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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소설. 아빠라는 말

작성자억냥|작성시간26.06.19|조회수41 목록 댓글 0

작품명 :


김일량 _ 아빠라는 말 _ 소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엄마! 엄마!”
“엄마 아닌데? 이웃집 아줌마야.”
“엄마 맞아.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엄마!”
아름의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툭.
액정 위로 거미줄 같은 금이 번져갔다.
“언니! 여기서 왜 이래?”
어느새 나온 유미가 떨고 있는 아름의 어깨에 외투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카페 ‘블루’ 안으로 부축해 들어갔다.
“언니, 무슨 일인데 그래?”
유미는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며 물었다.
“말해서 뭐 하겠어.”
“언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말해 봐.”
아름은 물컵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년 전, 회사 회식 날이었다.
민수는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야근하는 날이면 커피를 건네며 힘들지 않냐고 웃어 보이곤 했다.
그래서 그날도 아무 의심 없이 술잔을 받았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기억은 끊겨 있었지만 몸은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선 아름은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 가장자리만 붙잡았다.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름은 아직도 그날 호텔 복도의 카펫 무늬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날 밤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담당 형사는 몇 가지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호텔 CCTV는 이미 삭제됐습니다.”
회식 참석자들에게도 연락이 갔다.
하지만 술자리가 길어졌다는 말뿐, 누구도 그날 밤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며칠 뒤 경찰서에 다시 불려 갔을 때였다.
형사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상대방은 합의된 관계였다고 진술했습니다.”
아름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십니까?”
같은 질문이 반복될수록 아름은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아름은 아이를 낳기로 했다.
몇 달 뒤 민수는 자취를 감췄다.
아름은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시골로 내려갔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숨도 날마다 깊어졌다.
소문을 피해 대전 이모 집에 숨어 지냈고, 긴 진통 끝에 상민이를 낳았다.
아이가 웃을 때마다 아름은 눈물을 삼킨 채 따라 웃었다.
“그때는 사람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
어느새 술잔이 몇 번 비워진 뒤였다.
아름은 빈 잔을 유미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다섯 살이야. 시골에서 엄마가 키우고 있어.”
유미는 술만 다시 채웠다.
아름은 소리 없이 웃었다.
“상민이가 다섯 달 되었을 때 돈을 벌려고 서울로 올라왔어. 아이 울음소리가 기차역 끝까지 따라오더라.”
분유값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렇게 흘러들어간 곳이 지금의 술집 일이었다.
“그때는 사람 말 한마디도 다 진심인 줄 알았지.”
아름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처음에 철호는 상민이에게 정말 잘했다.
말수는 적고 무뚝뚝했지만, 아름의 힘든 기색만큼은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어느 겨울 새벽이었다.
아름이 밤일을 마치고 골목 끝 편의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얇은 하이힐 뒤축이 부러진 날이었다.
“왜 여기 앉아 있어?”
철호는 헬멧도 벗지 못한 채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냥 좀 쉬려고.”
“신발은?”
아름은 괜히 웃었다.
“망가졌어.”
철호는 깨진 하이힐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그녀 앞에 등을 돌려 앉았다.
“업혀.”
“뭐?”
“타.”
“미쳤어?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
“새벽 네 시에 누가 본다고 그래.”
아름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의 등에 올라탔다.
철호의 작업복에서는 젖은 시멘트 냄새가 배어 나왔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는데도 그의 등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무겁냐?”
아름이 불쑥 물어보자 철호는 피식 웃었다.
“상민이보다 가볍네.”
“거짓말.”
“진짠데.”
철호는 그녀를 살짝 추켜올렸다.
아름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상민이가 두 살 무렵, 잠시 서울에 와 있었을 때였다.
상민은 철호만 보면 그의 등에 매달렸다.
“아빠! 목말!”
“또?”
철호는 투덜거리면서도 상민을 목말 태워 줬다.
상민은 두 팔을 휘저으며 까르르 웃었다.
“엄마보다 높다!”
“야, 엄마 들으면 혼난다.”
“엄마는 작아.”
부엌에서 듣고 있던 아름이 국자를 들고 나왔다.
“누가 작아?”
상민은 얼른 철호 목 뒤로 숨었다.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 안 했는데?”
