세상에만 고정된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수없이 부딪히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지혜를 가져다줍니다. 이미 우리는 그 진리를 알고 있고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완전하지 않으면 그에 비례하여 두려움도 우리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말씀과 성사 안에서, 기도와 묵상 안에서, 그리고 형제를 위한 사랑실천 안에서 하느님을 마주 뵙고 알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커져가고 두려움은 줄어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