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 18 : 1 - 4
제목: 어린이처럼 순수하라.
일시: 2009. 5. 3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단 한번 빠진 기억이 있다. 그때는 여름날이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모른다. 그 비로 인해 아스발트나 시멘트로 되어 있지 않고 맨 땅으로 되어 있는 거리는 완전히 진흙뻘로 변했다. 저는 장화를 신고 교회를 가다가 그만 중간 어느 길에서 진흙에 발이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장화를 신은 발을 아무리 빼려고 해도 쩌걱거리기만 하고 꼼짝할 수 없었다. 저는 울었고 주변의 공사판에서 일하는 어떤 아저씨들이 저를 빼주었다. 그날 울면서 교회를 못 갔던 것 같다. 그때 가장 속상했던 것은 주일학교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신앙이 이렇게 순수하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 봐도 기특했다. 그러면서 그때 각오했던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주님을 믿는 믿음이 끝까지 계속 되리라. 회의가 찾아오고 유혹이 나를 흔들려고 해도 바로 이 순간을 기억하리라.” 어른이 되면 세상에 물들어 불순하게 될 수 있으니 이 어린 순수한 때를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성장해 가면서 그때의 각오와 다짐을 되돌아보곤 했다.
II. 오늘 말씀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자신을 버리는 자이다. 마치 예수님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것이 바로 자기의 목숨을 버린 것과 같이 말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생각의 모든 필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주님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았다. 필터가 없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거르지 않고 여과 없이 바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순수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자이다. 숨김이 없는 자들이다. 투명하여 속이 다 보이는 자들이다.
하지만, 어른은 “생각의 필터”를 가지고 대화를 한다. 그러기에 어른들은 불순하다. 어른들이 불순한 것은 생각의 필터를 끼고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도로 인해 점점 자신들의 본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게 된다. 처음에 순수하게 출발을 했어도 자꾸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적이란 불순하고 더러운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귀어도 득실을 따져서 의도적으로 사귄다. 어떤 선택을 해도 나를 중심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한다. 말을 해도 할말 안할 말은 의도적으로 조절한다. 우리 어른들은 부대끼면서 살았기 때문에 맘에 안 들어도 겉으로는 웃음을 짓고 산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 표정을 봐서는 알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무슨 질문을 하면 자기 속에 있는 답을 숨기고 묻는 자의 의도를 생각해서 답한다. “생각의 필터”를 가지고 있기에 한마디 말을 해도 편집되고 의도된 말을 한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받아들을 것은 담고 버릴 것은 한 귀로 흘러 버린다. 그렇게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커 가면 처음에 순수했던 것이 아주 불순해지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걸러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마음에는 의도한 답이 없다. 있는 대로 나온다. 아이들은 묻는 자의 의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의 답을 그대로 말한다.
예)그래서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어보려면 아이들에게 물으면 여과 없이 집안 사정 다 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묻는다. 어릴 때 물으면 있는 대로 답한다. 그때 우리 부부는 “저렇게 대답하면 우리가 어찌되냐”싶다. 그러나 순수한 아이들을 교육하지 못한다. “설주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마라” 하지만, 그 아이는 우리가 그렇게 교육시킨 것까지 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기에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진실해야 한다. 그들은 그대로 보고 따라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 가면서 이제는 걸러서 말하곤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기 때문이다. 이미 불순해 진 것이다. 여러분들의 가정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얘야, 엄마 아빠하고 싸우니? 그러면 있는 대로 말한다.
성장을 하고 커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불순한 것을 우리 몸에 더욱 치장할 뿐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자연을 만드셨지만, 인간이 훼손하고 있다. 사람은 천연의 사람이었지만, 살아갈수록 더욱 더러운 존재가 되도록 강요되고 있다.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되고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불순한 것이 붙어서 우리는 날 수가 없다. 천국 문에 들어갈 때 검색스크린에 다 걸리고 말게 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는 자신의 것을 버리는 자들이다. 이해관계와 손익득실의 계산, 자신의 필터로 거르거나 자신의 주판을 튕기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어린아이들이 되라는 것은 주님의 요청이시다.
III.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진정한 능력이다.
어린아이가 모르는 것 같고 작은 소자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큰 사람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천국에서는 큰 자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낮추는 자들인데 자기를 비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자들이다. 비워서 자신의 몸무게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할 수 있는 자들이다. 비워서 그 안에 예수님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이미 불순한 이해관계의 동기와 자기만의 생각의 필터로 자신을 채우기에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과 꿈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손에 쥔 것이 있다. 계속 채우려고 하는 어른들에게 비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하지만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순수함이 있는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비울 수 있다. 이 순수함은 어른들의 잔꾀보다도 더욱 수준이 높은 것이고 위대한 것이다. 채우는 능력보다 버리는 능력이 위대하다. 순수하게 되는 것이 쉬운가? 어른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필터가 없다. 거르는 것이 없기에 순수하다. 우리는 자꾸 거른다. 거르기에 불순하다. 순수한 것은 비우는 것이고 비울 수 있는 것은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 능력이 있기에 아이들은 초능력자이다. 우리 어른들은 그렇게 돈을 들이고 노력을 해도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독일어가 그 모습인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수년만 지나면 원어민이다. 그들은 소화해 낼 수 있다. 아이들은 언어의 천재이다. 여과하는 것이 없이 그대로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있는 대로 듣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들 앞에서는 욕도 해서는 안된다. 그게 욕인지 모르고 따라하기 때문이다. 단어도 그대로 수용된다. 염소하면 염소고 고우트하면 고우트지 염소는 고우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언어를 빨리 배우는 이유가 순수하기 때문이다.