그날 저녁 상민은 엄마에게 쫓기고 아빠에게 숨는 놀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반지하 방은 오랜만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철호는 상민의 손을 잡고 동네 목욕탕에 다녀왔다.
잔뜩 김이 서린 밤거리에서 상민은 삶은 달걀을 양손에 꼭 쥔 채 졸고 있었다.
“얘 잔다.”
“내가 안을게.”
“됐다.”
철호는 잠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걸었다.
상민은 잠결에 철호의 목을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
“아빠......”
철호의 발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왜 그래?”
그녀가 묻자 철호는 목 뒤만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니...... 그냥.”
상민은 가운데에서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철호는 잠든 상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처음이야.”
“뭐가?”
“누가 기다리는 거.”
철호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민이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퇴근하면 불이 켜진 방이 있다는 것도 좋았다.
아름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철호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공사 끝나고 집 오는 게 좋은 것도 처음이야.”
머리를 긁적였다.
“돈 많이 벌어서 셋이 방 두 개 있는 데 가자.”
아름은 웃으며 물었다.
“두 개나 필요해?”
“당연하지. 상민이가 크면 자기 방 있어야지.”
“그럼 당신은?”
“나는 베란다에서 자지 뭐.”
“추워 죽어.”
철호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만 바라봤다.
그날 새벽, 아름은 철호가 잠든 뒤에도 눈을 감지 못했다.

카페 ‘블루’ 안은 고요했다.
철호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초저녁이었지만 가게는 한산했다.
철호는 도박에 손을 대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공사장 동료의 권유로 카드판에 한 번 앉았다가 돈을 땄다.
처음에는 금방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잃은 돈을 되찾으려 다시 앉으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생활비마저 손대고 있었다.
며칠 뒤 사채업자가 찾아왔다.
“언제 갚을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사내가 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유치원 등원길 사진이 떠 있었다.
철호는 그 사진이 어떻게 찍혔는지 묻지 못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엽네.”
사내가 사진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아빠 닮았어.”
철호의 손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왜 그런 사진을 갖고 있습니까.”
“돈 받으려고.”
사내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번 주까지 안 갚으면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 찾아갈 거야. 그놈들은 말이 안 통해.”
철호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도 줍지 못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사진 속 상민의 얼굴을 다시 한번 두드렸다.
철호의 턱이 굳게 다물어졌다.
휴대전화 화면 속 상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그날 철호는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자신이 집에 돌아갈수록 빚쟁이들의 시선도 그 집을 향하게 된다는 사실이.
그리고 결국,
상민이를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어 버렸다.

조용한 카페 ‘블루’ 안에서,
카페 주인 미선이 툭 말을 던졌다.
“빚만 남기고 결국 숨어버린 거야.”
아름은 술잔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래도...... 왜 도망쳤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철호는 새벽 인력시장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일이 끝나면 철호는 카페 ‘블루’ 근처를 서성였다.
몇 번이나 문 앞까지 갔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어느 늦은 새벽이었다.
가게 문이 열리고 아름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
철호는 본능처럼 몸을 숨겼다.
그녀는 비틀거리듯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철호는 젖은 골목에 선 채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카페에서는 여전히 과거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미선은 어느새 철호를 실컷 흉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쾅쾅!
누군가 셔터 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오늘 영업 안 해요. 쉽니다.”
미선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딱 한잔만 하자고요. 오늘은 돈 좀 쓰고 싶은 날이라니까.”
“오늘은 장사 안 해요. 다음에 오세요.”
“아니, 장사도 안 하면서 불은 왜 켜 놓은 거요?”
“지금 막 문 내렸어요.”
셔터 문은 내렸지만 철망 너머로 가게 안이 훤하게 다 보이고 있었다.
아름은 손님의 뒷말이 우스꽝스러웠다.
‘돈 좀 쓰고 싶다고?’
아름은 속셈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돈 앞에서는 못 버티는 게 내 팔자잖아.”
아름은 가운을 걸치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미선과 유미는 필사적으로 아름을 말렸다.
“이렇게 술에 취했는데 어쩌려고 그래? 언니! 오늘은 그냥 좀 쉬자.”
유미의 간곡한 만류에도 아름은 막무가내였다.
기어이 셔터를 올렸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아주 건장한 청년이었다.
아름은 청년의 모습에서 문득 철호가 스쳐 갔다.
