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린도전서 10 : 1 - 12
제목: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일시: 2004. 7. 18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우리의 삶 속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거울일 것이다. 여러분들의 집에도 거울이 있을 것이다. 거울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거울이 몇 개씩 되는 집도 있다. 화장실에 걸려있는 거울로부터 시작해서 각 방마다 거울이 있고 현관에도 마지막 점검을 위해 놓아둔 거울도 있다. 여러분의 가방 속에도 손거울이 있을 것이다. 전신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도 있다. 우리 삶에서 필수품인 이 거울을 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의 시작이다.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는 거울을 보고 시작한다. 또한 하루를 살아가면서 수시로 거울을 보기도 한다.
거울을 왜 보는가? 나의 모습을 비춰보기 위함이다. 헤어스타일이 잘 되었는지? 옷매무새가 바로 되었는지? 혹은 음식을 먹고 이에 고춧가루가 끼지 않았는지? 잘못된 것은 교정하고 품위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증명사진처럼 얼굴만 나오는 거울만 보는데, 아내는 직장생활을 해서인지 언제나 큰 거울을 선호한다. 그래서 집에 있는 거울 중에 슈랑크 문짝에 붙어 있는 거울을 아내는 좋아한다. 나는 그러하지 못해서 어느 때인가는 양말에 양복이 끼어진 채로 시내를 활보한 적이 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대인관계에서 필수적인 물건이다.
II. 하지만 이 거울은 우리의 외모만을 비쳐준다. 우리는 우리의 외모만 보아서는 안 되고 인생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외모는 우리의 한 부분일지언정 본질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외적모습을 비춰주는 거울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에 비추어 우리의 인생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은 어떠한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말한 것은 조상에 대한 스토리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너희 자신을 깨닫고 보기 위해 조상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조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놓은 다음에 6절에 “그런 일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라고 말하고 있다.
조상을 보라는 것은 지나간 역사를 보라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오늘의 삶이 보이고 역사를 보면 내일을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 된다. 왜 각 국 나라에서 그렇게 역사교육이 중요시 다루어지는가? 그리고 왜곡되는 역사에 대해 왜 그리 민감하는가? 역사는 오늘의 우리를 비추어 주고 역사는 과거 그 자체보다도 오늘과 내일을 결정하고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거창한 역사 말고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우리 자신을 아는데, 우리의 조상이 필요하지 않는가!
예)설주의 눈이 위로 조금 올라가 있다. 그리고 머리를 묶으면 아주 심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아내와 나는 얘가 왜 그런가하고 의문을 많이 가졌었다. 그런데 최근에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45년 전 당신들의 약혼기념사진을 보고 설주의 출처를 보았다. 그 사진 속에 아버님은 꼭 설주의 눈이었다. 조상 중에 그런 사람이 역시 있었던 것이다. 조상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예)조상을 보면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안다. 그래서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보통 어떤 질문을 하는가? 가족 중에 당뇨 있으신 분이 있었는지요? 혹 가족 중에 이 질환을 앓았던 분이 있었는지요? 라고 묻는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언제나 가족 중에 라는 말이 들어간다. 그 말은 조상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III. 오늘 성경 본문을 보라. 이스라엘의 조상이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이 어떻게 거울이 되고 있는가?
가나안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흘러들어 오게 된 이스라엘백성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로 인해 이방 나라 애굽 땅에서 왕성해 진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 지자 애굽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우리 외국 사람도 처음에 희소성이 있고 적을 때는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까다로와지고 지내기 어렵게 만드는가!
처음에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라면 애굽사람들이 인정했고 애굽을 부강하게 만든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겼지만 요셉을 모르는 왕이 바로로 등극하고 이스라엘이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사람도 자신들이 그곳에서 잘 살지만 결국 그들을 조여 오는 애굽의 핍박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는 결국 종살이하는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고 애굽이 씨를 말리고자 하는 남아멸절정책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그곳은 그들이 살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애굽탈출과 광야생활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정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셨다. 애굽의 군대가 뒤에서 좇아올 때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마른 땅의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필요할 때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다. 그리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다.
