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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선전관 이노(李櫓)와 함께 와서 봉서(封書) 하나를 가지고 입계(入
啓)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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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간의 정리에 멀리 전송하고자 하여
한강을 건너 양재역(良才驛)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보았더니, 국가
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가져와서 봉하여 아룁
니다. 이는 곧 익명서이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이고 인심
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여 아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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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각의 딸은 곧 신의 형(兄)의 며느리입니다. 함께 오다가 보았는데, 아주 참담한 내용이었
기에 함께 아뢰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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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뜻을 얻지 못하여 윗사람을 원망하는 자의 소행이다. 지금 내가 보기에도 매우 참혹하
다. 더구나 신하가 보기에 어찌 예사로왔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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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조금 후에 삼공이 이르렀다. 도승지(都承旨) 조언수(趙彦秀)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
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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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성 민제인(閔齊仁), 판중추부사 허자(許磁), 예조 판서 윤원형(尹元衡)도 명소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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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허자는 즉시 이르렀고, 민제인과 윤원형은 아직 이르지 않았는
데, 정언각이 올린 글【그 글은 붉은 글씨로 썼는데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政權)을 잡고
간신(奸臣)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
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仲秋月) 그믐날.’이라고 하였다.】을 빈청
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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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재변이 매우 많다. 하늘의 견책(譴責)이 어쩌면 이렇게 심하단 말인가. 염려됨이 적지
않아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다. 비록 분명하게 지적할 수는 없으나 각별히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하여 경들을 불러서 묻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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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서(朱書)를 보건대, 단순히 미련한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익명서이니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들으니, 요즈음 사론(邪論)【죄인을 가리켜 무복(誣服)했다 하고,
훈신(勳臣)을 가리켜 무공자(無功者)라고 한 것이다.】이 떠돌고 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과 시종들도 모두 들었으나 말이 나온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신들이 이미
들은 것을 사실대로 아뢰고자 하였으나 다만 사론이 나온 출처를 모르기 때문에 아뢰지 못하였
습니다. 이 글은 비록 믿을 수는 없으나 이것을 보면 사론이 떠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명소한 인원(人員)이 모두 오면 마땅히 들은 것을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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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조금 뒤에 민제인과 윤원형이 이르렀다. 전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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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뢴 뜻은 알았다. 외간(外間)의 사론을 위에서야 어떻게 알겠는가. 어찌하여 세월이 이미 오
래되었는데도 사론은 아직도 그치지 않는가? 매우 망극한 일이다. 그 글은 구석진 곳, 사람들
이 잘 보지 못하는 데에 써 붙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다 볼수 있는 역관(驛館)의 벽에다가 그렇
게 써 붙였으니, 어찌 본 사람이 없었겠는가. 심상하게 여기고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그 뜻
을 알 수가 없다. 주사(朱砂)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역관 가운데 반드시 아
는 자가 있을 것이니, 잡아다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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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을 잡아오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행인들이 출입할 때에는 역관에 숙직하는 사
람이 항상 있어서 비워 둘 때가 없으므로,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찰방(察訪)으로 하
여금 자세히 묻게 하면 적발해낼 수가 있을 것이므로 신들이 이미 찰방을 불러 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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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조언수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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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조금 뒤에 김광준이 이르렀다. 윤인경·이기·정순붕·허자·민제인
·김광준·윤원형이 함께 의논하여 그것을 써서 단단히 봉(封)하여 서명(署名)하고 입계(入啓)하
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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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서계는 이 벽서(壁書)를 보고서 비로소 서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들이 의논한 지가
여러 날 되었습니다. 당초에 역적의 무리에게 죄를 줄 적에 역모에 가담했던 사람을 파직도 시
키고 부처(付處)도 시켜서 모두 가벼운 쪽으로 하여 법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론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공신(功臣)이 긴요하지 않다는 말까지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일에 사론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화근이 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
이 함께 의논하여 아뢰니, 즉시 죄를 정하여 교서에 자세히 기록해서 중외가 다 알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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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 허충길(許忠吉)이 관중(館中)에서 말하기를 ‘이덕응(李德應)은 곤장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무복(誣服)한 것이다. 그것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허위이다.’ 하였으니, 추문하
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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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죄인들의 간사한 정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환하게 드러났으나, 죄를 정할 때에 그 괴수