일하다가 종종 있는 현상이었다.
가끔 손님들 사이에서 그런 눈빛을 발견하곤 했다.
‘미쳤지...... 그 새끼를 왜 아직도 떠올려.’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비 오는 새벽이면 늘 그가 먼저 떠올랐다.
청년은 술과 안주를 많이 시켰다.
그리고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아름에게 시선을 멈췄다.
순간 어딘가 낯익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몇 번 망설이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누나 이름이 아름 씨예요?”
아름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
청년은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아는 형이 늘 찾던 사람 이름이......”
“찾던 사람?”
“아, 아닙니다. 제가 괜히 이상한 말을 했네요.”
청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누나는 여기서 오래 일하셨어요?”
“꽤 됐어요.”
“아이 있으세요?”
아름은 술잔 속을 들여다봤다.
“네, 있어요.”
“보고 싶겠네요.”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도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가게 안에는 술 냄새와 오래된 음악 소리만 희미하게 떠다녔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양주병 하나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청년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형이 있는데요.”
아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형이 늘 사진을 들고 다녔는데 아이 이름이 상민이었어요.”
아름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요?”
“술만 마시면 그 사진을 꺼내 봤어요. 아기 사진 하나랑......여자 사진 하나.”
아름이 쥔 물컵 표면의 물방울이 손바닥을 차갑게 적셨다.
“오늘 누나를 보는데 그 여자랑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름은 시선을 떨궜다.
청년은 잠시 밖을 걸으며 이야기하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숨을 돌리고 싶었던 아름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눅눅한 새벽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다.
젖은 골목 바닥 위로 네온 불빛만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청년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 말했다.
“근데 그 형, 요즘 완전히 망가졌어요.”
아름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누나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달라졌어요. 자기는 다시 가면 안 된다고...... 맨날 그런 말만 했거든요.”
그 말이 끝나자 아름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청년이 급히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아름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숨이 한 번에 넘어가지 않았다.
청년은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근처에 그 형이 사는 자취방이 있는데...... 잠깐 가 보실래요?”
아름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디든 기대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낡은 지하방 문이 열렸다.
작업복 차림의 사내 하나가 방바닥에 기대앉아 있었다.
거칠게 갈라진 손에는 구겨진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
문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름의 손이 문고리를 움켜쥔 채 굳어 버렸다.
철호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오래된 형광등 소리만 방 안을 맴돌았다.
“...... 철호?”
오랜 시간, 수도 없이 불러 본 이름이었다.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오자 낯설 정도로 떨렸다.
철호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다.”
아름의 윗니가 아랫입술 안쪽을 눌렀다.
“왜 이제 나타났어?”
철호는 담배 냄새가 밴 작업복 소매만 괜히 움켜쥐었다.
“죽은 줄 알았어.”
아름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경찰서 문 앞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사고 기사만 보면 이름부터 확인했다.
“근데 살아 있었네.”
눌러 두었던 감정이 새어 나왔다.
수없이 상상했던 순간이었다.
욕을 퍼붓고 뺨이라도 때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눈앞의 철호는 기억보다 훨씬 작고 초라해 보였다.
아름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살아는 있는 건지,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사고가 난 건지.”
“......”
“상민이가 아빠 찾을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아름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당신은......”
말끝이 흐려졌다.
많은 날에 되뇌었던 말들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철호를 마주하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철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하려고 나온 거야?”
“......”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도 없더니.”
철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아름의 손등에는 핏줄이 희게 도드라져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최악이야.”
철호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알아.”
그 한마디에 방 안이 다시 적막해졌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철호는 갑자기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그는 낡은 통장 하나를 건넸다.
모서리는 해져 있었고 표지는 여러 번 접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름은 통장을 펼쳤다.
입금 내역은 몇 년 동안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액수는 크지 않았다.
그 작은 돈들이 쌓인 시간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름은 통장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안 쓰고 모은 거야.”
철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민이 주려고.”
아름은 통장을 넘기다 말고 멈췄다.
송금 날짜는 몇 년째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손끝이 숫자 위를 더듬었다.
잉크가 번져 보인 건 눈 때문인지 오래된 통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 날 우연히 가게 안에 있는 널 봤어. 그런데 문을 열 수가 없더라.”
철호는 혀끝으로 말라붙은 입술만 살며시 훑었다.
