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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작성자권순태|작성시간10.01.18|조회수479 목록 댓글 0

성경: 마태복음 26: 36 - 40 

제목: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일시: 2010. 1. 1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기도하시는 주님과 자는 제자들

예수님의 사역의 하이라이트는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이다.  이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주님은 심히 고민하시고 힘들어 하셨다.  주님은 늘 하시던 대로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서 기도하시기로 작정하셨다.  3년간 양육해 오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 원하셨다.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어느 한곳에 두고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신 다음에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부르셔서 당신의 마음을 털어 놓으신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8절).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신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38절).  그리고 돌 하나 던질 만한 거리에 가셔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왔는데, 그들은 기도를 하고 있었는가?  자고 있었다.  이 심각한 시점에서 잠이 오는가? 


어쩌면 제자들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평안하기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당사자가 자기가 아니기에 절박한 마음이 좀 떨어졌을 것이다.  역시 자기의 고민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선생님의 고민일 뿐이다.  우리도 누군가 진지하고 절박하게 말하면 함께 공감을 해 주는 것 같고 기도해 준다고 하지만 종종 듣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 기도는 나의 기도가 아니라 너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신변에 걱정이 아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처럼 긴박하거나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주님은 땀방울 핏방울을 쏟으면서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다 자고 있다.  코를 골면서 잤는지도 모른다.  인간적으로 선생님이 고민 중에 있는데 그렇게 잘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주님은 얼마나 실망스럽겠는가!  “역시 믿을 녀석들이 하나도 없구나 이제 몇일 안 있으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너희만 남겨 놓게 될텐데 이렇게 내 마음을 알아서 함께 하는 녀석이 없다니...”

함께 공감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한다.  아이티에 지진이 나서 20만명까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인구의 70%이상이 하루에 2달러를 가지고 살면서 이와 같은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볼 때 너무 가슴이 아프다.  평생 가난 속에서 살다가 비참하게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토요일 새벽기도에는 공동의 기도제목으로 아이티의 국민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다.  뭐라고 기도했는가?  고난에서 다시 회복되기를, 빠른 회복이 되기를, 그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그런데 집에 와서 아내가  하는 말에 아주 공감을 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티브에서 절망적이고 슬픈 일을 보고는 혀를 차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1분 정도 지나면 곧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것이 전부이지 무엇을 더 하고 있는가?  여전히 내 머리 속에는 나의 일이 앞선다.  어쩌면 그들의 고통보다 내 손톱주변의 살이 벗겨지는 것으로 인한 고통이 더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중보기도를 하면서 종종 내가 아픈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건강한 자로서 사치스럽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시험에 실패하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지만, 뭘 위해서 기도하는가?  “사치스럽다”는 말이 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몇 일 안에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을 위한 기도는 사치스럽다.  그들은 졸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에게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입학시험,  졸업시험, 취직, 결혼, 건강 등 여러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우리는 기도제목을 나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자”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하는 사람의 졸린 눈을 보게 된다.   


II. 함께 하는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제자들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우리는 말을 할 때 종종 너의 입장이라면, An deine Stelle, in your shoes라는 표현을 쓴다.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저 피상적으로 보는 것과 막상 그 입장에 있게 되면 해석이 달라지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의 입장에서만 주장하고 말을 한다.  알고 보면 이유가 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데, 전후문맥을 살피지도 않고 무조건 비난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그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입장이 되게 되면 이해가 되고 철이 들게 된다.

 

결혼 전에 부모님은 저의 결혼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서서히 이해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부모님은 왜 나의 프라우될 사람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는가?  함께 살 사람은 나인데 말이다.  학교에 계시고 집회도 나가시는 그분은 가는 곳마다 결혼연령에 있는 저를 위해 만남을 주선하곤 했다.  순종적인 저는 일단 만나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과의 만남은 피곤한 일 아닌가!  만남이 한번으로 해결되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막 결혼할 수도 없고...  어느 날 부모님께 항의성 있는 말로 “아버님 저를 그냥 내비둬요 피곤합니다 왜 남의 청춘을 가지고 아버님 당신이 즐기십니까” 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 저를 “넌 아직 뭘 몰라”라는 듯이 무시하는 듯한 아버님의 씩 웃으시고 아무 말도 안하시는 그 표정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진 것은 아버님도 당신 살 궁리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부모님이 며느리를 보고 계신 것이었다.  그분은 아들 낳아서 먹이고 입히고 키워서 나이가 차니 당신의 특권인 며느리 보는 재미를 보고 계셨던 것이다.  저는 그 입장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주 서서히 그분들의 입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도 그러한데 몇 년 되지 않아서 더 구체적으로 사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배우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며느리 사위에 대한 관심으로 아주 부러웠던 커플이 있다.  한달우 전주희 커플이다.  그들보다 기주 할아버지인 그들의 부모님이 보였다.  기주 친할아버지(한규동총회장님)와 외할아버지(전용인동기목사님)가 모두 목사님이시다.  한달우 전주희커플이 한국에 인사만 하러 간다고 했다가 바로 결혼하고 왔다.  난 그 커플보다 그 목사님 사돈들이 그렇게 부럽다.  부모님이 함께 애들 독일 보내고 당신들은 동해안에 회를 드시로 가셨다나 어쨋다나...  이제 저는 사위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그것이 저의 입장이다. 부모로서 자식들에 대한 소망이 있지만, 그것도 다 자기 살 궁리인 것 같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예수님과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기도하러 갔지만, 자고 있었다.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지를 못한 것이다.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를 못한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제자들이 잔 것은 주님의 입장에 있지를 못해서 절박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때는 주님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당하는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비록 제자들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주님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셨다.  크리스마스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었다.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약함과 문제와 형편을 아신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의 입장이 되어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에게 오셨기에 그분과 우리는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은 우리를 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보좌를 버리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앉아주신 것이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안에서 일으키심을 받게 되었다(참조골로새서2:12절)  주님의 성육신의 사역은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위한 방법이었다.  사도바울도 보라.  그의 사역 역시 주님을 닮았다.  그는 고린도전서 9장 19절 이하에서 그가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종이 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며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자에게는 율법아래 있지 않는 자처럼 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각 사람에게 그들의 입장에서 있고자 함이었다. 

