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중공(허유전) 后 호은공파 허원보 외손가계(이황, 곽월, 박운, 박녹, 오운, 곽재우)

1)예촌 허원보 의령 정착기
유학자, 시인, 교육자인 허원보((許元輔: 1455년, 세조 1년~1507년, 중종 2년)가 경남
고성에서 살다가 1480년경 혼인 새살림을 의령현(의령군) 가례(嘉禮)에 꾸린 이래, 그와
그의 후손과 그의 인척들은 역사적인 중요한 일들을 많이 남겼다. 유명 인척으로는 문경
동, 박운, 이황, 곽재우, 오운, 박녹 등이 있다. 허원보는 가례를 몹시 사랑하면서 지역
이름을 ‘가례’(嘉禮)라 하고, 그 끝글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예촌’(禮村)이라 했으
며, 그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며 벼슬아치였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김영(金瑛) 등과 깊이 사귀었다.
허원보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부인 해주 오(吳)씨의 아버지는 호군(護軍. 정4품)
을 지낸 오한(吳漢)이다. 호군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에 속한 벼슬이다. 허원보
부부의 묘는 의령읍 무동(무전)에 합분이고, 재실 이름은 고망재(高望齎)이다. 허원보의
묘갈명(묘비문)은 처음 퇴계 이황이 지었으나, 묘비가 갈라져 조선 후기 의금부도사 척
암(拓菴) 김도화(金都和: 1825~1912년)가 새로 지었다.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 1478년, 성종 9년〜1539년, 중종 34년)는 한양(서울)에서
선릉(宣陵: 조선 성종의 능) 참봉(參奉) 등의 벼슬을 지내고,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가례 서쪽 현재의 칠곡면 수부 마을, 압수 마을, 도산 마을 지역과 연고를 맺었다. 그의
무덤은 칠곡면 압수 마을 뒷산에 있고, 그의 재실 존저암((尊箸庵)은 칠곡면 도산 마을
서쪽 산중턱에 있다. 그의 부인은 감사(관찰사. 현재 도지사에 해당)를 지낸 윤수천(尹
壽泉)의 딸이다. 허수는 퇴계 이황의 처백부가 된다. 현재 전하는 허수의 묘갈명은 퇴계
의 10세 종손 성리학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 1788〜1861년)이 지었고, ‘도산’
(陶山) 마을 이름은 퇴계의 연고지 경상도 예안현(현재 경북 안동시) ‘도산’(陶山)에
서 따온 것이다. 허수의 장남 허안세(許安世)는 중훈대부(종3품) 예빈시(禮賓寺. ‘예빈
사’라 읽지 않음) 참봉, 차남 허안정(許安鼎)은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 군자감은
군수품 기관)을 지냈으며, 이들의 무덤도 칠곡면에 있다. 그래서 칠곡면 수부, 압수, 도
산 마을은 허씨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되었다. 허원보의 장남 허수가 서울에서 지낸 까
닭으로 허원보의 가문과 많은 재산은 주로 둘째아들 진사 허찬(許瓚: 1481~1535년)이
관리하였는데, 그는 창계 문경동의 맏사위이다. 허원보의 친구이기도 한 문경동(1457~15
21년)은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 편수관, 성균관 사성, 청풍 군수(종4품)를 지냈다. 허
찬의 장남 허사렴(許士廉)은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 합격하였으며, 퇴계의 처남으로서 퇴
계의 요청에 따라 청량산(경북 봉화군) 절에서 함께 독서했다. 허사렴은 퇴계와 퇴계의
제자에 대해 기록해 둔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제자 309명)에 올려 있다.