그러나 5절을 보라. 이렇게 이스라엘백성을 보호하시고 먹이신 하나님께서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입성치 못하게 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으며(7절) 싯딤에서는 성적 문란을 자행했으며(8절) 주를 시험하기도 했고 원망하기도 했다(9-10절).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역사 속에 나오고 이러한 것들이 거울이 되었다.
그 조상들의 삶 속에서 함께 일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조상들의 역사를 움직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거울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거울의 제조자이시다. 그 거울은 하나님의 스토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과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역사, 즉,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역사를 중심으로 쓴 것이 바로 성경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철학의 종교이다. 명상의 종교이다. 불교철학, 인도철학, 도교철학, 유교 철학 등을 보라. 이러한 종교는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종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시도하고 있다. 한편 계시의 종교가 있다. 모슬렘이다. 몰몬도 무엇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계시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바로 역사를 통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만드시고 팔짱을 끼고 계신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일어나면 얼른 하나님께로 간다. 하나님께 개입해 달라고 한다. 또한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그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 역사는 그저 그렇게 일어나는 해프닝이 아니다. 그리고 그 해프닝을 기록해 놓은 것이 더더욱 아니다. 이 역사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목적이 있다. 테마가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테마에 따라 연출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역사는 역동적이다. 살아있다. 우연의 연속이 역사가 아니라,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왕되심을 역사 속에 보여주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역사를 나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역사는 흘러가고 역사는 종결되게 될 것이다.
예) 역사의 분기점은 바로 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왕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도 소수림왕 몇 년에, 세종 몇 년에 이런 식으로 해를 표현하지 않는가? 열왕기에도 보면 여로보암 왕 18년에... 유다왕 여호사밧 18년에...예후의 7년에...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년에...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와 산헤립이 올라와서... 우리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정점에 놓고 계산한다. 그분은 왕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왕 몇 년이라고 한다. 지금이 2004년이면 예수 그리스도이후 2004년을 의미한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축으로 이어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삶도 보라. 그의 출생 때도 성경에 응하게 하려함이라는 것이 많고, 그의 죽음의 순간에도 성경에 응하게 하려함이라는 것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그렇게 운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설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시공하시고 성령께서 역사를 인 치시고 운행하시는 것이다.
IV.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인 성경말씀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고린도교인들에게 거울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인생의 등불이다. 우리의 앞길을 밝히 보여주는 인생의 안내자이다. 그 거울을 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본질을 깨닫고 사는 삶의 모습이다.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로 보고 사는 삶이 가장 주제파악을 잘 하며 사는 인생이다. 나를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인생을 가장 잘 영위하는 것은 나를 계획 설계하시고 운행하는 분의 말씀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많은 거울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이 나름대로 가치의 거울을 준다. 세상의 기준의 거울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성공했다고 말한다. 이만하면 멋지게 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의 거울을 비추어서는 얼굴에 화장을 한다. 가면을 쓴다. 세상의 미의 기준에 따라서 나를 가꾸어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거울을 보아야 나를 바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이 너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해도 인생의 성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너 그만하면 잘났다고 해도 잘났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세상이 너 지혜 있다고, 그리고 요령이 좋다고 말해도 그것이 참으로 지혜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그러한 거울은 우리에게 착각을 준다. 우리를 현혹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실제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입맛에 맞추는 그러한 거울일 것이다. 요술거울처럼 우리를 환상속에 빠뜨릴 수 있는 거울이다.
어떤 거울을 보겠는가? 내가 뚱뚱하다고 홀쭉하게 보이는 거울을 보아서는 되겠는가? 내가 홀쭉하다고 뚱뚱하게 보이는 거울을 보아서는 되겠는가? 얼굴의 잡티를 안보이게 하는 거므스레한 거울을 보는 것이 올바른가?