예) 그림을 그려도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어른이 그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수준에 도달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어른들은 자신을 비우고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미 굳어버린 우리의 것을 내어 버리지 못하고 가면의 것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한나의 그림을 보라.
IV.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들과 같은 신앙의 모습을 가지기를 원한다. 우리의 삶에 너무 많은 불순물이 붙어 있다. 우리의 계획과 이해관계와 우리의 생각이 너무 많이 첨가된 것 같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이틀이 주어져 있는 것 같다. 너무나 요령이 많고 지혜롭고 생각이 많다. 우리의 비젼이 변하여 욕망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고 교만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의도하고 무리하게 작위하고 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누군가 말을 하면 해석을 해야 한다. “과연 의도가 무엇이냐”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순수하지 못하기에 그 불순물들을 떼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되라. 어린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계획된다. 부모님에 의해 계획되듯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이 될 때 낮아진 자가 된다. 소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를 비운 자가 되어 주님이 말씀하실 때 수용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될 때 내가 이해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듣게 된다. 아름다운 믿음의 용어들을 그대로 실천하기를 바란다. 어린아이처럼...
주일학교 때 공책이나 연필을 상으로 받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유치하게 상품에 눈이 어두워서라고 말할지 모른다. 반별로 성경읽기, 전도, 기도 등을 잘하면 포도송이를 붙이는 것이 있었는데 열심히 했었다. 어른이 되면 경쟁심을 불러일으켜서 그러는 거지라고 유치하게 생각할른지 모른다. 선생님이 찬양을 크게 하라면 목이 아파도 열심히 악을 쓰듯이 불렀다. 어릴 때는 감각이 있었다. 기쁘면 기쁘고 슬프면 슬프고... 반응이 있었다. 그러기에 순수한 것이다. 소풍이라고 하면 즐겁게 함께 교제하자. 남선교회에서 프로그램을 하면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처럼 열심히 따라하자. 나의 생각이 아니라, 낮아진 자로서 나를 비우고 순수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제목: 어린이처럼 순수하라.
일시: 2009. 5. 3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단 한번 빠진 기억이 있다. 그때는 여름날이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모른다. 그 비로 인해 아스발트나 시멘트로 되어 있지 않고 맨 땅으로 되어 있는 거리는 완전히 진흙뻘로 변했다. 저는 장화를 신고 교회를 가다가 그만 중간 어느 길에서 진흙에 발이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장화를 신은 발을 아무리 빼려고 해도 쩌걱거리기만 하고 꼼짝할 수 없었다. 저는 울었고 주변의 공사판에서 일하는 어떤 아저씨들이 저를 빼주었다. 그날 울면서 교회를 못 갔던 것 같다. 그때 가장 속상했던 것은 주일학교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신앙이 이렇게 순수하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 봐도 기특했다. 그러면서 그때 각오했던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주님을 믿는 믿음이 끝까지 계속 되리라. 회의가 찾아오고 유혹이 나를 흔들려고 해도 바로 이 순간을 기억하리라.” 어른이 되면 세상에 물들어 불순하게 될 수 있으니 이 어린 순수한 때를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성장해 가면서 그때의 각오와 다짐을 되돌아보곤 했다.
II. 오늘 말씀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자신을 버리는 자이다. 마치 예수님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것이 바로 자기의 목숨을 버린 것과 같이 말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생각의 모든 필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주님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았다. 필터가 없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거르지 않고 여과 없이 바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순수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자이다. 숨김이 없는 자들이다. 투명하여 속이 다 보이는 자들이다.
하지만, 어른은 “생각의 필터”를 가지고 대화를 한다. 그러기에 어른들은 불순하다. 어른들이 불순한 것은 생각의 필터를 끼고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도로 인해 점점 자신들의 본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게 된다. 처음에 순수하게 출발을 했어도 자꾸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적이란 불순하고 더러운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귀어도 득실을 따져서 의도적으로 사귄다. 어떤 선택을 해도 나를 중심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한다. 말을 해도 할말 안할 말은 의도적으로 조절한다. 우리 어른들은 부대끼면서 살았기 때문에 맘에 안 들어도 겉으로는 웃음을 짓고 산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 표정을 봐서는 알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무슨 질문을 하면 자기 속에 있는 답을 숨기고 묻는 자의 의도를 생각해서 답한다. “생각의 필터”를 가지고 있기에 한마디 말을 해도 편집되고 의도된 말을 한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받아들을 것은 담고 버릴 것은 한 귀로 흘러 버린다. 그렇게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커 가면 처음에 순수했던 것이 아주 불순해지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걸러내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마음에는 의도한 답이 없다. 있는 대로 나온다. 아이들은 묻는 자의 의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의 답을 그대로 말한다.