“어젯밤 일은...... 내 후배가 꾸민 일이야.”
“뭐?”
아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몇 달째 네 근처만 맴돌았어.”
철호는 손끝에 묻은 시멘트 가루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런데 그놈이 멋대로 나섰다.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그래서 일부러 사람을 보낸 거야?”
“아니.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놈이 괜히 눈치 없이 일을 벌였어.”
아름은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철호는 담배를 꺼내다 말고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상민이......한 번만 보게 해 줘.”
아름은 단단히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상민이를 보고 싶다고?”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당신이 버리고 간 애를?”
“......”
방 안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름은 철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 액정에는 익숙한 번호가 여러 번 떠올랐다.
아름은 화면만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뒤집어 놓았다.
유미가 물었다.
“안 받을 거야?”
“응.”
“그래도 무슨 말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름은 씁쓸하게 웃었다.
“듣고 싶지 않아.”
휴대폰 화면이 꺼질 때까지 아름은 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엄지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를 몇 번 맴돌다 멈췄다.
지워 버리면 정말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끝내고 싶은 마음과 끝낼 수 없는 마음이 자꾸 부딪혔다.
늦은 밤.
카페 문을 닫고 나오던 아름은 골목 건너편에 서 있는 철호를 발견했다.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고개만 숙였다.
아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철호의 머리카락에는 비가 젖어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아름은 끝내 모른 척 지나쳤다.
철호도 따라오지 않았다.
젖은 골목에 두 사람의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몇 개월 뒤.
시골 마당 끝, 낡은 감나무 아래.
상민은 낯선 남자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누구야?”
철호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말했다.
“나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상민이 아빠야.”
아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로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아빠? 우리 아빠는 없는데?”
철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들고 있던 장난감 자동차가 손안에서 삐걱 소리를 냈다.
손에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철호는 숨이 멎는 듯했다.
“미안하다. 너무 늦었어.”
철호는 아이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상민은 한 걸음 물러섰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어.”
그는 억지로 웃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따라오면 안 된다.”
철호가 주머니에서 작은 장난감 자동차 하나를 꺼냈다.
“이건......아빠가 사 온 건데, 너 주려고.”
상민은 선뜻 손을 뻗지 않았다.
“나 그런 거 안 받아.”
철호는 장난감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럼 그냥 여기 둔다.”
그때였다.
멀리서 아름이 지켜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얼굴.
철호는 아이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상민아. 아빠가 잘못한 게 많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데...... 이제는 도망 안 갈 거야.”
상민은 가만히 물었다.
“왜 이제 와?”
철호는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 돌사진,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철호는 구겨진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닳아서 얼굴이 잘 안 보일 정도야.”
그 말에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예상 밖으로 또렷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도...... 아빠라는 말은 처음 들어봐.”
그는 상민의 옷깃을 가만히 정리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상민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아빠...... 는 뭐 하는 사람이야?”
철호는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앞으로 네 옆에 있을 사람.”
상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도?”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지금부터.”
잠시 후, 상민이 손가락으로 자동차를 집어 들었다.
툭, 철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이거 같이 가지고 놀자.”
철호는 그제야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아이 손을 감쌌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아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철호가 아이 앞에서는 웃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민이 아쉬운 눈으로 철호를 바라봤지만 아름은 그대로 아이를 데리고 돌아섰다.
철호는 붙잡지 못했다.
그날 이후에도 몇 달 동안 철호는 시골을 오갔다.
상민은 여전히 ‘아저씨’와 ‘아빠’를 섞어 불렀다.
철호는 그마저도 고마웠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며칠씩 버틸 수 있었다.
아름은 달랐다.
시간이 흐르자 상민은 어느새 철호의 등에 매달려 깔깔 웃고 있었다.
아름은 그 웃음소리를 듣다가 감나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당 끝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두 사람을 오래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작은 손으로 철호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철호는 상민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나직이 말했다.
“상민이 옆에 있게 해 줘.”
철호는 손을 뻗었다.
아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철호가 내민 손은 허공에 머물렀다.
아름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감나무 줄기만 바라보았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떨리는 숨결만 철호 어깨에 닿았다.
얼마쯤이었을까.
울음을 삼키던 아름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멎자 얼굴이 너무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 와서...... 다 돌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
“......”
아름은 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냈다.