예)가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약간 어둔 색의 거울을 좋아한다. 거의 웬만한 잡티는 없애주고 얼굴의 모습과 이목구비만 나타나게 하니... 그리고 보면서 이만하면 쓸만한데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거울은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나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한 거울은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세상은 바로 이러한 거울을 제시한다. 우리를 변장시켜주고 마음에 들게하는 거울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가 가려워져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스승을 찾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제시해 주는 거울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역사의 거울을 보라. 즉, 성경말씀의 거울을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말씀의 거울을 잘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씀 속의 내용들이 내게 한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울을 볼 때 우리는 거울 틀을 보냐? 어느 제품인지를 보냐? 디자인을 보고 색상과 크기를 보냐? 거울을 본다고 할 때는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야 너 거울좀 봐라”라고 하면 가서 진짜 거울을 보고 “엄마! 거울이 뭐가 문젠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 씻을 것이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의 거울이고 나의 존재에 대해 실체를 아는 것이다. 거울을 보라 할 때는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예)아브라함을 볼 때 부르시니 가겠습니다 라는 자세로 가야 한다. 이삭을 보라. 그는 축복의 인물이다. 주시니 받겠습니다 라는 믿음으로 그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베드로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회개의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배반했는가? 나의 생명과 유익을 위해 얼마나 주님을 팔아먹었는지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그와 같이 주의 복음을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다 헌신하고 주 앞에 값진 것이 없음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다 남의 얘기로 들리면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 죄를 사해 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사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가 있다. 며느리가 나이든 시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면서 이렇게 교육했다. 목사님이 어머니께 질문하기를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라고 물으면 내 죄 때문이요 라고 대답하세요 라고 가르쳤다. 여러 번 가르쳤다. 그런데 교회를 갔는데 정말 목사님이 이 할머니에게 구원의 확신을 시켜드리기 위해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할머님!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그때 할머니 왈, 예 우리 며느리 때문이요.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서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을 잘 알면 무엇 하는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시면 무엇 하는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 언제나 거울을 보라. 성경을 언제나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성경은 깨끗한가 더러운가? 더러운 성경은 나를 깨끗게 해도 깨끗한 성경은 나를 더럽게 만들 것이다. 장롱에다가 넣지 말라. 보면서 글도 쓰고 밑줄도 긋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거울을 봐야 한다. 12절을 보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나오듯이 말씀의 거울을 보아야 한다.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할 때에 교정과 성숙과 성장이 있다. 거울을 더욱 볼수록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들어 나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어두움 속에 있었기에 옷에 무엇이 묻었는지 무엇이 내게 문제인지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말씀 가운데 우리를 더욱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령의 빛으로 우리는 거울을 반사해 보아야 한다. 거울을 어두운 곳에서 보면 우리가 보이는가? 아무리 성경을 본다하더라도 그것을 소설책 정도로 보거나 그것을 과학 서적이나 시정도로 보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 하에서 보아야 한다. 거울을 볼 때 빛이 비춰져야 한다.
거기에 인생에 대한 답변이 있다. 말씀의 거울이 내게 없었을 때에는 우리는 죄의 검정을 묻히고 살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 무엇이 묻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추어 볼 수 있기에 거기에는 인생의 답이 있는 것이다.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라. 그리고 답을 거기서 발견하라.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무의미한 질문을 하며 무의미하고 공허한 답변을 한다.
예)길에서 누구를 만나면 어디가세요라고 묻는다. 그때 무어라고 보통 대답하는가? 예 저기 무슨 볼일이 있어서요. 그러면 우리는 답한다. 아 예. 하지만 질문도 아무 의미가 없었고 대답도 아무 의미가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물을 때 무슨 답을 기대하고 있는가? 정말로 궁금한가? 그리고 그것을 안다하더라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에덴에서 분실했음을 알고 다시 주님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 세상은 많은 정보를 주지만 답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에 답을 주는 것이다.
V. 그 거울을 잘 볼 때 나의 인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언제나 우리에게 질문만을 던질 뿐이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답을 준다. 마침표를 주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문제와 스트레스와 핍박을 준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 말씀의 빛 아래로 가지고 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역사 속에서 우리의 문제의 해결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중의 말씀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그분께 오면 해결이 있다. 건강의 문제도 의사에게 보다 주님께 먼저 가지고 오라. 앞으로의 진로의 문제도 인생설계사에게보다 하나님께 가지고 오라. 사업을 위해 비즈니스 상담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물어 보라.