예)그래서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어보려면 아이들에게 물으면 여과 없이 집안 사정 다 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묻는다. 어릴 때 물으면 있는 대로 답한다. 그때 우리 부부는 “저렇게 대답하면 우리가 어찌되냐”싶다. 그러나 순수한 아이들을 교육하지 못한다. “설주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마라” 하지만, 그 아이는 우리가 그렇게 교육시킨 것까지 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기에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진실해야 한다. 그들은 그대로 보고 따라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 가면서 이제는 걸러서 말하곤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기 때문이다. 이미 불순해 진 것이다. 여러분들의 가정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얘야, 엄마 아빠하고 싸우니? 그러면 있는 대로 말한다.
성장을 하고 커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불순한 것을 우리 몸에 더욱 치장할 뿐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자연을 만드셨지만, 인간이 훼손하고 있다. 사람은 천연의 사람이었지만, 살아갈수록 더욱 더러운 존재가 되도록 강요되고 있다.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되고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불순한 것이 붙어서 우리는 날 수가 없다. 천국 문에 들어갈 때 검색스크린에 다 걸리고 말게 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는 자신의 것을 버리는 자들이다. 이해관계와 손익득실의 계산, 자신의 필터로 거르거나 자신의 주판을 튕기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어린아이들이 되라는 것은 주님의 요청이시다.
III.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진정한 능력이다.
어린아이가 모르는 것 같고 작은 소자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큰 사람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천국에서는 큰 자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낮추는 자들인데 자기를 비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자들이다. 비워서 자신의 몸무게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할 수 있는 자들이다. 비워서 그 안에 예수님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이미 불순한 이해관계의 동기와 자기만의 생각의 필터로 자신을 채우기에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과 꿈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손에 쥔 것이 있다. 계속 채우려고 하는 어른들에게 비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하지만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순수함이 있는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비울 수 있다. 이 순수함은 어른들의 잔꾀보다도 더욱 수준이 높은 것이고 위대한 것이다. 채우는 능력보다 버리는 능력이 위대하다. 순수하게 되는 것이 쉬운가? 어른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필터가 없다. 거르는 것이 없기에 순수하다. 우리는 자꾸 거른다. 거르기에 불순하다. 순수한 것은 비우는 것이고 비울 수 있는 것은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 능력이 있기에 아이들은 초능력자이다. 우리 어른들은 그렇게 돈을 들이고 노력을 해도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독일어가 그 모습인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수년만 지나면 원어민이다. 그들은 소화해 낼 수 있다. 아이들은 언어의 천재이다. 여과하는 것이 없이 그대로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있는 대로 듣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들 앞에서는 욕도 해서는 안된다. 그게 욕인지 모르고 따라하기 때문이다. 단어도 그대로 수용된다. 염소하면 염소고 고우트하면 고우트지 염소는 고우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언어를 빨리 배우는 이유가 순수하기 때문이다.
예) 그림을 그려도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어른이 그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수준에 도달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어른들은 자신을 비우고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미 굳어버린 우리의 것을 내어 버리지 못하고 가면의 것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한나의 그림을 보라.
IV.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들과 같은 신앙의 모습을 가지기를 원한다. 우리의 삶에 너무 많은 불순물이 붙어 있다. 우리의 계획과 이해관계와 우리의 생각이 너무 많이 첨가된 것 같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타이틀이 주어져 있는 것 같다. 너무나 요령이 많고 지혜롭고 생각이 많다. 우리의 비젼이 변하여 욕망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고 교만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의도하고 무리하게 작위하고 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누군가 말을 하면 해석을 해야 한다. “과연 의도가 무엇이냐”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순수하지 못하기에 그 불순물들을 떼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되라. 어린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계획된다. 부모님에 의해 계획되듯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이 될 때 낮아진 자가 된다. 소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를 비운 자가 되어 주님이 말씀하실 때 수용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될 때 내가 이해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듣게 된다. 아름다운 믿음의 용어들을 그대로 실천하기를 바란다. 어린아이처럼...
주일학교 때 공책이나 연필을 상으로 받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유치하게 상품에 눈이 어두워서라고 말할지 모른다. 반별로 성경읽기, 전도, 기도 등을 잘하면 포도송이를 붙이는 것이 있었는데 열심히 했었다. 어른이 되면 경쟁심을 불러일으켜서 그러는 거지라고 유치하게 생각할른지 모른다. 선생님이 찬양을 크게 하라면 목이 아파도 열심히 악을 쓰듯이 불렀다. 어릴 때는 감각이 있었다. 기쁘면 기쁘고 슬프면 슬프고... 반응이 있었다. 그러기에 순수한 것이다. 소풍이라고 하면 즐겁게 함께 교제하자. 남선교회에서 프로그램을 하면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처럼 열심히 따라하자. 나의 생각이 아니라, 낮아진 자로서 나를 비우고 순수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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