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세기 13 : 14-17
제목: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일시: 2015. 2. 8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때 혹다리처럼 따라 붙는 이가 있었다. 조카 롯이였다.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하란을 떠날 때부터 함께 했고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도 아브라함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애굽까지 내려갔다. 이러한 롯을 볼 때 마치 차 두 대로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생각이 든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앞에 있는 차는 지리를 알고 있기에 열심히 달린다. 뒤따라 가는 차는 목적지와 방향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죽으라고 쫓아간다. 주변경치는 볼 새가 없다. 시내에서 신호등 있는 사거리를 지날 때 그가 건너면 심지어 빨간불이라도 감수하고 속도를 내고 다른 차가 중간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초조해져서 차선변경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차의 꽁무니를 안 놓치려고 한다. 그거 놓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미아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롯에 초점을 맞춘다.
II. 왜 아브라함을 놓치지 말고 쫓아야 하는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요 아브라함이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12:2-3). 그를 놓치면 복을 놓치는 것이다. 그를 멀리하면 복을 멀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인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기에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와도 거래를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정통성 있는 약속이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이다.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 그리고 오늘 말씀에 그 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 정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란에 부모형제와 더불어 함께 할 사람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도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5)고 하신다. 둘째 약속은 후손이었다.
땅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무슨 말인가? 그것을 어떻게 셀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늘에 눈이 내릴 때 그만한 것을 셀 수 있는가? 자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통성있는 후손으로 주신 것은 이스마엘이 아니요 이삭이었다. 그리고 에서가 아니요 야곱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아들들도 아니라 유다였다.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인 마태복음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족보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은 믿음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정통성이 있고 권위가 있다. 그 약속은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요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준 것이 구약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아브라함은 일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갈 곳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애굽에서 실수를 하고 부끄러움을 당했지만 재산을 증식해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롯이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같이 풍성해 보이는 곳을 택해 가고 자신은 형편없는 한지와 같은 곳에 있어도 더욱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렸다. 아들이 없고 자식을 낳을 여망이 없어 보여도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9-10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니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한다. 약속을 받은 자는 바로 이러하다. 그러니 약속이 아닌가? 안 그럴 것 같은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약속이다.
III. 롯과 아브라함은 늘 함께해 왔던 공동운명체였지만 어느 순간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갈리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면서부터이다. 떠나지 않고 함께 있을 때도 문제는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풀지 못하고 뛰쳐나감으로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것은 롯의 운명을 결정짓는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물론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하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이해는 한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하기에 너무 좁아서 말이다. 그러나 롯은 아브람이 아닌 다른 화려한 세계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 땅까지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고 한다. 풍족해 보이고 뭔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보였던 것이다. 롯이 그의 인생에서 아주 잘한 선택이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따라 나선 것이다. 반대로 롯이 결단한 것 가운데 아주 어리석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브라함을 떠난 것이었다. 롯은 아브라함과 붙어 있어야 했다. 오늘 말씀을 봐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아브라함을 축복한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속해 있어야 했다. 앞 자동차를 놓치면 난 이제 미아가 되겠거니 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붙어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롯은 하나님은 보지 못했어도 아브라함에게 속해 있었다. 따라서 롯도 하나님께 속해 있었다. 그리고 롯의 아내와 아이들과 모든 재산도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었다. 롯이 아브라함에게 속해 있을 때 축복이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비록 롯이 바라본 곳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해 보였지만, 그곳은 저주와 멸망의 땅이었다. 되는 것 같아도 안 된다. 호세아 4장 10절을 보라.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할찌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더욱 결정적인 것이다. 먼저 속해야 한다. 속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께 속해 있기에 사랑해 주시고 예쁘다 하시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챙겨주시는 특권이 있는 것이다. 속해 있기에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잘하고 뭔가를 해 드려서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구원의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에 그의 십자가 고난과 십자가의 영광에 함께 참여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여 있으므로 과실을 맺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지 우리가 의인인지 우리가 은혜 속에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예수 밖에 있으면 살아 있어 보여도 죽은 것이다. 예수 밖에 있으면 아무리 착해도 죄인인 것이다. 롯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그가 소속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니요 소알과 소돔과 고모라 도시의 소속이었다. 다른 선택은 형편없어도 내가 평생 잘한 선택이 있다면 당신을 만난 것이오 라는 부부의 사랑고백처럼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결단은 가장 지혜로운 결단이다. 역으로 하나님을 떠난 결단은 가장 어리석은 결단이다.
IV. 결국 롯의 운명은 어떠한가? 의인 10명이 없어 유황불심판으로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와 더불어 롯은 재산을 모두 잃었다. 물 좋고 물 많은 곳으로 갔다가 오히려 파멸을 당했다.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딸들은 아비를 통해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후손을 갖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롯은 아브라함에게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브람을 떠난 후 그 가문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롯의 모든 가족들과 우양과 모든 재산들은 롯으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권목사의 아내와 딸들은 내게 속해 있기에 나의 결단에 운명이 결정지어진다. 한 나라의 운명도 어떤 대통령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르코스 시절, 어느 일본의 국회의원이 필리핀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You are rocky, because your president robs you"라고 해서 한때 필리핀 사회 속에 회자되었던 적이 있다. 원래는 ”You are lucky, because your president loves you"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인데, r 과 l을 구분 못해서 나온 의미있는 실수였다. 그런 대통령을 만난 국민들이 피폐해져 있고 불쌍하다. 우리 교회식구들은 권목사에게 속해 있다. 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다. 제가 보는 눈과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저의 비젼으로 보게 된다. 그러니 늘 긴장되고 조심스러운 것은 나로 인해 교인들이 불쌍해지지 않는가를 생각한다.
롯도 롯이지만 그저 롯만 보고 쫓아온 그 가족들이 불쌍하다.
V. 롯의 선택을 본다. 롯은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을 떠났을 때 인생은 기울기 시작했다. 제가 바라 볼 것은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은 요단들과 소알 땅이 아니다. 오직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저를 만나 불쌍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를 바란다. 파멸이 아니라 풍성함이기를 바란다.
라이프찌히에 속한 지체들은 권목사와 함께 꿈을 꾼다. 제가 나누는 비젼을 함께 나눈다. 다양한 스타일이 있지만 저의 스타일과 함께 한다. 함께 신앙해 나가면서 라이프찌히 모든 가족들은 권목사와 운명공동체이다. 목회자의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권목사라는 목회자의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주변에 있는 교회 목회자들은 그들의 특징이 있다. 바이마르의 김응석목사님은 뜨거운 열정적인 부흥사이다. 설교를 해도 2-3시간 한다. 드레스덴 안창국목사님은 코스타에 목숨을 건 사람이다. 이곳 라이프찌히를 개척하셨던 장세균목사님은 선교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베를린에 4군데, 바이마르 라이프찌히 프라하 드레스덴까지 목사님이 뿌린 씨앗들이다. 권목사는 무엇인가? 아시아지도자들을 위한 사역이다. 음악인들을 아시아 신학교 음대에 파송한다. 지금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은 지도자들을 위한 것이다. 아시아인들을 아시아 다른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다. 쑈텀미션이다. 한국을 다음 주 방문한다. 여러 사역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교회 모든 지체들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동역하고 비젼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