허찬의 차남 허윤렴(許允廉)은 역사책에서 처음 이름 허사언(許士彦)으로도 알려져 있는
데, 진주 목사(牧使. 정3품)를 지냈다. 허찬의 맏사위가 퇴계(退溪) 이황(李榥: 1501~1
570년)이고, 퇴계는 허찬의 묘갈명을 지었다. 둘째사위가 충의위(忠儀衛: 공신 자손으로
구성된 중앙군)를 거친 김진(金震)이다. 허사렴의 맏사위 오운(吳澐: 1540∼1617년. 본
관 고창. 함안 출생)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문과 급제 후 충주 목사, 광
주 목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경남 백령(白嶺)에서 2만여 명의 의병을 모아 곽재우 장
군과 함께 싸운 의병장령이다.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오르고 경주 부윤(종2품), 공조참의를 지냈다. 허사렴의
둘째사위 박녹(朴漉: 1542∼1632년. 본관 반남潘南: 나주의 옛이름)은 경북 영주 사람으
로서 임진왜란 때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 다른 지역 의병장들과 협력하
여 전공을 세우고, 태릉(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능) 참봉,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허원보의 셋째아들 허경(許瓊)은 참봉을 지냈으며, 딸 셋을 두었는데, 맏딸은 황해도
관찰사(감사)를 지낸 곽월(郭越: 1518∼1586년. 곽재우 아버지)의 후처가 되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년)를 3살 때부터 길렀으며, 직접 낳은 곽재지(郭再祉), 곽재
기(郭再褀)도 눈부신 의병 활동을 하였다. 곽월과 이황은 사촌동서 간이다. 허씨 부인은
곽월보다 11년쯤 뒤에 죽었다. 곽재우는 정유재란 때 1597년 8월 29일 창녕 화왕산성에
서 계모 허씨가 죽자 상여를 모시고 산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후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치렀다. 허경의 둘째사위 박옥형(朴玉衡)은 군수였고, 셋째사위 이경춘(李景春)은 생원
이었다.
허원보의 넷째아들 허연(許璉)과 다섯째아들 허관(許瓘)은 생원이었고, 여섯째아들 허
환(許環)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직)이었다. 허관의 아들 허안인(許安仁)은 죽은 뒤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형조참판(현재 법무부 차관에 해당)의 벼슬을 받았다. 허안
인의 외아들로서 무과에 급제한 허언심(許彦深: 1542~1603년)은 곽재우의 매부(누나 남
편)이며 곽재우의 가족을 돌보면서 싸운 의병 장령이다. 그는 가례에 살면서 진주에도
재산이 많았는데, 군량 수천 석을 내놓았고, 의병의 의식주와 전투 자금 마련에 힘을 썼
다. 임진왜란 후 가선대부(문관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은
임진왜란 6년 전에 죽었으므로, 곽재우의 의병 활동에는 자신을 길러 준 계모 허씨 부인
(허원보의 손녀), 허씨 부인이 낳은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곽재지와 곽재기, 그의
매부 허언심을 비롯한 허씨 가문이 큰 버팀목이 되었다. 여기에 허원보의 증손녀의 남편
의병 장령 오운도 큰 힘이었다. 허원보 맏딸의 남편 박양(朴良)은 선전(宣傳: 선정관청
의 무관)을 지냈다. 둘째딸의 남편 박운(朴芸. 본관 밀양. 호 수성제修誠齊)은 호조정랑
(정5품)을 지내고 이조참판(종2품)을 추증받은 졸당(拙堂) 박총(朴聰)의 증손자로서 삼
가현 송지촌(현재 합천군 대병면)에서 살다가 처가가 있는 의령현 가례로 와서 수성(修
誠)에서 살았으며. 병마우후(兵馬虞侯),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종2품)를 지냈
다. 그는 퇴계의 처고모부이고, 퇴계와 가까이 지냈다. 박운의 장례 때 남명(南冥) 조식
(曺植)이 보낸 ‘만박우후’(輓朴虞候)라는 제목의 만사(輓詞)가 전한다.
경상도 예안현 온계(현재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자란 퇴계 이황(1501~1570년)은
같은 나이 허씨 부인과 1521년(만 20살)에 혼인했다. 처조부 허원보가 죽은 뒤 13년쯤이
다. 허씨 부인의 아버지 허찬은 딸만 둘을 둔 문경동의 맏사위였으므로, 허찬 가족은 문
경동이 살고 있는 경상도 영천군(현재 경북 영주시) 초곡(草谷푸실)을 오갔다. 퇴계는
혼례를 초곡에서 치렀다. 허씨 부인은 혼인 후 퇴계와 함께 친정 가례와 외가 초곡을 오
갔다.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퇴계는 가난하게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며,
허씨 부인은 예안에서 가까운 외가 초곡에서 어린 맏아들(이준李寯)을 옆에 두고 둘째아
들(이채李寀)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1527년 11월(만 26살)에 죽었다. 무덤은 영주시 이
산면 신암리에 있다. 퇴계는 1530년 권씨 부인과 재혼하고, 1534년 문과에 급제했다. 권
씨 부인은 자식 없이 1546년(퇴계 만 45살)에 죽었다. 퇴계는 재혼 후에도 가례에 자주
들렀고, 시(詩)도 남겼다. 둘째아들 이채는 외가 가례에서 자랐는데, 정혼 뒤 21살에 죽
고 무덤은 의령읍 무전 허찬 부부 무덤 가까이 있다.
