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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의미

작성자권순태|작성시간13.12.16|조회수524 목록 댓글 0

성경: 사도행전 11 : 25-26

제목: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

일시: 2013. 12. 15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지난 주에는 주님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다는 말씀이었고 우리는 Lost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Found 되는 존재임을 알았다. 성경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중요한 신앙개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Lost 되었지만 다시 found 되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첫사람 아담의 모습을 가졌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둘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II. 이름은 새 생명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제가 태어날 때 이름을 지으라면 지금 이름과는 다르게 지었을 것이다. 권순태? 승태? 순대? 이렇게 놀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름 끝의 “태”는 발음에 있어 입술이 열린 상태로 끝나기 때문에 영 맥빠진 사람처럼 느낀다. 그래도 그 이름을 My name 이라고 하는 것은 주어져서 그렇게 불리기 때문이다. 만일 내 이름을 부르는데 듣기 싫다고 응답하지 않으면 “야 귀먹었냐”라고 할지 모른다. 싫든 좋든 이름을 주어진 것이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에 있던 핍박으로 초대교회성도들이 흩어져 세운 교회이다. 처음에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후에 헬라인들과 주변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을 보니 유대인이라고 하기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고 이방인이라고 하기에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공동체는 유대인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구분으로 사람들을 다 담을 수 없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안디옥교회를 나오는 사람들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인,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이름은 이렇게 안디옥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장 넓은 이름이다. 유대인을 뛰어넘고 이방인이라는 제한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의 구분도 없고 신분의 구분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냐 자유자나 구분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의 구분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아래 있는 자나 율법밖에 있는 자나 구분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정죄함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망이나 생명의 구분이 없어져 버렸다.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에 아기가 생기면 태명을 짓는다. 아기를 가질 때부터 이름에 관심이 많다. 이름이 놀림을 받지도 말고 부르기도 좋고 좋은 의미도 가지고 있고 그 이름 석자가 뛰어난 이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름을 짓는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적에 올라간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새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있었지만 Born-again 될 때는 다시 태어난 이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안에서는 Born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Born-again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III. 이름에는 인격과 개성이 있다.

사람들은 처음 만나게 되면 먼저 이름을 말한다. 저 역시 소개를 주고 받을 때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고 싶다는 의지이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교회가족들을 익명의 형제 자매로 알기 원치 않는다. 이름으로 알기 원한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부르는 것은 서열이고 조직중의 하나로 부르는 것이다. 만일 사람을 번호로 부르면 그것은 인격이 없는 죄수를 부르는 것이거나 군대에서 인격없는 훈련병을 부르는 것과 같다. 작은교회에도 이름을 붙인다. 조직으로 보기보다는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고 싶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지도 않다면 이름을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Evon 이라는 독일자매네 고향집을 방문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었고 가르텐도 커서 동물들도 키웠다. 개도 무슨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토끼들도 있었는데 이름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토끼 몇 마리는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이름이 없다. 아주 궁금하지는 않지만 조금 궁금해서 물었다. 왜 이름이 없느냐고 했을 때 대답이 명답이면서도 조금 슬펐다. “잡아 먹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만일 곧 잡아 먹을 토끼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때가 차서 잡을 때에 한 마리 익명의 토끼를 잡아 먹은 것이 아니라, “토실이”를 먹었다. “왕눈이”를 먹었다. “주주”를 먹었다.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안디옥교회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고 이방인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야콥도 있었겠고 시몬도 있고 필립도 있고 사울도 있고... 하지만 그들의 이름에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덧씌워지게 되었다. 안디옥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가진 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바꾸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브라함도 원래는 아브람이었다. 아브는 아버지라는 의미이고 람은 높다크다의 의미이며 라함은 무리 많은 나라를 의미한다. 사라도 사래에서 변화되었다. 지배자라는 뜻에서 열국의 어미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이다. 야곱도 이스라엘로, 시몬도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지 아니했는가! 옛것을 버리고 새 변화를 주기 위해서 이름을 바꾼다. 이미지가 않 좋기 때문에 바꾸기도 한다. 어느 마을 이름은 “이류면”이다. 어느 마을은 “죽2리”여서 죽이리가 된다. 어떤 마을은 대가리(크게 첨가한다)는 이름이 좋지 않아 바꾸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이름도 야동초등학교여서 바꾸었다고 한다.

안디옥교회의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인격과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본인들이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과 삶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 같은가?

IV.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홀몸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동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독자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호칭될때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저는 결혼하고 아내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이” 혹은 “저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실 부부간에 부르는 호칭은 여보 당신이 가장 교과서적인 호칭이다. 오늘날에는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니 결혼하고도 오빠라고 한다. 사실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다. 무촌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일촌이다. 그리고 친형제자매간은 2촌이다. 이렇게 가까운 부부간의 호칭을 오빠라고 하면 2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빠가 아빠로 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1촌이 된다. 무촌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여보 당신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 결혼하는 장세종집사와 송은정자매에게 돌아오면 어떤 호칭을 사용하는지 물어보려고 한다. “어이”나 “저기”라고 부르다가 설주가 태어나면서 설주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주 편했다. 그러나 그 역시 알고 보면 옆집 아줌마 부르는 격이 된다.

안디옥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을 때 처음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모습으로 인해 그렇게 불리웠지만, 곧 그들은 그 이름에 책임을 느껴야 했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귀한 이름인가? 빌립보서 2장 9-11절을 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우리는 귀한 이름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한 이름에 누를 끼칠 수도 있고 영광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옛날 버스 안내양이 있던 버스를 타고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주일날 아침이었는데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서 교회를 간다고 하는 것이 그날 따라 늦었다. 늦을 때 꼭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안내양에게 내리기 바로 직전 정류장에서 다음에 내린다고 했는데 10대 말이나 20대 초반의 앳된 안내양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한 정류장을 더 갔다. 가는 동안 젊은 혈기에 큰 소리를 냈다. 아니 왜 안내려주냐고. 그랬더니 그 안내양이 나를 위아래 훑어보고 성경책을 손에 든 것을 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나는 즉시 할 말을 잃었고 조용히 내려서 교회로 왔다. 내 이름이야 모르지만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욕되게 한 것에 무척 찔렸던 것이다. 성경책만 없었어도 내 정체를 숨길 수 있었는데... 옛날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고 했는데 시대가 지나가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똑같아”라고 하다가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안디옥교회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는 그리스도의 명예와 직결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호칭은 예수님의 명예와 직결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난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기에 하나님의 가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V.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 잃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발견된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다. 그러기에 죄된 성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안디옥에서 불리웠던 그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오늘날 빛을 잃어 가면 안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모습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기를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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