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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들 -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서

작성자권순태|작성시간09.02.02|조회수519 목록 댓글 0
성경: 사사기 7 : 2
제목: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서
일시: 2009. 2. 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얼마 전 대한민국 어느 센서스기관에서 종교인구 조사를 했는데, 한국의 종교인구는 약 8천만 명으로 집계된 우스운 일이 있었다. 기독교는 1200만 명, 카톨릭은 800만 명, 불교가 5천만 명, 그리고 기타 다른 종교 도합 해서 약 1000만 명 정도 되어 총 8천만 명이 된 것이다. 무려 3천만명이상의 허수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수에 민감하다. 나는 수에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말하는 것이다. 목사 역시 수에 아주 민감하다. 저 역시 그러하다. 교회가족들이 얼마나 되느냐의 질문을 받으면 자꾸 반올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왜 수에 민감한가? 수는 파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파워에 의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II. 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더불어 싸움을 하실 때 기드온의 군사의 수를 줄였다. 미디안과 싸우려고 하롯샘 곁에 진을 친 기드온의 군사는 총 32000명이었다. 하나님은 그 수가 너무 많다고 해서 “두려워 떠는 자”를 골라내어 32000에서 10000으로 줄이셨다.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하여 그 만 명을 물가로 인도하여 물을 마셔보게 했다. 개처럼 핥아먹는 자와 무릎을 꿇고 먹는 자를 제외하여 10000에서 300명으로 줄였다. 전장터에 많이 가서 싸우면 좋을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기드온의 군사의 수를 줄였을까? 그 이유는 2절에 분명하게 나온다.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리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하신다. 숫자를 줄이신 것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긍할까봐이다. 기드온으로 하여금 수를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실 때 종종 바닥까지 치게 하신 다음에 사용하신다. 갈 때까지 가게 하신 다음에 나서서 일하신다. 왜 그런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교만하여 “내가 했다”고 우겨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닥을 치지 않고 우리에게 뭔가 있어서 했다고 치자. 그러면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인지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인지 우리는 착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하셨는데, 내가 지혜로워서, 내가 인맥을 잘 동원해서, 내가 경영을 잘해서, 내가 재능이 좋아서, 내가 노력해서 되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여 무슨 일을 하실 때 먼저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어 사용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걷게 하셨는가? 한 두 달 정도 이동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신명기 8장 12-14절을 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애굽 땅에서의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이후에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갈 때까지 가게 하시고 코너로 모신 다음에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들이 원할 때 후사를 주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초조해졌다. 그래서 그들의 유업을 이을 자를 충실한 종 다메섹 엘르에셀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다. 계속해서 기다리지만, 자녀가 없자 사라는 그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그의 몸종 하갈을 통해 후사를 낳으라는 허락을 받는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가정에 불화를 주었을 뿐 하나님이 약속한 사라를 통한 자녀는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는가?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고 아브라함이 나이가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 기다림은 인간적인 소망의 빛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만일 20,30대에 아기를 주었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약속의 자녀인지 내가 젊어서 아기를 잘 낳을 수 있어서인지 착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미 소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은 일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보던 32000명을 300명으로 줄이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시련과 어둠의 터널을 지나게 하실 수 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하시게 하고 아기를 낳도록 100세까지 기다리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기적을 창출하시는 하나님을 보아라. 300명으로 미디안을 이기시는 하나님은 극적인 드라마를 목격하라. 지금 내 손에 가진 것이 없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를 체험하는 때임을 알라.