2)창계 문경동(滄溪 文敬仝)
1457(세조 3)∼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흠지(欽之), 호는 창계(滄溪). 숙기(淑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관(孫貫)이고, 아버지는 전연시직장(典涓寺直長) 속명(續命)이며, 어머니는 강순부소윤(江順
府少尹) 진유경(秦有經)의 딸이다.1486년(성종 17)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
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을 거쳐 비안현감(比安縣監)이 되고, 1506년(중종
1)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곧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승진하여 춘추관편수관
(春秋館編修官)을 겸하고 『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1508년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유담년(柳聃年)과 함께 왜적토벌에 공을 세우고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진급하였다.1512년 예천군수가 되어 임기를 채운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 1521년
청풍군수가 되었으나 곧 임지에서 죽었다. 성품이 활달하여 매이는 것이 없었고, 해학을 즐겨
이것이 그의 벼슬길을 크게 가로막았다.또, 음주와 독서를 즐겼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사
부(詞賦)에 뛰어나 과거 준비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글을 익혔다고 한다.
저서로는『창계문집』 4권이 있다
3)허사렴의 사위 (박녹 [ 朴漉 ])과 오운
허사렴은 딸만 둘로 두명의 사위를 두었다. (첫째 죽유 오운, 둘째 취수옹 박녹)
1. 죽유 오운
퇴계와 남명의 애제자, 비범한 학자로 살다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린 ‘동사찬요’ 편찬. 임란
땐 재산까지 내놓으며 의병활동 도와 류성룡·정구 등 많은 학자와 학문적 교유
죽유(竹) 오운(1540∼1617)은 조선 중기 문신(文臣)이자 학자였다. 그는 다른 선비들과 달리
당대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면서 그
들의 장점을 취하며 자신의 학문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는 또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전란에
서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고, 지식인들이 중국만 숭상하던 분위기에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
게 하기 위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역저 ‘동사찬요(東史纂要)’를 편찬·간행하기도 했다.
‘죽유는 평생 아래의 아전들과 귀를 대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점이 다른 사람들이 미치기 어
려운 점이다. 또 자기를 굽혀서 귀한 사람을 받들지 않았다. 아첨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더럽히
지도 않았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죽유를 가까이서 보아왔던 선비의 평이다. 퇴계와
남명, 양대 석학의 가르침을 받았다.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의령으로 이거해 살았고 만년에는
경북 영주로 옮겨 머물던 죽유는 19세 때 남명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고, 25세 때는 퇴
계의 제자가 되었다. 남명의 제자가 먼저 된 것으로 전하나,
죽유에게 퇴계는 처고모부이고 조모의 종제이므로 어릴 적부터 퇴계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죽유가 영향을 받은 것도 퇴계가 먼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죽유는 퇴계와 남명 양문을 출입했지만, 학문적으로는 퇴계의 영향을 더 받았다. 이급(李級)이
‘죽유집’ 서문에서 죽유에 대해 ‘뇌룡정 앞에서 출발해 암서헌 마당에서 졸업했다’고 표현
했듯이, 학문의 입문은 남명에게 해서 최종적으로 퇴계에게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죽유는
퇴계를 존숭(尊崇)하여 “그 도덕과 문장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아 이 세상의 모범이다.
주자 이후 제일인자”라고 했다.