그리고 땅바닥에 내던졌다.
철호는 떨어진 통장을 바로 줍지 못했다.
“이걸로 뭐가 돼?”
그는 입안만 몇 번 굴리다가 겨우 말했다.
“변명할 말이 없다.”
아름은 웃으려 했지만 그냥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모르겠어.”
상민은 두 사람 눈치를 보며 작은 손으로 장난감 자동차만 굴리고 있었다.
아름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상민이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 뒤,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 상민이를 만나고 간다는 어머니 말만 들었다.
“이번에도 왔다 갔어.”
“그래?”
아름은 더 묻지 않았다.
철호는 계절이 바뀔 때까지 시골을 드나들었다.
감나무 가지를 치고, 창고 지붕을 고치고, 울타리를 손보며 말없이 시간을 쌓아 갔다.
“엄마, 아빠 또 왔다 갔어.”
상민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름은 대답을 삼켰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했다.
“사람이 변하는 건 어렵다더니.”
아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상민이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뭐 그려?”
“우리 가족.”
종이 위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름은 잠시 웃었다.
“할머니는?”
상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는 옆집.”
아름은 피식 웃다가 그림 한쪽을 바라보았다.
상민은 철호 얼굴 옆에 커다란 하트를 그려 넣고 있었다.
아름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미워하는 일도 예전처럼 쉽지 않았다.
상민이 웃을수록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가장 싫었다.
“아빠 좋아?”
상민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응.”
“왜?”
“같이 놀아 주잖아.”
아름은 그림 위에 그려진 하트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녀는 다시 카페 ‘블루’로 나갔다.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웃을 수가 없었다.
손님들 틈에서 웃고 떠들다가도 문득 굳어버리는 날이 많아졌다.
“언니 요즘 왜 이렇게 넋이 없어?”
유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아름은 대충 둘러댔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며칠 전 시골에서 돌아오던 날,
상민이가 차 안에서 잠들기 직전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엄마.”
“왜?”
“아빠 또 와?”
순간 아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상민은 창밖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아빠 생긴 거 좋았는데.”
아름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괜히 힘을 줬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한참 뒤에야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날 밤, 상민은 잠들었다.
아름은 아이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돌아서 버린 경찰서 문.
그리고 이름 하나.
민수.
예전엔 그 사람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줄 알았다.
그날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만으로 상민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아름은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자는 동안에도 입가에 웃음이 남아 있었다.
“아빠......”
잠결에 흘러나온 한마디에 아름은 눈을 감았다.
방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며칠 뒤 늦은 밤이었다.
셔터를 내리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철호였다.
얼굴은 수척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아름은 말없이 의자를 밀어 주었다.
철호는 손등의 굳은살만 내려다봤다.
“요즘도 공사 나가?”
“나간다.”
“잘 지내?”
그는 웃었다.
“잘 지내는 게 뭔지 모르겠다.”
철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돈만 벌면 되는 줄 알았어.”
그는 물컵을 감싸 쥐었다.
“근데 아니더라.”
“......”
“집에 들어가는 게 더 어려운 거였어.”
“......”
“상민이 학교 들어가는 건 보고 싶더라.”
철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철호는 그날도 커피값을 계산한 뒤 먼저 일어섰다.
예전처럼 붙잡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아름은 창밖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문이 닫힌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철호는 이후에도 한 달 넘게 카페를 찾았다.
들어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아름도 먼저 붙잡지 않았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했고, 추우면 춥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침묵은 예전보다 덜 불편했다.
시간은 조금씩 흘렀다.

어느 늦은 겨울날이었다.
철호는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허리 보호대가 겉옷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재활 치료를 받은 지 두 달째였다.
아름은 따뜻한 커피를 그의 앞에 놓았다.
철호는 컵을 감싸 쥐었다.
아름의 시선은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가게 안쪽에서 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철호가 고개를 들었다.
상민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상민은 철호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쉬지 않고 무언가를 떠들어댔다.
철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카페 안에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가볍게 흩어졌다.
민수의 이름은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의 진실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그 이름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빠, 빨리 와!”
상민이 철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철호는 못 이기는 척 아이에게 끌려갔다.
창문에 비친 겨울 햇살이 천천히 바닥을 밀고 들어왔다.
아름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감나무 가지 끝에 걸린 겨울 햇살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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