III. 그 바닥에서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하나 있다. 시련과 고통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체험하겠다고 그러한 상태를 요청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기드온도 하나님께 300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니 그냥 그렇게 따라 한 것이었지 얼마나 초조했겠는가? 도무지 하나님이 어찌하려는가 싶었을 것이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기 보다는 바로 가나안으로 직행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광야생활이 소풍인가? 민족의 대이동으로 전쟁의 시간이었다. 100세에 아기를 기다리는 초조함이 아니라, 젊을 때 아이를 확 주세요라고 하기를 원하지 않는가? 치료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어서 건강을 버리고 아주 곤란한 병에 걸리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극적으로 일이 이루어지고 역전의 드라마가 연출되는 것이 간증이 되고 멋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의 손에 이미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순수해지고 싶어 버려야만 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께서 왜 수를 줄이셨는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드온과 이스라엘백성들이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스라엘이 교만하기를 경계하셨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300명으로 수를 줄이라고 하셨지만, 만일 기드온이 300명의 수를 계속해서 믿었다면 200명으로 줄이고 100명으로 더 줄였을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300명의 용사를 주신 것은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만일 우리 손에 무엇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면 그것을 버릴 필요는 없다. 아니, 이미 버린 것이다. 우리는 내 손에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르시고 요구하시면 던져버릴 수 있는 태도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내 손에 32000명이 있어도 그것은 300명과 마찬가지이다. 보통 우리는 가진 것을 믿다가 나중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는데, 애초부터 “천부여 당신 밖에 의지할 것은 없어서, 있는 것도 손털고 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느 경우가 더 믿음이 좋은가? 믿을 것이 없어 하나님 외에 다른 방도가 없을 때 믿은 벼랑 끝 신앙보다, 믿을 것이 여전히 많은데도 그것을 다 가치절하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것이 겸손한 모습이다. 자긍할 것이 있는데도 자긍하지 않는 모습이다.
알아서 기라!!!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도 할 수 있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도록 모든 자리를 내어 드리라.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 나이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다른 이들과 탁구를 칠 때 잘 치는 사람보다 나보다 한 수 아래의 사람들과 치게 된다. 그러면 보통 싱겁게 느껴진다. 어떤 서브를 해도 아마추어가 이리 꼬고 저리 꽈서 넘기는 볼은 원리를 알기에 넘길 수 있고 가끔은 그냥 스매싱으로 때릴 수 있다. 그런데 가끔은 내가 막지 못하는 희안한 볼을 넘긴다. 그때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이스샷이다. 왜 그 말이 튀어나오는가? 나로 하여금 못 막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찌 그런 볼을 칠 수 있었지? 대단한데! 라는 표현이다. 내가 막을 수 있는 볼이면 싱겁고 내가 막을 수 없는 볼을 넘기면 나이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나이스 샷이라고 말할 때는 나는 그것을 대단히 여긴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언제나 나이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기드온에게 32000명으로 미디안과 싸워서 이겼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님 나이스샷보다는 우리 군사 나이스샷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이스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우길까봐 하나님께서는 아예 300으로 줄이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32000이 있어도 우기지 않으시고 교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수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교만하지 말라. 이런 고백을 하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해 주셨습니다.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저의 가정을 이렇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건강을 주셨습니다. 사업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이스!

IV. 지금 내 손에 든 것이 무엇인가? 엘리야를 대접해야 할 사르밧 과부와 같이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 밖에 없는가?(왕상 17:12) 내 손에 있는 것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과 같이 내 손에 있는 것이라고는 물매와 막대기와 조약돌 몇 개 밖에 되지 않는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의 저녁식사를 위해 주님께 자신의 작은 것을 가지고 온 소년과 같이 나의 손에 든 것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 정도밖에 없는가? 미디안과 전쟁을 해야 하는 내게 있는 병사라고는 300명의 용사밖에 없는가?
하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혹 내게 32000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는가?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가? 하나님을 거스려 자긍하지 말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라.
우리 각인은 작은 사람들이다. 가진 것도 없다. 능력도 딸린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들은 우리 삶에서 체험할 수 있다. 겸손의 경계선에서 주님을 만난다. 겸손의 경계선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기드온에게 있어 겸손과 교만의 경계선은 300명이었던 것이다. 수가 더 많았다면 기드온은 자긍하였을 것이다. 그때는 패배가 그에게 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 : 18) 하지만 그에게 300명의 용사가 있었기에 그것 믿을 바가 아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비록 가진 것이 300명의 용사밖에 되지 않아도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영적인 미디안을 이기는 승리가 이번 주에 있기를 축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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