퇴계와 남명 양문을 출입한 제자들은 대부분 시간적 차이를 두고 양문을 출입했던 데 비해, 죽
유는 청년시절부터 두 사람이 별세할 때까지 계속 출입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죽유에게 내린 사제문(賜祭文)에서 ‘도학은 퇴계를 존모
하고 학문은 남명을 으뜸으로 삼았다(道慕退陶 學宗山海)’고 했다. 죽유의 학문적 성격을 대
변하고 있다 하겠다. 죽유의 제자이자 사위인 조형도(趙亨道)는 ‘산해의 마루에 오르고 퇴계
의 방에 들어갔다(升山海堂 入退溪室)’고 표현했다.
죽유는 이처럼 두 석학의 학문적 훈도 속에서 남다른 학자로 성장해 큰 성취를 얻었다.
죽유가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절조를 지켜 물러나기를 좋아하고 주자학을 중시하
며 저술을 많이 한 점은 퇴계의 영향이었고,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벼슬살이
를 탐탁잖게 여기며 국난을 당해 창의했다는 점 등은 남명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죽유는 양문을 출입하면서 문하의 많은 제자들과 사귀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 한강(寒岡)
정구, 서애(西厓) 류성룡, 소고(嘯皐) 박승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등은 대표적 인물이다.
망우당 곽재우를 도우며 임란 의병활동을 하였다.
임란 발발 이후 최초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망우당 곽재우가 초반에 경상감사 김수와 경
상병사 조대곤에게 토적(討賊)으로 몰리면서 휘하의 장병들이 다 흩어져버렸다. 망우당은 어떻
게 할 수가 없어 한때 모두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지내려고 했다. 이 때 망우당이
의령 가례(嘉禮) 마을을 지나다가 죽유를 만나게 되었다. 죽유는 망우당이 창의한 일을 칭찬하
며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의 전투용 말과 노비 8명을 내어 주었다. 죽유는 인근
마을의 선비들에게 권유해 장정들을 내놓게 하고는 망우당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자신
은 망우당 밑에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의병활동을 도왔다. 그 당시까지
만 해도 망우당은 향촌의 선비에 불과했지만, 죽유는 이미 정3품까지 오른 고관이었고 나이도
12세나 더 많았다. 그런데도 그 휘하에서 수병장(收兵將)을 맡아 망우당을 도운 점은 죽유의
인격을 잘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처가의 재산까지 동원해 의병활동
을 도왔다.또 학봉 김성일이 의령에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해 왔으나, 안동 출신이라 의령 지
역의 사족들과 유대관계도 없고 지리에도 어두웠다. 죽유는 이처럼 지역 사정에 생소하던 학봉
을 도와 지역의 사족들과 연계시켜주고 지리적 상황을 안내하며 초유사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죽유는 다시 호남을 공격하던 왜적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군을 곳곳에서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고, 도원수 권율이 이런 사실에 대해 포상할 것
을 요청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기도 했다. 죽유는 1600년 이후에는 영주에 머물
면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2.취수옹 박녹
박승임은 퇴계이황의 문인으로 황해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박녹은 박승임의 아들로서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지역방어를 담당한후 의금부도사를 거쳐 가
선대부에 올랐다. 공이 혼례를 치른 허 부인(許夫人)은 김해(金海)가 본관이고 생원(生員) 허
사렴(許士廉)의 딸인데 부인이 옹을 도운 것이 또한 남들보다 더한 것이 있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왜구가 크게 어지럽혔을 때에 향리(鄕里) 사람들이 옹을 추
대하고 자제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니 멀리 정탐하고 복병을 엄하게 하여 왜구가 경내에 들어오
지 못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위천(尉薦, 위로해야 할 자를 천거함)으로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고,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집경전(集慶殿)으로 옮
겼으며,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에 제수되어 역마(驛馬)
를 갖추고 민졸(民卒)을 모아서 병란 끝에 살아남은 자들이 다 옛 생업에 안정하였으나, 다 얼
마 안 가서 곧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돌아갔으므로 한 해가 지나도록 머무른 적이 없었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의 재상 중
에 옹이 오래 있을 뜻이 없는 것을 살피고 아깝게 여긴 자가 있어서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
로 조용(調用)하여 한직(閑職)에 있게 하였으나 이미 속세를 떠나려는 고상한 뜻이 있었다. 만
년에 귀가 어두워졌으나 의원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는 아픈 것이 아니
며 세상일을 듣지 않는 것은 내 마음에 맞는 것이니, 내가 만족하는 것을 어찌하여 고치겠는
가?”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우로(優老)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
(品階)에 제수되고 마침내 90세에 차기 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제수되니, 옹이 입
으로 말하여 전문(箋文)을 적게 해서 사은(謝恩)을 아뢰었는데 사의(辭意)가 아주 지극하였다.