내일부터 성경통독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자세히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새벽제단을 쌓으라. 안되면 매일성경을 보아라. 무엇을 보고 시작했는지 무엇과 더불어 시작했는지가 하루의 베이스가 될 것이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이번 한주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제목: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일시: 2004. 7. 18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우리의 삶 속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거울일 것이다. 여러분들의 집에도 거울이 있을 것이다. 거울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거울이 몇 개씩 되는 집도 있다. 화장실에 걸려있는 거울로부터 시작해서 각 방마다 거울이 있고 현관에도 마지막 점검을 위해 놓아둔 거울도 있다. 여러분의 가방 속에도 손거울이 있을 것이다. 전신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도 있다. 우리 삶에서 필수품인 이 거울을 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의 시작이다.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는 거울을 보고 시작한다. 또한 하루를 살아가면서 수시로 거울을 보기도 한다.
거울을 왜 보는가? 나의 모습을 비춰보기 위함이다. 헤어스타일이 잘 되었는지? 옷매무새가 바로 되었는지? 혹은 음식을 먹고 이에 고춧가루가 끼지 않았는지? 잘못된 것은 교정하고 품위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증명사진처럼 얼굴만 나오는 거울만 보는데, 아내는 직장생활을 해서인지 언제나 큰 거울을 선호한다. 그래서 집에 있는 거울 중에 슈랑크 문짝에 붙어 있는 거울을 아내는 좋아한다. 나는 그러하지 못해서 어느 때인가는 양말에 양복이 끼어진 채로 시내를 활보한 적이 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대인관계에서 필수적인 물건이다.
II. 하지만 이 거울은 우리의 외모만을 비쳐준다. 우리는 우리의 외모만 보아서는 안 되고 인생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외모는 우리의 한 부분일지언정 본질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외적모습을 비춰주는 거울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에 비추어 우리의 인생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은 어떠한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말한 것은 조상에 대한 스토리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너희 자신을 깨닫고 보기 위해 조상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조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놓은 다음에 6절에 “그런 일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라고 말하고 있다.
조상을 보라는 것은 지나간 역사를 보라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오늘의 삶이 보이고 역사를 보면 내일을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 된다. 왜 각 국 나라에서 그렇게 역사교육이 중요시 다루어지는가? 그리고 왜곡되는 역사에 대해 왜 그리 민감하는가? 역사는 오늘의 우리를 비추어 주고 역사는 과거 그 자체보다도 오늘과 내일을 결정하고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거창한 역사 말고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우리 자신을 아는데, 우리의 조상이 필요하지 않는가!
예)설주의 눈이 위로 조금 올라가 있다. 그리고 머리를 묶으면 아주 심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아내와 나는 얘가 왜 그런가하고 의문을 많이 가졌었다. 그런데 최근에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45년 전 당신들의 약혼기념사진을 보고 설주의 출처를 보았다. 그 사진 속에 아버님은 꼭 설주의 눈이었다. 조상 중에 그런 사람이 역시 있었던 것이다. 조상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예)조상을 보면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안다. 그래서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보통 어떤 질문을 하는가? 가족 중에 당뇨 있으신 분이 있었는지요? 혹 가족 중에 이 질환을 앓았던 분이 있었는지요? 라고 묻는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언제나 가족 중에 라는 말이 들어간다. 그 말은 조상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III. 오늘 성경 본문을 보라. 이스라엘의 조상이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이 어떻게 거울이 되고 있는가?
가나안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흘러들어 오게 된 이스라엘백성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로 인해 이방 나라 애굽 땅에서 왕성해 진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 지자 애굽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우리 외국 사람도 처음에 희소성이 있고 적을 때는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까다로와지고 지내기 어렵게 만드는가!
처음에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라면 애굽사람들이 인정했고 애굽을 부강하게 만든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겼지만 요셉을 모르는 왕이 바로로 등극하고 이스라엘이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사람도 자신들이 그곳에서 잘 살지만 결국 그들을 조여 오는 애굽의 핍박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는 결국 종살이하는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고 애굽이 씨를 말리고자 하는 남아멸절정책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그곳은 그들이 살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애굽탈출과 광야생활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정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셨다. 애굽의 군대가 뒤에서 좇아올 때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마른 땅의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필요할 때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다. 그리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다.
