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수필

미당천

작성자김우|작성시간23.05.26|조회수15 목록 댓글 1

미당천

 

 

며칠 전 바로 광복절이었습니다. 가끔 아침 일찍 집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는 나는 그날도 간편한 옷차림으로 왕미초등학교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늘 열려 있는 작은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나왔으니 아무데나 가까운 곳을 달리고 돌아갈 요량으로 길옆의 미당천을 따라 시골길을 천천히 달렸습니다.

 

공휴일 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끔 어울리지 않게 지나가는 자가용 외에는 아침의 고즈넉한 평화는 나를 묘한 적요의 세계로 몰아갔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 내리던 비가 그쳐서인지 흙은 깨끗하였고 공기는 숨 막힐 정도로 명정하였습니다. 길 옆에는 많은 농작물들이 그 모양을 자랑하며 서 있었습니다. 키 큰 옥수수들은 키 작은 콩 위로 훤칠한 줄기들을 내려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으며 모두들 호박꽃, 호박꽃해서 못생긴 상징으로만 생각한 호박꽃은 밭 주위를 척하니 감싸고 있어 그 강렬한 노란색은 차라리 요염하였습니다. 옆에는 토마토도 있었습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야생 토마토의 이국적인 향은 달리던 걸음을 슬그머니 멈추게 하였지요.

 

달리는 호흡이 가빠서였나 봅니다.

갑자기 무작정 밭 가운데로 헤치고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자기터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마구 어지럽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의 말마따나 햇살이 따가워서 일까요? 야만적인 약탈의 유혹은 이 질서정연한 생물들을 마구 헤집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울끈 불끈 못된 힘들이 마구 치솟는게 아닙니까?

 

이때, 한 인기척이 나를 진정케 하였습니다. 약간은 높은 언덕 밭에서 한 아낙이 조금은 당황해 하며 나를 비꿈히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길을 달리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지요. 나 또한 무성한 콩잎에 가려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작은 덩치를 콩잎으로 감싸고 있던 여인과의 마주침도 잠깐이었습니다. 서로의 무심한 일별은 이내 온갖 풀 향기에 묻혀 사라졌습니다. 크고 작은 돌멩이로 밭 가장자리를 경계지은 것이 보였는데 아마 소중한 밭의 흙이 비에 쓸리지 않게 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그 지혜의 흔적을 따라 다시 천천히 달렸습니다.

내가 달리는 미당천의 맑은 물속에는 모름지기 사방에서 모인 온갖 물고기 떼들로 부산하게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꽤 많이 뛰었나 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었는데 마치 인생의 한 부분이 미당천이 품고 있는 많은 식물들과 고기떼처럼 천천히 내 앞길에 펼쳐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나는 한 시골도시의 조그만 둥지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인간과 자연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저 조금 멀리 나왔더니 말입니다.

주변을 찬찬히 한 번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조금만 나와 보십시오. 사람 많은 이름난 산이나 바다에서는 볼 수 없는 조용한 자연과의 만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한 발 떨어져서 보고 있노라면 평소 잊고 지내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늘 같은 생활 속에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놓친 것들이 씨익 웃으며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소리 없이 허덕인 저의 일상에 전우익할아버지의 말처럼 '집지게 놀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듯합니다. 이날 미당천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 주었습니다.(2002/8)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성문 | 작성시간 23.06.11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신 것 같습니다.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