그 오관(五官, 사람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 손상되지 않은 것은 눈을 쉬고 근심을 드물게
하였기 때문이나, 관례에 막혀서 문달(聞達)하지 못한 것이 아깝다. 처음에 옹을 위하여 연경
(燕京)에서 운명을 물으니 백옥(白屋, 백모(白茅)로 지붕을 이은 집. 미천한 사람의 집)의 공
경(公卿)으로 기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증명되었다 한다.
4)재령이씨 사의공파 호조참판공 介智의 사위-별시위 許元質(허원질)|
모은공의 아드님은 참판공(휘 介智, 1415∼1487)이시고 진양하씨 목사공(河敬履)의 따님에게 장가들
어 4남 4녀을 낳았다. 네 아드님중 장자(근재공, 휘 孟賢, 1436∼1487)와 차자(율간공, 휘 仲賢, 1449
∼1508)는 1460년(세조 6년)과 1476년(성종 7년)에 각각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의 부
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다음은 휘가 숙현(叔賢)이고 季子가 사의공(司議公)이시다. 황해도관찰사 근재
공의 현귀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할아버지이신 모은공은 병조참의에 각각 증직되었다. 사의공의 휘는
계현(季賢)이요 자는 술성(述聖)이다. 공은 생원에 학행 천(薦)으로 장례원 사의(司議)를 제수 받았으
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독실했으나 불행하게도 셋째형의 면옥(寃獄)에 대신 옥고
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별세하셨다. 공이 돌아가신지 200-300년이 지난 후의 족보와 묘갈명이 공의 유
일한 기록이었다.
참판공의 장인이신 성주목사 하경리(河敬履)는 진주의 수곡이 고향으로서 필자의 본가와 가깝다. 목
사공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하충(河)은 14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세 따
님은 진주인 유봉(柳 ), 참판공 그리고 밀양인 오곡(梧谷) 손수령(孫壽齡,오곡공파조)에게 각각 출가
하였으며, 참판공의 배위에 대한 행적은 함주지와 밀암선생문집의 가세고사(家世故事)편에 기록되어
있다. 목사공의 형은 양정공 하경복(河敬復,1377∼1438)장군으로 함길도병마절제사 등을 15년간 수
행하였기 때문에 노모를 공양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특별한 배려로 목사공에게 진주와 가까운 아홉
고을의 수령을 맡겼다. 사의공의 외가는 진주 수곡이지만 근재공은 외조부 목사공이 사천군수를 맡을
때인 1436년에 사천의 현아(縣衙)에서 태어나셨다.
참판공의 넷 딸은 성산인 署令 이의인(李依仁), 선산인 兵使 김치성(金致誠), 김해인 別侍衛 허원
질(許元質), 순흥인 안창공(安昌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판공의 사위 서령 李依仁은 함주지에 상
세히 기록된 정무공(靖武公) 李好誠(1397∼1467)의 아들이며, 점필재 金宗直(1431∼1492)의 시집에
〈함안 이 서령 의인의 새 집에서 사성의 운에 차하다[咸安李署令依仁新居次師聖]〉란 시가 전하는
데, 師聖은 곧 서령의 큰 처남인 근재공의 자(字)이며 근재공·점필재와 함께 가깝게 지낸 것으로 생각
된다. 병사 金致誠은 아들이 없고 따님 한분만 두었는데 함주지에 기록된 현감 오석복(吳碩福,1455∼
1533)의 처 일선김씨(一善金氏)이니 참판공의 외손녀이자 사의공에게는 생질녀(甥姪女)가 된다. 별시
위 許元質은 후사가 없어 기록이 미비하나, 백형 송와 허원필(許元弼)은 후손이 번성하여 고성
과 합천에 많이 살고 있으며, 중형은 의령의 김해허씨 집안을 이룬 예촌 허원보(許元輔,1455∼
1507)이며 그 손녀가 퇴계선생의 배위가 됨으로서 퇴계선생의 문집에 그 내용이 많이 실려 있
다.
