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동 사람들 oil on canvas 116.8x91.2cm 1996
서울문학 2000년 봄호
시인이 보는 미술셰계
시인이 바라본 화가 ‘김 한’
김 정 아
바람. 바람이 불고 있다. 그의 가슴 굴곡 이는 옷자락 사이사이서 파란 바람이 불고 있다. 알 수 없는 한 자락의 비애와 그리움, 그의 그림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실향에 대한 향수가 파아란 무꽃처럼 무수히 떠들어대며 초가을의 문밖을 온통 그리움으로 서성이게 한다.
그동안 화단의 뒤켠에서 묵묵히 작가의 길을 걸어옴 중견작가 김한화백에서 묻어나는 짙은 향기를 맡게 된다.
그는 31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나 고향풍경과 그 안식처에 대한 그리움을 그 누구보다 피부 깊숙이 체감해온 실향 작가의 한사람.
19살 때 월남. 홍익대 미술학부를 거쳐 그동안 예술과 생활 속에 숱한 삶의 행로를 겪어 오면서 70년대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잃어버린 고향의 쪽빛 바다와 오랜 세월 가슴에 응어리지은 혈육애의 그리움과 고향 솔골 마을에 윙윙거리며 울어대던 애잔한 바람소리는 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게 했으며 상실의 아픔을 달래수 있는 글을 쓸 수밖에 없게 했다.
꿈꾸는 솔골 항구. 항구의 나비. 항구의 여인. 청호동 사람들…….그의 아틀리에 가득 메워진 대부분의 작품들이 실향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푸른빛, 푸름 바다가 그의 그림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양파. 양파의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마알간 속살이 드러난다. 똑 쏘는 그 빛, 그 푸른빛. 그러나 마지막 남은 그의 빛깔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화가이면서 도한 빼어난 서정적 감성을 틈틈이 시로 표현하여 대학노트 2권 분량의 다작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한사코 시인이길 거부한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깊고 아픈 삶의 격정적 소용돌이 속에 우리를 몰입해 들이면서 다시 회생의 그리움을 기다리게 하는 강렬한 빛의 소망을 엿볼 수가 있다.
봄비 내리는 창밖
해 저문 광화문
밤 깊은 거리에서
빛바랜 의자에 마주앉아
희미한 어둠속 가로등 옆
새싹으로 피어나는
한그루 은행나무를 바라보다가
지나간
먼 어느 가을날
금빛 수만 색종이로 떨어지는
노을에 타는
저녁 얘기를 내 가슴에 심는
광화문 네거리 가까운
까페 창가의 너의 눈빛이야
여린 꿈에 젖어있어
아직은
스치고 간 우수가 남아서 슬픈
나의 고운 사람아
너의 해맑은 얼굴에서
그 밤 봄도 되고
가을로도 물들고 있음을 보았네
‘저녁 광화문에서’
서로 예술의 장르는 다르나 존경하는 마음과 신뢰로 다져져 동기처럼 지내는 시임 구상 씨는 “그를 사귀며 놀라는 것은 어쩌면 그의 중섭(작고 화가)을 많이 닮았나하는 느낌을 받는다”며 “그의 숫되고 착한 인품을 비롯하여 그림의 재재 자체가 두 사람이 밀착되어 예술의 세계가 일치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뛰어난 시성을 또한 감탄했다.
성근 밭이랑 사잇길
패인 마음의 들녘을 지나
찬 무서리 내린 나의 세월은
붉게 타던 화혼 길이나
솟아오르는 햇빛
그 한량없는 은혜의 산허리를
숨차게 돌면서
눈 감듯이 날아왔네
내 인생은
그 날갯짓
구름 한 점 외로이 떠가는
잊을 길 없는 겨울 한나절
어느덧
한낮의 태양은 나의 들을 밝히네
그 태양은 이제사
나의 가슴속에 일렁이네
‘나의 세월은’중에서
산허리 마을. 까치산역을 끼고 정착한 것은 1980년. 그는 그곳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여러 번의 국제 교류전과 8번의 개인전을 거쳐 지난 95년 제7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 앞에서 언제나 목마르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목마름.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초조와 불안, 밤을 새워 별을 따는 열정으로 쏟아냈던 작품이 다음날 아침엔 눈부신 햇살아래 산산이 일그러지는 듯 한 그 막막한 허타감. 그는 그 먼 세월을 헤쳐 오며 끝없이 작품 앞에서 절망하고 고뇌하며 그러면서도 그림을 사랑해 왔다.
미술평론가 유준상 씨는 김화백의 그림 세계를 “생명의 실현이 어떤 고원한 사상이나 관념체계로 부터가 아니라 심장의 맥박으로부터 고동치는 현상처럼 그의 예술은 무한대로 전개되는 푸르름의 공간을 구상하는 푸른 입자들이 짜임새에 젖어들면서 시작된다고 비유해 볼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진정한 작가란 또 다름 작품 세계를 향하는 아픔과 외로움, 끝없는 목마름으로 고대하며 그 고통을 다음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아닐까.
그는 작년 12월부터 20일간 조산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미술상 수장작가 10인의 작품전에 여러 점의 작품을 출품해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다.
서울문학 2000년 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