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린도전서 15: 9 -10
제목: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일시: 2014. 11. 9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여러 가지 표현이 있을 수 있으나 사도바울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은혜”일 것이다. 그는 철저히 은혜의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그가 은혜의 사람이라는 것은 한때 철저한 율법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그가 은혜의 사람으로 불리는 고백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II. 자격 없는 자를 세워주셔서 은혜의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그 말은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율법으로 자신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하는데, 앞의 “내”는 “형편 없는 나” “몹쓸 나”이고 뒤의 “나”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가치 있고 쓸만한 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고 표현하고 있다. 덜 떨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로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9절) 고 한다. 즉 사도가 되기에 자격이 없는 전과자였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라고 하면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사용해 주시는 것이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릴 때 아이들이 장난하면서 “야임마 너 누구야”라고 하면 “왜 그러냐 나는 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나다”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라는 특명을 받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갈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다. 백성들에게 가서 누가 시켰다고 하지요?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라”고 이름을 밝히셨다. I am who I am 이다. Ich bin was ich bin.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서 "I am" has sent me to you 라고 한다. 우리는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없고 “나”가 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바울은 내가 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 우리는 Through the grace of God 로 내가 되는 것이다. durch Gottes Gnade bin ich, was ich bin.
늘 “하나님의 은혜지요”라는 말이 붙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더욱 진하게 몸으로 체감된다. 그리스도인들의 관용적인 표현같았던 그 말이 시간이 갈수록 은혜가 아니고는 지금까지 지내올 수 없었다는 것을 느낀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이 커진다.
성공한 사람들은 왜 성공했는지 강연을 한다. 이래서 성공했다. 저래서 성공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기 때문에 성공했을까? 성공의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성공했다기보다도 성공했기 때문에 분석들을 내어 놓은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성공이유를 철저히 분석해서 적용해 보라? 그대로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운이 좋았다고 한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싸이의 노래 오빤 강남스타일이 떴는데 왜? 그 이유를 단다. 노래가 단순해서, 말춤 제작과정의 창의성 때문에, 패러디가 나올 때 저작권시비걸지 않고 오히려 더 독려했기에, 입소문마켓팅으로... 이유가 틀리지 않을 수 있어도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다 싸이될 것이다.
목회현장에서도 훌륭하게 사역하시는 분들을 후배들이 분석한다. 어떤 분은 기도를 많이 해서, 어떤 분은 말씀에 정통해서, 어떤 분은 새벽기도를 잘해서, 어떤 분은 조직과 행정력이 뛰어나서... 하지만 기도하는 분이 그분들만이겠는가! 새벽기도는 그분들만 하고 말씀연구는 그분들만 하는가! 고백은 “durch Gottes Gnade bin ich, was ich bin”이다. 따라서 겸손해야 한다.
III. 무능한 사람을 불러 사용하여 주시니 은혜인 것이다.
바울은 무자격하였지만 하나님이 사도로 불러주셨고 그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 그에게 할 만한 능력이 있어서인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고백한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일을 은혜로 여기고 고백하는 사람은 잘되어도 겸손하여 교만하지 않는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칭송할 뿐이다. 일이 좀 안되어도 은혜의 사람은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냐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은혜라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사도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가 아니라, 수고하였으나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다. 지금의 내가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였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노력이라는 것이 은혜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노력과 은혜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과 은혜는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이다. 사도바울이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할때는 뭔가 한 것이 있다는 것 아니냐! 있다는 것을 위해서는 뭔가 내가 수고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있은 후 고백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오면 되는 것이다.
예)열심히 공부했더니 성적이 잘 나왔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적이 잘나왔다고 생각한다. 은혜로 생각하지 않는다. 은혜라고 하면 놀기만하고 공부는 하나도 안했는데 성적이 잘 나왔을 때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떠한가? “우리애가 공부도 안했는데 성적이 100점나왔어요”라는 학부모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참 은혜스럽네요”라고 말할 것인가? 은혜는커녕 오히려 화가 날 것이다. 공평하신 하나님의 의에 문제가 있을 것 같지 않는가? 공부를 안했는데 성적이 잘 나왔다? 무슨 현상인가? 재수좋은 것이다. 그 말은 재수나쁘면 공부했는데도 성적이 안나올 수도 있다. 은혜는 바울처럼 수고하였는데 나의 나된 것은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은혜로 합시다”라는 의미가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자는 말이 되면 안된다. 은혜를 값싸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헌신되고 죽어지는 자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은혜가 된 것이다. 은혜를 편하고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다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량없는 은혜 값을 수 없는 은혜... 그것은 이미 희생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최선과 수고로움의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율법과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은혜가 넘침을 알았다. 바울의 사도됨과 사역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고 하나님으로부터였다. 이것이 은혜인 것이다.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요,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쓸쓸하게 혼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레이니>교수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 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노인을 찾아가 잔디를 깎아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서 노인을 만나지 못하자 그는 노인의 집을 방문하였고 노인이 전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면서 노인이 바로 <코카콜라 회장>을 지낸 분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남긴 유서가 있습니다.” 라며 봉투를 건넸다. 유서의 내용을 보고 그는 너무나 놀랐다. “당신은 2년여 동안 내 집 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준 친구였소.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깎아 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고마웠어요. 나는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레이니>교수는 받은 유산을 에모리대학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제임스 레이니>가 노인에게 베푼 따뜻한 마음으로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왔지만, 그는 그 부(富)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富)를 학생과 학교를 위한 발전기금으로 내어 놓았다.
일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얼마나 은혜스러운가? 코카콜라회장인 줄도 모르고 그 노인에게 잘해주었던 레이니! 사람 잘만나서 그 은혜를 누렸다. 그리고 가진 돈을 에모리대학에 기부하여 탐심을 갖지 않았던 레이니. 에모리 대학은 2조 5천억의 기금이 생긴 것 아닌가! 제대로 된 교수하나 쓰니 학교는 얼마나 충분한 재정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하겠는가! 모든 것은 은혜였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은혜였다. 율법으로 아무리 발버둥치고 자신이 아무리 수고를 한다해도 일은 은혜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은혜임을 알라. 내가 계획한다고 하지만 그가 계획하신다.
IV. 예수께서 피값주고 사신 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이다. 은혜로 구매된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체질적으로 은혜공동체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은혜가 떨어지면 에너지가 완전 방전된 것이다. 은혜가 있으면 너의 잘못이 보이지 않고 나의 잘못이 보인다. 은혜가 있으면 다른 지체가 귀해 보인다. 은혜가 있으면 감사가 넘친다. 은혜가 있으면 기쁨이 있다. 은혜가 떨어지면 왜 이리 교회가 멀리 있지라고 한다. 그러나 은혜가 넘치면 왜이리 우리집이 교회하고 멀지라고 한다. 은혜가 떨어지면 왜 이리 설교가 길지 하지만, 은혜가 넘치면 설교가 짧다고 생각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다. 내 속에 사랑이 식어지고 은혜가 떨어진 것이다.
추수감사주일에 감사를 결단하자고 했는데 우리는 은혜받기를 사모하고 은혜를 결단해야 한다. 언제 은혜가 많은가? 바로 허물과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의 은혜가 위대했던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 은혜가 아니라, 바울의 고백과 같이 자신이 무자격하고 무능할 때 오히려 주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는 것이다. 그 은혜가 우리의 삶에도 넘치기를 축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