그러나 5절을 보라. 이렇게 이스라엘백성을 보호하시고 먹이신 하나님께서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입성치 못하게 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으며(7절) 싯딤에서는 성적 문란을 자행했으며(8절) 주를 시험하기도 했고 원망하기도 했다(9-10절).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역사 속에 나오고 이러한 것들이 거울이 되었다.
그 조상들의 삶 속에서 함께 일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조상들의 역사를 움직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거울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거울의 제조자이시다. 그 거울은 하나님의 스토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과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역사, 즉,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역사를 중심으로 쓴 것이 바로 성경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철학의 종교이다. 명상의 종교이다. 불교철학, 인도철학, 도교철학, 유교 철학 등을 보라. 이러한 종교는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종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시도하고 있다. 한편 계시의 종교가 있다. 모슬렘이다. 몰몬도 무엇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계시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바로 역사를 통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만드시고 팔짱을 끼고 계신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일어나면 얼른 하나님께로 간다. 하나님께 개입해 달라고 한다. 또한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그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 역사는 그저 그렇게 일어나는 해프닝이 아니다. 그리고 그 해프닝을 기록해 놓은 것이 더더욱 아니다. 이 역사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목적이 있다. 테마가 있다.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테마에 따라 연출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역사는 역동적이다. 살아있다. 우연의 연속이 역사가 아니라,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왕되심을 역사 속에 보여주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역사를 나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역사는 흘러가고 역사는 종결되게 될 것이다.
예) 역사의 분기점은 바로 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왕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도 소수림왕 몇 년에, 세종 몇 년에 이런 식으로 해를 표현하지 않는가? 열왕기에도 보면 여로보암 왕 18년에... 유다왕 여호사밧 18년에...예후의 7년에...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년에...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와 산헤립이 올라와서... 우리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정점에 놓고 계산한다. 그분은 왕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왕 몇 년이라고 한다. 지금이 2004년이면 예수 그리스도이후 2004년을 의미한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축으로 이어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삶도 보라. 그의 출생 때도 성경에 응하게 하려함이라는 것이 많고, 그의 죽음의 순간에도 성경에 응하게 하려함이라는 것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그렇게 운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설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시공하시고 성령께서 역사를 인 치시고 운행하시는 것이다.
IV.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인 성경말씀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고린도교인들에게 거울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인생의 등불이다. 우리의 앞길을 밝히 보여주는 인생의 안내자이다. 그 거울을 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본질을 깨닫고 사는 삶의 모습이다.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로 보고 사는 삶이 가장 주제파악을 잘 하며 사는 인생이다. 나를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인생을 가장 잘 영위하는 것은 나를 계획 설계하시고 운행하는 분의 말씀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많은 거울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이 나름대로 가치의 거울을 준다. 세상의 기준의 거울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성공했다고 말한다. 이만하면 멋지게 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의 거울을 비추어서는 얼굴에 화장을 한다. 가면을 쓴다. 세상의 미의 기준에 따라서 나를 가꾸어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거울을 보아야 나를 바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이 너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해도 인생의 성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너 그만하면 잘났다고 해도 잘났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세상이 너 지혜 있다고, 그리고 요령이 좋다고 말해도 그것이 참으로 지혜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그러한 거울은 우리에게 착각을 준다. 우리를 현혹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실제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입맛에 맞추는 그러한 거울일 것이다. 요술거울처럼 우리를 환상속에 빠뜨릴 수 있는 거울이다.
어떤 거울을 보겠는가? 내가 뚱뚱하다고 홀쭉하게 보이는 거울을 보아서는 되겠는가? 내가 홀쭉하다고 뚱뚱하게 보이는 거울을 보아서는 되겠는가? 얼굴의 잡티를 안보이게 하는 거므스레한 거울을 보는 것이 올바른가?
