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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더 깊이 주님을 경험하는 삶 - 수가성 여인

작성자권순태|작성시간09.02.23|조회수417 목록 댓글 0
성경: 요한복음 4: 39 - 42
제목: 더 깊이 주님을 경험하는 삶
일시: 2009. 2. 1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젊은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교제하면서 사람을 알아간다고 한다. 알면서 확신하고 그래서 결혼하기로 한다. 그러나 결혼 전까지 뭘 아는가? 결혼해 보라.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남편의 모습도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부분이 배우자에게서 발견되는가? 사람이 변했다고 말하지 마라. 이미 있던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그만큼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을 안다고 하지만, 얼마나 아는가? 철이 들어가면서 더욱 부모님을 알게 된다. 죽을 때까지 철이 들다가 가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얼마나 아는가?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아는 3 단계를 볼 수 있다.

II. 첫 단계는 너는 너, 나는 나의 단계에서 만남의 계기가 마련되는 단계이다.
접촉의 계기가 생기는 단계이다. 수가성 여인은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로 왔다. 그 물을 뜨는 것은 힘드는 일이었다. 티브에서 가끔 보는 것은 아프라카에서는 맑은 물을 뜨기 위해 수 킬로를 이고 지고 한다. 물을 드는 것은 무겁고 힘들다. 학생들이 가장 힘드는 것 가운데 하나는 물을 사 먹는 것이다. 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판트하려면 그것도 번거럽다. 한편 우리 주님도 물을 마시고 싶으셨다. 때는 정오 12시였고, 걸어오신 여정 길에서 목을 축일 곳을 찾고 있었다. 수가성 여인은 여인대로, 주님은 주님대로 출발한 곳은 달랐지만, 물이 필요해서 야곱의 우물가로 오게 딘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상태였는가?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상종치 말아야 할 사마리아 여인이었으며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이 말도 걸 수 없는 유대인의 한 남정네였다.
주님의 여정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리학적으로 주님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 하지만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주님이 사마리아로 통행하려는 의도가 있으셨다.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적대관계에 있고 피하려고 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남을 원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관계에서 서로에게 필요했던 물을 접촉의 매개로 사용하셨다. 여인은 물을 길러 왔고 주님은 물을 마시고 싶었다. 비록 저희들의 만남이 상종치 못할 너는 너 나는 나의 전혀 별개의 만남이었지만, 이제 교집합이 생긴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신다. 관계를 맺기 위해 계기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를 맺는 데에는 콘탁포이트가 필요하다. 주님과 사마리아여인이 “물”이라는 계기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여러 계기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좋은 친구”가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목사님 집에서의 하룻밤”이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외국에서는 “김치”가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축구”가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질병”이라는 것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유학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한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는 계기가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알아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다. “아, 주님이 구주이시구나”라고 알아서 주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은 주님을 아직 모를 수 있다. 어떠한 것이든 계기가 있어서 주의 전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이 만나는 계기가 된 “물”은 무엇인가? 관계에 있어 물은 심벌이다.
물은 관계의 핵심은 아니지만,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이 매개체는 심벌이다.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시작인 것이다. 물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지만,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예수님이 마르지 않는 생수임을 말하고 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4). 야곱의 우물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심벌symbol 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제 reality였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는데, 주님은 다시 찾아온 군중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고 한다. 여기서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시작하지만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오병이어는 심벌이고 주님은 실제였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있다. 병이 들었는가? 의원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학업의 문제가 있는가? 지혜의 주님을 만나라. 낙심하고 소망이 꺼져가고 있는가? 위로 하시고 새 힘을 주시고 일으키시는 주님을 만나라.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가?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해결사 주님을 만나라. 이 모든 일들을 주님과 관계를 맺는 계기로 삼으라.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결국 reality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라. 일부러 찾아오신 주님과 관계를 맺으라.