2-1.시중공(허유전) 后 호은공파 외손
- 망월당 곽재우

*.곽월(원배)-진주강씨 / 곽월(차배)-김해허씨
곽씨(郭氏)는 대대로 알려진 집안이니 고려 때에 드러났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諱) 경(瓊)은 벼슬이 지영주사(知永州事)에 이르렀고, 2대를 거쳐 익산
군수(益山郡守)였던 휘 안방(安邦)에 이르러서는 청렴하고 결백함으로 드러났으며, 경사를
쌓고 복을 열어 창성하고 광대하게 하였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아들의 휘 승화(承華)는
성균 진사(成均進士)이고, 손자의 휘 위(瑋)는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었으며, 이 분이 휘
지번(之藩)을 낳았는데,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린(許磷)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두었는데
공은 그 중간이다.
공의 휘는 월(越)이고, 자(字)는 시정(時靜)이다. 태어나서 여섯 살 때에 선 부인(先夫人)이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되었다. 어려서는 굼뜨고 민첩하지 않았으나 조금 장성해서는 학
문을 좋아하고 과문(科文)을 잘 지어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진사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가정(嘉靖)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조용(調用)되었으며,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에 어머
니 상을 당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년)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대동 찰방(大同
察訪)에 보임되었으며, 2년 뒤인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승진되어 4년을 지낸 뒤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여러 차례 대구 부사(大邱府使)ㆍ상주 목사(尙州牧使)ㆍ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임명
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가 장령으로 옮겼으며, 다시 사
간원 사간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발탁 임명되어 통정 대부로 승진하였고,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에 호조 참의(戶曹
參議)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무인년(戊寅年)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기묘년
(己卯年)에 돌아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자 대신(大臣)들이 공이
연로한 몸으로 먼 바다를 건넌다는 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고쳐 임명되
었으며,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되
어 파직되고, 그 이듬해 병으로 현풍(玄風) 솔례촌(率禮村)의 사제(私第)에서 졸(卒)하니, 실
제로 만력(萬曆) 14년인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8월 6일이었으며 향년이 69세이
다. 구지산(仇知山) 신당리(神堂里) 선인(先人)의 묘소 아래 장사지냈다. 공이 대동 찰방이 되
었을 때에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의 핵심으로 임금의 총애를 믿고 매우 강대하였으므로 사
람들이 보기를 살무사나 물여우처럼 여겼다. 그런데 그의 종이 도포(道袍)에다 신을 신고 계
단으로 올라가므로 공이 노하여 곤장을 쳤는데 그 소문을 듣는 사람들이 상쾌하게 여겼다. 영
천 군수가 되어서는 아래 사람 다스리기를 엄격히 하면서도 가혹하게 하지 않았으며, 외롭고
고달프며 의지할 데 없는 서민들에게 대해서는 더욱 잘 보살폈다. 당시 국법이 제대로 시행되
지 않으므로 특별히 어사(御使)를 파견하여 주현(州縣)에 비치된 문서의 불법을 적발하였는
데, 죄가 더러는 사형에 이르기도 하였으므로 (어사를) 호랑이 행차라고 이르기도 하였다. 공
이 한창 대청에 앉아 일을 처리하는데 어사 윤근수(尹根壽)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공은 조
금도 동요하지 않으므로, 윤공(尹公)이 그의 기국과 도량에 탄복하면서 자주 칭송하기를, “내
가 암행어사로 검열한 주현이 많았지만 이 분처럼 일 처리를 조용하게 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
였다.”하였다. 당시 조세(租稅)를 포탈하여 거둬들일 수 없는 것이 해마다 1만 석(石)이나 되
었기에 주민들이 더욱 곤궁하므로, 공이 그 문권(文券)을 태워버리고 모곡(耗穀)으로 채우게
