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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허씨 (가장 최근 소개기사) 및 주요 세거지

작성자율원(허남균)|작성시간15.03.16|조회수2,153 목록 댓글 4

김해허씨(金海許氏)

 

 

 

기사입력

2014/12/03 [00:52]

 



허(許) 씨는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에서 시작된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다. 그는 16세(48년) 때 배에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에 있는 부인당(夫人堂)으로 들어와 정박했다. 그 뒤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한다. 수로왕과

 

허황후(許黃后)의 혼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로왕은 10남 2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이 허씨로 사성(賜姓)되면서 허씨의 시초가 되었

 

다. 허황후가 자기의 허씨 성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황후의 30세손 허선

 

문은 양천허씨, 허사문은 태인허씨,33세손 허강안은 하양허씨,35세손 허염은 김해허씨로 각각 분관

 

된다. 가락국이 신라에 망하고 그 자손들은 흩어져 살게 된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허씨 일

 

파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갈라지고, 양산이씨(梁山李氏)는 인천이씨로부터 분관된다. 따라서 허

 

씨, 김해김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모두 같은 혈족이다. 함께 ‘가락중앙종친회’를 조직해 유대를 다

 

지고 있다.


 

김해허씨의 시조 허 염(許琰)은 고려 문종 때 인물이며 삼중대광으로 가락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

 

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김해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김해허씨는 고려조에 허홍재(평장사), 허유전(정승), 허 옹(전리판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러

 

나 조선조에서는 크게 번영하지 못했다. 허유전은 1321년(충숙왕8년) 81세의 노령으로 원나라에 귀

 

양 간 상왕(충선왕)의 환국운동을 위해 티베트까지 갔다 왔다. 그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했다.


 

허 위는 한말 의병을 모아 일군에 맞서 싸운 의병장이다. 그는 1897년(광무1년) 이은찬, 조동호와 함

 

께 의병을 규합해 금산, 성주 등지에서 싸웠다. 의정부 참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

 

반대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됐다. 일본은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 2등에 임명했지만 거절하고 낙향했

 

다.


 

현대 인물은 허 정(국무총리), 허형구(변호사, 대검차장), 허종현(부산대총장, 동의대학장), 허 검(순

 

천향대학장), 허 균(적십자병원장), 허문도(문공부차관), 허만호(대검검사), 허만훈(강원도의회의

 

장), 허 민(연합철강회장), 허정구(삼양통상회장), 허준구(럭키금성그룹부회장), 허택도(허씨장학회

 

장), 허흡(대구시장), 허갑도(전국택시연합회장), 허경구(국회의원), 허만일(국립중앙박물관사무국

 

장), 허명(사학자, 한국학연구원교수), 허문택(동아대교수), 허석구(농수산부공무원교육원장), 허선

 

도(국민대교수), 허성호(중앙대교수), 허신구(금성사대표이사사장), 허정호(신한병원장), 허천택(동

 

국대교수), 허창운(서울대교수), 허훈도(대종회장), 허완구(프로씨름협회회장), 허맹구(신일산업 부

 

사장), 허동수(호남정유 전무이사), 허동섭(공학박사), 허남훈(동력자원부자원정책실장), 허남진(금

 

강금속회장), 허복선(제일기계사장), 허상영(중소기업중앙회감사), 허신행(농학박사), 허재구(구로

 

구청장), 허용원(정광섬유회장), 허필은(풍림산업회장), 허학구(정호금속회장), 허형택(해양연구소

 

장, 이학박사), 허 흠(주택은행전무), 허 후(서예가, 경기상업고등학교장), 허 기(안전기획부기획관리

 

관), 허종성(KBS사업단감사), 허화평(청와대수석비서관), 허정훈(부장판사), 허유(시인, 한국투자금

 

융전무), 허정삼(건국대교수), 허재구(세종문화회관장) 씨 등이 있다. (무순, 허씨 본관 및 전·현직 구

 

분 안 됨)

본관 김해는 본래 가락국으로 가야라 부르기도 했다. 낙동강 하류 김해평야에 자리 잡은 가락국은 서

 

기 42년에 수로왕을 시조로 받들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당시 가락국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와 풍부한 철산지를 보유했다. 양호한 해운의 입지조건을 갖춘 까닭에 일찍부터 해상활동

 

을 통하여 한(漢)의 군현인 낙랑, 대방과 왜와 통교하여 해양왕국을 건설했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 토분의 웅장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수

 

로왕릉에서는 매년‘추향대제’라 부르는 김해김씨 대제가 열린다.