(魁首)만 처벌하고 추종자들을 다스리지 아니한 것은,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차마 엄중한 율(律)로써 죄주
지 아니하고 모두 가벼운 쪽으로 다스리게 했던 것인데, 사론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은 엄
하게 다스리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아뢴 뜻이 당연하니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이완(李岏)은
지금 먼 곳에 귀양가 있으며 숨만 붙어 있어 조석(朝夕)을 보장하기 어려 운 형편이니, 이미 정
한 죄를 다시 고칠 것은 없다. 허충길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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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이 봉진(封進)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완(岏)·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은 일죄(一
罪)에 처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하고, 노수신(盧守愼)·정황(丁
熿)·유희춘(柳希春)·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絶島安置)하고, 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
昌)·정유침(鄭惟沈)·이천계(李天啓)·권물(權勿)·이담(李湛)·임형수(林亨秀)·한주(韓澍)·안경우
(安景祐)는 원방부처(遠方付處)하고, 권벌(權橃)·송희규(宋希奎)·백인걸(白仁傑)·이언침(李彦
忱)·민기문(閔起文)·황박(黃博)·이진(李震)·이홍남(李洪男)·김진종(金振宗)·윤강원(尹剛元)·조
박(趙璞)·안세형(安世亨)·윤충원(尹忠元)·안함(安馠)은 부처(付處)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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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이른바 화근이라고 한 것은 오로지 완(岏)을 가리킨 것입니다. 어찌 범연히 생각하여
아뢰었겠습니까. 종사를 위한 대계(大計)이니, 진실로 사사로이 용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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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육(骨肉) 간에 서로 죽이는 것은 예로부터 중대한 일이었다. 더구나 먼 지역에 내쳐서 숨만 겨우 붙어 있으니, 여얼(餘孼)이 없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고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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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삼공이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여기에서 그치고 말 일이 아니다. 다만 밤이
깊었으니 뒤에 다시 아뢰어야겠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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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기(李芑) 등이 을사년 사람들을 역적이라고 하고 그 일을 실증(實證)하기 위
하여 중종(中宗)의 아들인 이완(李岏)까지 죽이자고 계청하였으니, 너무 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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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일죄(一罪)’라는 것은 사사(賜死)하는 것입니까, 율(律)에 의해서 처리하는 것입니까?
감히 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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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는데,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
등은 주로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사화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
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말이다. 4대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
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
다.
사림파는 기묘사화 이후 중앙정치세력이 거의 없었는데,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고 1543년에는 김인후가 향약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
광조의 신원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으며,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빚어졌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
종을 낳았다. 이미 중종대에 외척 김안로를 축출하면서 다른 쪽 외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외척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것은 예고한 바나 마찬가지였다. 문정왕후는 그의 족질을 시켜 김안로
가 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를 하여 김안로를 제거했다.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공신계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외척들이 여기에 가세하여 단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뿐만 아니라 보다 복잡한 정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종의 제1계비 윤씨가 낳은 원자(元子)가 이미 세자로 책봉
되어 있었던 터에 제2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뒤의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尹元
老)·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두 외척간에 왕위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져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
원로·윤원형 형제를 소윤(小尹)이라 했다. 대윤과 소윤의 알력 가운데 중종이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인종은 즉위하여 중종 말년부터 진출해 있던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재위 8개월 만
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12세의 경원대군이 즉위했다. 모후인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
(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
으켰다. 윤원형은 핵심 동조 세력과 결탁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
(柳灌) 등을 양사(兩司)를 통해 제거하려 했다. 당시 양사는 사림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이를 반대하자 이기 등은 중신회의를 통하여 위 3명의 죄상을 아뢰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에서 일단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
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3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
고 양사의 관원을 파직시켰다. 또 위의 3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이어 종친인 계림군
도 관련되었다 하여 죽였으며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사림파
는 왕위계승 문제에서 대체로 인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했다. 을
사사화는 척신인 윤원형이 권신인 이기와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에게 타격을 가한 정치보복이었
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
신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일단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했다. 따라서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집단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을사사화의 경우 싸움은 외척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
었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지는 지배계급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부분적으로 정치
론에서 차이가 나거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비록 사림파가 화를 당한 것이
나 을사사화는 외척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정치적 갈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