 

함께 하는 것은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12:26)    바이올린을 하는데 손들이 빠르게 돌아간다.  그런데, 손가락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지체들이 함께 한다.  백겸형제의 마지막 곡 Sonate in A-Dur fuer Klavier und Violine에서 Allegretto poco mosso 인지 Recitativo Fantasia 인지 인상을 짜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뜬다.  손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만이 환호와 갈채를 받지는 아니한다. 모든 몸이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하는 지체들은 아름답다.  그 지체들은 건강하다.  질서가 있고 조화가 있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주님은 또한 우리에게도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요청하신다.


III.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사랑으로 인해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여 어려운 율법시험문제를 낸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 그때 주님의 답변은 사랑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22:37-39).  사랑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 함께 머물러 기도할 수 있다. 

내 이웃과 함께 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는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그렇게 사랑함으로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들 자기 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취하며 공을 드린다.  그러한 자기 사랑이 이웃에게까지 옮겨 가야 한다.  이웃을 이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범위를 내 이웃에게까지 넓혀야 한다.  선을 긋는다는 말을 한다.  선을 어디에 긋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불의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동지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기적이 될 수도 있고 노말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라고 하는 범위의 선을 어디다 그을 것인가?  “자기”라는 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따라 나의 범위가 달라지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라는 선을 긋고 산다.  자기라는 선을 긋고 그 선 안에 들어온 것만 사랑하고 선 안에 들어온 것의 유익을 찾는다.  선 밖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을 이기주의라고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자기의 선을 더욱 넓혀버리게 되면 “자기”라는 내가 확장이 된다.  나만이 아니고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지역사회, 나의 나라...  나를 넓히라. 그러면 넓어진 그 영역이 모두 사랑의 대상이 된다.  이기주의는 나와 너의 구분을 뚜렷하게 두기 때문이다.  나의 범주로 집어 넣으라.  내 일로 생각할 때 그것이 나의 범위이다.  너가 아니라, 나로 생각하고 자기라고 하는 범위가 넓어졌을 때 우리의 생각의 개념도 달라진다.  나의 범위 내에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내 일로 알아서 듣는 것이지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오는 것이지 와주는 것이 아니다.

 

가정 생활을 할 때도 일의 구분이 있지만,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는 부부가 함께 열심히 일을 한다.  돕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아내가 빨래 좀 널어줄래요? 라고 할 때 널어주는 것이 아니라, 널어야 하는 것이다.  저녁 좀 차려 줄래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리는 것이다.  나의 지체들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그것을 나의 기도제목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기도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너인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가 긋는 자기의 선을 깨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당신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선을 깨뜨린 것과 같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자꾸 자기를 축소하려고 한다.  나를 축소하려면 계속 줄어든다.  하지만, 나를 자꾸 늘리려면 늘어난다.  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면 그렇게 나는 확장이 된다.  우리의 지체의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볼 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확장해야 한다.  우리의 지체의 성공과 기쁨과 형통을 볼 때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고 하면 내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자신을 자꾸 제한해서 줄여 나가서는 안 된다.  그때 우리의 모습은 이기주의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    잘라내는 자기가 아니다.  잘라내어 보라.  내 것이 무엇이 남는가?  양파껍질은 껍질이 내용이듯이 자꾸 잘라내면 내 것은 없다.  우리는 자기를 자꾸 붙여나가야 한다.  나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IV. 주님은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될 정도의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  그와 함께 머물러 깨어 있지 못한 제자들이 참으로 얼마나 주님을 실망시켜드렸겠는가!  함께 머물러 있는 자가 되라.  주님의 십자가를 선생의 십자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십자가로 보라.  너의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로 보라.  내 자신을 사랑하고 위해주는 그 정성으로 지체를 돌아보라.

아이티에서의 지진으로 아픔과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도 여러 인생의 시험과 삶의 고민거리와 아픔으로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어 깨어있으라.  내 이웃정도가 아니라, 나의 한 부분으로 삼아 기도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짐을 나누는 동역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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