본관 김해는 경상남도 김해시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

 

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

 

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

 

(良州 :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 김훤이 인접 지역인 밀성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

 

(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

 

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

 

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강(姜), 김(金), 나(羅), 류(柳), 모(毛), 문(文), 박(朴), 배(裵), 백(白),

 

서(徐), 손(孫), 송(宋), 신(辛), 안(安), 양(梁), 여(呂), 오(吳), 윤(尹), 해(李), 임(林), 전(全), 정(鄭),

 

조(趙), 최(崔), 해(海), 허(許), 홍(洪) 등이다.

 

1930년 당시 경기도 용인군, 충북 진천군, 강원도 홍천군 일원과 경남 의령군 일원, 경남 합천군 가회

 

면, 경북 달성군 성서면, 경북 월성군 양북면, 경북 고령군 개진면, 경북 선산군 고아면, 경북 선산군

 

구미읍, 평북 창성군 창성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리도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1세 허문손의 대에서였다.

 

이후 4백여 년간 김해허씨 세거의 터로 지켜져 왔다. 이 마을 2백여 호 가운데 1백여 호가

 

자손들이다. 그 밖에 집성촌은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경남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경남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 경북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 경남 의령군 봉수면 죽전리, 경남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등이다.

 

주요파는 가락군파, 호은공파, 중승공파, 전직공파, 증성군파, 판서공파, 상서공파 등 9개 파가 있다.

 

항렬자는 26세 우, 만(遇, 萬), 27세구, 량(九, 亮), 28세 필, 남(弼, 南), 29세 행, 녕(行, 寧), 30세 성,

 

성(成, 盛), 31세 기, 범(紀, 範), 32세 용, 강(庸, 康), 33세 신, 재(新, 宰), 34세 정, 병(廷, 秉), 35세

 

발, 규(發, 揆), 36세 돈, 학(敦, 學), 37세 건, 숙(建, 肅), 38세 인, 연(寅, 演), 39세 경, 흔(卿, 欣), 40

 

세 진, 근(震, 根), 41세 용, 완(龍, 琬), 42세 보, 성(寶, 性), 43세 업, 수(業, 洙), 44세 동, 중(東, 重),

 

45세 유, 준(猷, 遵), 46세 국, 기(國, 璣), 47세 현, 옹(鉉, 甕)이다.

조선시대에 12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과 15명, 무과 40명, 사마시 66명이다. 통계청의 인

 

구 조사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1985년에는 총 29,314가구 121,607명, 2000년에는 총 37,788가구 121,0

 

3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8천여 가구가 늘어났다. 반면 인구는 오히려 6백여 명이

 

줄어들었다. 조사 과정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9,733명, 부산 22,032명, 대구 10,911명, 인천 2,269명,

 

경기 8,507명, 강원 6,699명, 충북 2,000명, 충남 3,320명, 전북 2,876명, 전남 7,075명, 경북 11,169명,

 

경남 24,430명, 제주 582명이다. 경남과 부산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7,170명, 부산 21,019명, 대구 12,235명, 인천 3,425명, 광주 1,0

 

34명, 대전 1,596명, 울산 4,564명, 경기 14,747명, 강원 5,502명, 충북 1,927명, 충남 1,618명, 전북

 

1,668명, 전남 4,215명, 경북 9,810명, 경남 20,168명, 제주 333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부산과

 

경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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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駕洛國)이 망한 뒤에 허씨(許氏)자손들이 흩어져,

 

그 거주지에서 관적(貫籍)을 하였던 사실이 정사보(丁巳譜)의 가락국기(駕洛國記) 편에 나타나

 

있는 점으로 미루어,

 

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상계(上系)는 관향(貫鄕)인 김해(金海)에서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러다가 8세 허소?(許少●)의 자손들이 11세 허문손(許文孫ㆍ허순손(許順孫)의 대를 전후하여

 

경남 진주(晉州)ㆍ합주(陜州)의 삼가(三嘉)와 전남 순천(順天)등지로 옮겨가 살았고,

 

다시 18세 허훈(許勳)의 대부터 3대에 걸쳐 전남 광양(光陽)ㆍ승주(昇州)ㆍ여수(麗水),

 

경북 경산(慶山)의 하양(河陽)등지로 산거해가 그곳에 세거의 터를 굳혔던 것 같다.