하니, 아전과 주민들이 부르짖고 손뼉을 치며 고무(鼓舞)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공
이 그곳을 떠남에 이르러서는 공이 떠나는 길을 막았지만 막을 수 없어 비석을 세워
사모하는 뜻을 보였다.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우뚝하게 자신의 의지를 굳게 지키면서
논박하고 탄핵하기를 피하는 바가 없었는데 이 때문에 명망이 더욱 정중하였다. 처음에 의주
(義州)가 멀리 치우쳐 있어 주민들이 교화(敎化)를 알지 못하였는데, 공이 교훈과 금제(禁制)
를 마련하고 더욱 학교에다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주민들이 그를 위하여 흥학비(興學碑)를 세
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남원(南原)에 있을 때에 방백(方伯)이 순시차 부(府)에 왔는데,
좋아하는 기생을 데리고 왔으므로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노부(老夫)가 비록 물리침
을 당하였고 방백이 비록 높다고는 하지만 유독 어떻게 기생을 끼고 우리 남원부를 지나간단
말인가?”하면서, 기생이 먹을 밥을 마련하지 않았는데, 방백이 원한을 품었다가 마침내 공을
중상하여 근무 평정을 꼴찌로 매겨 파면되어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뛰어나게 기개를 자부하였고 신체와 모습이 훤칠하였으며 눈빛은 번쩍번쩍 빛이 나 사
람들이 저절로 위엄에 질려 두려워하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이 장점이어
서 분석하고 결단하기를 거침없이 하였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뜻이 방대하여 통상적인 전철
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기는 또한 매우 엄격하고 깨끗하게 하여 20년 동안 지방관을
지내면서 전택(田宅)을 불린 것이 없어 자손(子孫)의 후일에 대한 털끝만큼의 계획도 하지 않
았다. 때문에 조정에 들어가서는 의심스러운 행동이 없었고 고향에 살면서는 헐뜯는 말이 없
었다. 그리고 공이 지은 글은 광대하고 웅건하여 세속의 기상이 없었으며, 열두 차례 재능이
있는 자를 추천한 데서 과거에 수석을 차지한 자가 여덟 명이나 되었으므로 그 명성이 한 시
대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활 쏘기를 잘하였던 것 또한 타고난 품성이어서, 공청(公廳)에서 물러나오면 번번이 과녁을
펴고 정곡(正鵠) 맞히기를 겨루었는데, 쏘면 명중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을 문무
(文武)의 인재라고 하여 국가에 급한 일이 있을 때에 큰일을 맡길 수 있다고 여겼었다. 뒷날
공의 아들 곽재우(郭再祐)가 여항(閭巷)에서 일어나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과 이
듬해 계사년(癸巳年)에 왜적을 격퇴시키고 큰 공을 세워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에까지 드러나
자, 사람들은 아비의 풍도가 있다고들 하였다. 곽재우가 존귀하게 되어 공에게 자헌 대부 예
조 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세자 좌빈객(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世子左賓客)이 추증되었다. 공은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원배(元配)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로 목사(牧使)에 추증된 강응두(姜應斗)의 딸이며,
차배(次配)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참봉(參奉) 허경(許瓊)의 딸로서 공보다 12년 뒤에 졸
(卒)하였다.
그 장사에 고례(古禮)를 적용하여 원배 강씨 부인을 부장(附葬)하고, 허씨 부인은 묘 왼쪽에
부장하였다. 아들 딸 일곱을 두었으니 맏이는 곽재희(郭再禧)이고, 다음은 곽재록(郭再祿)이
며, 다음은 곽재우이니 바로 망우당(忘憂堂)이다.
딸은 허언심(許彦深)에 출가하였는데 강씨의 소생이다. 다음은 곽재지(郭再祉)ㆍ곽재기(郭再
祺)이고, 딸은 성천조(成天祚)에게 출가하였는데 허씨 소생이다.
곽재희가 고성 최씨(固城崔氏)에게 장가들어 한 아들 곽원(郭源)을 두었는데 서얼 출신이다.
곽재록은 함안 조씨(咸安趙氏)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두었는데 곽풍(郭灃)ㆍ곽옹(郭滃)ㆍ
곽창후(郭昌後)이고, 곽재우는 상주 김씨(尙州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남명 선생(南冥先生,
조식(曹植))의 외손녀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곽영(郭瀅)과 곽고(郭沽)이고, 곽재지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으며, 곽재기는 영산 신씨(靈山辛氏)에게 장가
들어 두 아들을 두었는데, 곽유(郭瀏)는 생원(生員)이고, 곽융(郭瀜)은 저작(著作)인데 정묘
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