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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旺山) 위(蔿)공 행장(行狀) 판서공파

작성자栗園 율원(허남균)|작성시간18.08.16|조회수120 목록 댓글 0

구한말 의병장 24() 행장(行狀)


호 왕산(旺山), 김해허씨 판서공파(判書公派)

1855년 생 1908927일 순국(殉國) 54

 

* () 왕산(旺山) 유사

공은 풍전등화처럼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면서 홀연히 궐기한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의 장수다.


서기 1897년은 일본인에게 살해된 명성황후의 국장이 있었고 황제의 연호를 광무(光武),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친 해였다. 이때에 공은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 성주(星州) 등지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고종황제의 해산명령에 따라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에 참봉(參奉),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지내고 1904년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2)에 올랐다.


공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 일본용어로는 乙巳保護條約)반대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되기도 했으며, 1907년에는 의병장 이린영 등과 원주에서 전국의병연합부대를 조직하여 내외에 공포하고 군사장이 되었다. 공은 일본통감부를 격파하기로 결정하고 300명의 선발대를 인솔하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으나 후속부대의 진로가 일본군에게 차단당함으로서 포위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창의순사(倡義殉死)하니 슬프다. 창의지장(倡義之將)이여! 우리 후손들은 모두 공의 우국정신(憂國精神)을 본받을 지어다.

* 창의순사(倡義殉死) :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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