 

또한 7세 허기(許麟)의 자손들은 경남 고성(固城)과

 

11세허순(許珣)이래로 합천(陜川)의 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영풍(榮豊)ㆍ진주(晉州)등지에

 

나뉘어 살았으며,

 

허족(許族)의 동생, 허시(許施)의 자손들은 10세 허의선(許義先) 이래로 의령(宜寧)과

 

허이곤(許以坤) 이래로 고령(高靈)의 구곡(九谷)에 정착하였다.


일부는 9세 허려(許旅)의 증손(曾孫) 허정손(許貞孫)의 대 이후에 하동(河東)에 살게 되었으며,

 

일부는 9세 허평중(許平仲)의 현손(玄孫) 허련(許蓮) 이래로 영천(永川)에가 살았던 것 같다.

 

 

7세 허귀년(許龜年)의 자손들은,

 

허귀년(許龜年)의 손자 허추(許錘)의 후계(後系) 평북 태천(泰川)을 거쳐 15세 허충정(許忠貞)

 

이래로 평북구 창성(昌城)에,

 

10세 허주(許註)의 후계(後系)는 충북 괴산(槐山)에 자리잡은 것을 비롯하여

 

13세 허동(許峒)이래로 경주(慶州)ㆍ충주(忠州)ㆍ창원(昌原)ㆍ수원(水原)ㆍ영덕(盈德)등지에,

 

10세 허량(許諒)의 대 이래로 선산(善山), 광양(光陽)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또한 허귀년(許龜年)의 현손(玄孫) 허희온(許希溫)의 후계(後系)가 강원도 홍천(洪川)ㆍ

 

횡성(橫城) 등지에 살았고, 허희온(許希溫)의 동생 허희량(許希諒)의 후계(後系)는 인제(麟蹄)

 

9세 허용(許鎔)의 후계(後系)는 경북 영일(迎日)의 장기(長鬐)에 ,

 

10세 허곡(許곡)의 후계는 허용(許鎔)의 아들 대부터 경북 대구(大邱), 달성(達城), 청도(淸道) 등지

 

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4세 허징(許澄)의 자손들은 선대(先代)부터 세거해온 김해(金海)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충북 진천군(鎭川郡),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일원과

 

경남 의령군(宜寧郡) 일원, 합천군(陜川君) 가회면(佳會面), 경북 달성군(達成郡) 성서면(城西面),

 

월성군(月城郡) 양북면(陽北面), 고령군(高靈郡) 개진면(開津面), 선산군(善山郡) 고아면(高牙面),

 

구미읍(龜尾邑), 평북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 김해허씨(金海許氏)의 대표적 집성촌으로는 경남 진양군(晉陽郡) 지수면(知水面) 승산리

 

(勝山里)를 꼽는다.

 

이 마을에 허씨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1세 허문손(許文孫)의 대부터였으며,

 

이후 4백여년간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세거의 터로 지켜져 왔다.

 

이 마을 2백여 호 가운데 1백여 호가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자손들이다.

 

이외에도 고성(固城), 의령(宜寧), 합천(陜川), 산청(山淸), 하동(河東)과 영천(永川),

 

용인(龍仁), 진천(鎭川), 홍천(洪川), 원성(原城), 대구(大邱)에 많은 자손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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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율원(허남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3.16 현대사회의 농촌사회엔 젊은이들이 떠나고 어르신들만 남아 집성촌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진주 승산마을과 고성 장산마을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 작성자깊은골(허성재) | 작성시간 15.03.17 판서공파 12세 이후 삼문문중은 장유면삼문리에 450 여년간 세거 해왔으며 산소가 불모산을 중심으로
    우측 능선으로 녹산까지 흩어져있어 개발붐을 타고 산단에편입되어 보상금을 많이 타는 음덕을 입고있다.
    지금은 장유신도시가 형성되어 전부 흩어지고 삼문리에는 3가구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문중회관을 장유에 만들었으며 김해시회현큰집, 상동의 큰집과 묘사.시제.향례,친목모임.허씨대동회등 유대관계를 유지하고있다.
  • 작성자허상호(남호) | 작성시간 15.08.27 정정을 해야할 듯 합니다. [허희온(許希溫)의 동생 허희량(許希諒)의 후계(後系)는 인산(麟山)에 ,] 에서 '인산(麟山)' --> 인제(麟蹄) 로
  • 답댓글 작성자율원(허남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8.27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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