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심재영
세상은 늘 높은 곳을 향해 집을 짓지만
비는 낮은 곳에 먼저 고인다.
바람에 찢긴 깃발처럼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주머니보다 한숨이 더 무겁고
웃음보다 침묵이 더 익숙한 사람들,
그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가장자리에서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마른 강바닥이 돌을 드러내듯
상실은 사람 안의 깊이를 드러낸다.
무너진 담장 곁에서
누군가는 희망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누군가는 내일이라는 불씨를
두 손으로 감싸 쥔다.
세상은 꽃이 핀 가지를 바라보지만
뿌리는 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을 찾는다.
환한 광장의 현수막보다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풀잎 하나,
긴 겨울 끝에 싹을 밀어 올리는 나무의 힘.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열리는 문이 아니라
얼어붙은 땅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씨앗의 일.
밤이 길수록 새벽은 더 먼 곳에서 오고,
가난할수록 사람은 더 깊은 곳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무너진 시간을 꿰매고
상처 난 자리마다 조용히 빛을 심는다.
돌무더기뿐이던 자리에서 풀 한 포기가 돋아나듯,
사라진 줄 알았던 강물이 다시 길을 찾듯,
삶은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은 언제나 가장 늦게 도착하면서도
가장 먼저 봄을 데리고 온다.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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