III. 두 번째 단계는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7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신다. 주님이 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전개되어지는 스토리를 보라. 주님이 물을 달라고 하시니 우물가 여인은 까칠하게 대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 곱게 물 좀 주면 어디 덧나나? 그때 주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주님이 그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이 그녀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알고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한다고?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초청했다고?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초청하시고 손 내미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이라는 계기로 주님을 만나 대화하면서 자신을 서서히 발견하게 된다. 주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내게 생수가 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처음에 이 여인은 주님이 물이 필요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서 진짜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 여인은 주님께 과감히 말한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이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갑작스레 이 여인의 깊은 사생활로 들어간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4:16). 물 얘기하다가 남편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여인은 아주 피상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을는지 모른다. 지금 눈에 보이는 물 문제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더 깊이 대화를 이끌어 가신다. 주님이 갑작스럽게 여인의 남편에 대해 말을 할 때 완전히 여인의 문제에 정곡을 찌른 것이다. 자신의 모든 비밀을 어찌 다 알고 있단 말인가? 이제 여인은 자신의 근본문제를 터치하시는 주님을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다. 여인은 주님이 나의 문제를 건드리시고 아는 분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수가성 여인에게 주님은 상종치 말아야 할 유대청년이었다가 이제는 나의 문제를 다 아시는 선지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 자신의 문제와 추함을 알게 된다. 주님은 빛이시고 그 빛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모습을 더욱 뚜렷이 알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근본 문제를 터치하신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게 주님이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 할수록 주님을 알아가고 내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말씀을 더 접하고 알게 될수록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기도를 더 할수록 더욱 기도할 것이 많아지게 된다. 신앙생활을 더 할수록 회개할 것이 많아진다. 더 배울수록 알아야 할 것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는 90년도 이맘 때이다. 필리핀에서 막 돌아와서 양복도 없어 기성복 20만원짜리를 입고 대전 은행동 소나타 커피샾에서 만났다. 그 분위기는 어두웠다. 처음 선을 볼 때는 어두운 데서 보게 된다. 그리고 화장도 한다. 그러기에 그럴 듯한 조명 아래서 화장으로 변신한 제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연애를 하면서 더욱 밝은 곳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결혼 전까지는 모른다. 신혼여행을 가면서 화장기 없는 모습을 보게 되고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꾸밈없는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 이제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동공이 더욱 확장되며 알아가게 될 때 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람이 변했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나의 눈이 넓어지고 조명이 강해지기 시작하니 안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 것이고 더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평생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IV. 세 번째 단계는 인격적이고 밀접한 교제를 통해 주님을 구세주로 아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요 메시야임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온다. 여자의 과거와 문제를 알고 계시는 주님을 초청하게 된다.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은 주님과 이틀간의 수련회를 연다. 처음 주님을 강사로 모신 것은 여자의 행한 모든 것을 말함 때문이었으나 이후에는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주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백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요4:42)고 한다.

수가성 사람에게 이 여인은 하나의 매개체였다. 계기였다. 그런데 이틀간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올바르게 알게 되었다.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주님이 누구인지 바로 알게 된 것이다. 수가성 사람들과 이 여인은 말씀의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정확히 주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주님이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을 아는 것같이 그들도 주님을 알게 된 것이다. 만남과 교제와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이 알아가게 된 것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는 피차 아는 것이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고 했을 때 그것은 교제가 될 수 없다. 나는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아는 것도 교제가 안 된다. 나도 알고 너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교제이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양은 목자의 소리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 진정한 목자는 양을 아는 목자라고 한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아야 한다. 서로 인격적인 관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참된 양과 목자의 관계이다. 나는 이곳에서 우리 교우들을 내 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우들은 권목사를 내 목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 본 교회목사님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축하하고 마음 아파할 사람은 권목사이다.

일대일 접촉이 중요한 것이다. 내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성경을 보면 내가 보여야 한다. 도마가 주님을 의심했다면 도마를 비난하지 말라. 도마의 자리에 나를 위치시켜 놓고 내가 얼마나 의심 많은 사람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되도다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게 하신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 나도 내 편의에 따라 주님을 얼마나 부인했는가? 베드로를 보면 내가 보여야 한다.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여 팔아먹었다면 유다만 그런가? 나도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이다. 그러기에 다른 이들을 향해 돌을 들기 전에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다윗과 같은 사람이 나이다. 우리는 성경에 많은 모델들을 두고 있다. 예수님도 어떤 사건이 있으면 꼭 제자들을 향하여 가르치신다. 그렇게 내 말씀으로 듣는 사람은 은혜를 받는다. 회개를 한다. 변화가 된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다. 목자는 양의 소리를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말을 해도 알아먹지 못하는 양이 아니다.

V. 이번 주에는 코스타유럽학생 수련회가 있다. 3박 4일의 일정으로 간다. 다른 지체들은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 속에서 주님을 더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다. 더욱 성장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 한 주간을 살면서 주님과 생활하라.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머물지 말라.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바란다. 나의 근본문제가 주님에 의해 타치되기를 바란다. 주님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되는지 더욱 깊이 알아가기를 바란다. 세상의 구주임을 아는 깊이까지 이르러야 한다. 주님을 더 알아가는 한주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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