예)가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약간 어둔 색의 거울을 좋아한다. 거의 웬만한 잡티는 없애주고 얼굴의 모습과 이목구비만 나타나게 하니... 그리고 보면서 이만하면 쓸만한데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거울은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나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한 거울은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세상은 바로 이러한 거울을 제시한다. 우리를 변장시켜주고 마음에 들게하는 거울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가 가려워져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스승을 찾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제시해 주는 거울을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역사의 거울을 보라. 즉, 성경말씀의 거울을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말씀의 거울을 잘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씀 속의 내용들이 내게 한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울을 볼 때 우리는 거울 틀을 보냐? 어느 제품인지를 보냐? 디자인을 보고 색상과 크기를 보냐? 거울을 본다고 할 때는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야 너 거울좀 봐라”라고 하면 가서 진짜 거울을 보고 “엄마! 거울이 뭐가 문젠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 씻을 것이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의 거울이고 나의 존재에 대해 실체를 아는 것이다. 거울을 보라 할 때는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예)아브라함을 볼 때 부르시니 가겠습니다 라는 자세로 가야 한다. 이삭을 보라. 그는 축복의 인물이다. 주시니 받겠습니다 라는 믿음으로 그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베드로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회개의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배반했는가? 나의 생명과 유익을 위해 얼마나 주님을 팔아먹었는지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 그와 같이 주의 복음을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다 헌신하고 주 앞에 값진 것이 없음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다 남의 얘기로 들리면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 죄를 사해 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사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가 있다. 며느리가 나이든 시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면서 이렇게 교육했다. 목사님이 어머니께 질문하기를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라고 물으면 내 죄 때문이요 라고 대답하세요 라고 가르쳤다. 여러 번 가르쳤다. 그런데 교회를 갔는데 정말 목사님이 이 할머니에게 구원의 확신을 시켜드리기 위해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할머님!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그때 할머니 왈, 예 우리 며느리 때문이요.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서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을 잘 알면 무엇 하는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시면 무엇 하는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 언제나 거울을 보라. 성경을 언제나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성경은 깨끗한가 더러운가? 더러운 성경은 나를 깨끗게 해도 깨끗한 성경은 나를 더럽게 만들 것이다. 장롱에다가 넣지 말라. 보면서 글도 쓰고 밑줄도 긋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거울을 봐야 한다. 12절을 보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나오듯이 말씀의 거울을 보아야 한다.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할 때에 교정과 성숙과 성장이 있다. 거울을 더욱 볼수록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들어 나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어두움 속에 있었기에 옷에 무엇이 묻었는지 무엇이 내게 문제인지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말씀 가운데 우리를 더욱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령의 빛으로 우리는 거울을 반사해 보아야 한다. 거울을 어두운 곳에서 보면 우리가 보이는가? 아무리 성경을 본다하더라도 그것을 소설책 정도로 보거나 그것을 과학 서적이나 시정도로 보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 하에서 보아야 한다. 거울을 볼 때 빛이 비춰져야 한다.
거기에 인생에 대한 답변이 있다. 말씀의 거울이 내게 없었을 때에는 우리는 죄의 검정을 묻히고 살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 무엇이 묻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추어 볼 수 있기에 거기에는 인생의 답이 있는 것이다.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라. 그리고 답을 거기서 발견하라.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무의미한 질문을 하며 무의미하고 공허한 답변을 한다.
예)길에서 누구를 만나면 어디가세요라고 묻는다. 그때 무어라고 보통 대답하는가? 예 저기 무슨 볼일이 있어서요. 그러면 우리는 답한다. 아 예. 하지만 질문도 아무 의미가 없었고 대답도 아무 의미가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물을 때 무슨 답을 기대하고 있는가? 정말로 궁금한가? 그리고 그것을 안다하더라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에덴에서 분실했음을 알고 다시 주님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 세상은 많은 정보를 주지만 답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에 답을 주는 것이다.
V. 그 거울을 잘 볼 때 나의 인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언제나 우리에게 질문만을 던질 뿐이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답을 준다. 마침표를 주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문제와 스트레스와 핍박을 준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 말씀의 빛 아래로 가지고 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역사 속에서 우리의 문제의 해결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 중의 말씀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그분께 오면 해결이 있다. 건강의 문제도 의사에게 보다 주님께 먼저 가지고 오라. 앞으로의 진로의 문제도 인생설계사에게보다 하나님께 가지고 오라. 사업을 위해 비즈니스 상담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물어 보라.
내일부터 성경통독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자세히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새벽제단을 쌓으라. 안되면 매일성경을 보아라. 무엇을 보고 시작했는지 무엇과 더불어 시작했는지가 하루의 베이스가 될 것이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이번 한주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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