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빌립보서 3 : 7 - 9
제목 :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좋은 것을 버리라
일시 : 2016. 7. 24
장소 : 라이프찌히 교회
I. 바울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랑거리가 꽤 있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리하리니.” 그는 태생적으로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없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할 행동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자랑할 만하며 유익해 보이는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겼다. 그리고 얻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의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을까? 그의 인생은 손해 보는 인생이었을까?
II.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버릴 것이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바울은 버릴 것이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익하던 것”이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버린 것이다. 유익하던 것들은 율법 지식과 교계의 지인들과 로마시민권과 다소출신으로 문화와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라든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해”로 여긴 것이다. 원래 해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 것이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생각했는가? 배설물처럼 여긴 것이다. 바울이 버린 행위는 아까워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요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후회 없는 결단이었다.
주님을 위해서 버릴 것이 있다는 것은 돋보이는 것이다. 헌신을 할 때 드리기 아까운 것이 많을수록 더욱 멋지다. 에스더는 민족말살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왕후의 자리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에스더가 내놓을 자리가 왕후가 아닌 무수리 자리이고 내어 놓을 목숨이 오늘 내일하는 병약한 사람의 목숨이라면 그의 헌신과 결단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귀하고 아까운 것을 드리면 드릴수록 더 돋보이는 것이다. 에스더를 볼 때 그것은 그저 멋지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특권으로 해석된다. 코너에 몰려서 억지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특권인 것이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때에 나서지 않으면 유다는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을 받고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즉 에스더가 나서든 나서지 않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스더가 나섬으로 그 영광을 얻으라는 것이다. 에스더가 만일 그 결정적인 순간을 피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위기가 되고 그 위기의 순간을 잡게 되면 영원한 찬스가 되는 것이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와 자신의 목숨을 드려야 하는 헌신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었다.
누군가 내게 부탁을 하게 되면 그것은 번거롭고 피곤한 것이 아니다. 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나를 필요로 하다는 것이다.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죽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흠 없고 건강하고 의롭기에 죽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겸손하다고 할 때는 겸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겸손의 대전제는 무엇인가? 겸손할 만큼 높이 있다는 말이다. 검소하다고 할 때도 가진 재물이 가진 사람이 검소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서빙을 해주는 것이 서빙을 받는 것보다 더욱 기쁜 일이다. 휠체어를 타고 장애인 우대를 받는 것 같지만 그게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다. 복잡한 도심에서 늘 장애인 파킹자리가 있다. 아무도 그곳에 차를 대지 않는다. 과연 그 자리가 편리한 자리일까? 그들은 차를 더 멀리 대고도 걷고 싶을 것이다.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과 같고 손해보는 일 같아도 알고보면 그것이 얼마나 돋보이는 일인가? 사도바울은 버릴게 있어서 돋보였다. 사도바울은 버릴 것이 있어서 뿌듯하고 행복했다. 사도바울이 얻은 예수 그리스도는 값싼 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더 공부한다. 돈을 더 벌기를 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명예가 높아지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시라.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버릴 재료를 모으는 것이다. 내 시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바쁜 사람이 되라. 주님을 위해 물질을 버리기 위해서 많은 재물을 모으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낮추고 떨어뜨릴 수 있도록 높은 자리를 얻으라. 그것은 돋보이는 일이다.
III.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를 다 버리면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사도바울이 자랑할 모든 것은 바울의 “나”였다. 5-6절을 보라. “나는 ~ 자라.” 바울이 “나”라는 모든 것을 다 버렸는데 그렇다면 도무지 그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바울이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얻은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의 정체성 역시 그리스도이다. “...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한다.
바울은 선별된 것이다. 왕후의 위와 목숨을 걸었던 에스더가 선별되고 그의 결단이 오히려 그에게 축복이요 특권이 되었던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초청된 부르심을 귀하게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고백하고 있다(디모데전서1:12,13). 바울은 차출된 것이 아니라 발탁이 된 것이다. 차출은 안하고 싶은데 하는 것이다. 차출은 안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탁은 다들 하고 싶은데 특별히 눈에 띈 사람을 골라내어 시켜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얼마든지 일할 사람을 구하실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조바심이 들고 시켜주시면 감사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모르드개의 말이다. 에스더는 차출된 것이 아니라 발탁된 것이다.
한국축구선수들이 독일에서 뛴다. 벤취에 앉아있는지 선발로 뛰게 되는지가 관심이다. 국가대표로 뽑힌다는 것은 차출된 것이 아니라, 발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서 경기에 임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는 해병대에 들어가는 것이 차출이 되어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발탁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어찌 사람을 사고 팔 수 있는가? 사람을 팔아서 돈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 사람이 이용될 수 있는가? 이용해서 얻을 그 어떠한 것도 사람을 뛰어넘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만큼은 우리의 사용자가 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 인간은 수단이 된다.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우리는 tool이 된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될 때 가장 귀하게 사용되는 것이고 그 존재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긍정의 답이 나와야 한다. 고린도후서 1:19-2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한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하는 자를 사용하시지 할 수 없는 것을 찾는 자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은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를 찾으신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단 예스하고 시작해야 한다. 일의 사정과 내 형편을 보고 예스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예스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면서 예수 안에서 예스했던 사람이다.
IV. 사도바울의 삶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었다. 그의 삶의 모든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문제조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저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죽음 앞에는 다른 장사가 없는 가장 강력한 것인데, 살고 죽는 것조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력해지니 바울의 삶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순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치해야 한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형용사 혹은 형용사구나 형용사절이 될때 비로소 우리는 화려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수식되면 부끄러운 존재가 된다.
30대 초반에 목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간 적이 있다. 나를 소개하는 목사님이 저를 소개하면서 “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생명의 말씀사에서 수년간 번역사역을 하시고 목회현장에서 수년간 사역하신...” 이렇게 나오니 다들 놀랜다. 화려한 경력과 젊어보이는 사람이 언제 그렇게라는 식이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인 권순태목사라고 소개한 것이다. 우리의 소개에는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고 나는 그저 앞에서 사용되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코미쉬하다. 만일 내가 그 삶의 중심 자리에 놓여 있게 되면 아주 우습게 된다. 주님이 우리를 수식해 주면 안되고 우리가 주님을 수식해 주어야 한다.
라이프찌히 첸트룸 안에는 3개의 교회가 있다. 특별히 토마스교회를 우리는 바하의 교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속으로 의식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인데 바하를 너무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는 예배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음악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가? 니콜라이교회는 어떠한가? 1165년 시교회로 지어진 교회요 오늘날에는 통일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통일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월요기도회가 통일을 이끌었는데 “기도” 보다는 “통일”이 더 우리의 관심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이 “버렸다” “얻었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개념은 물건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는 공간개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유개념이다. 바울은 이전에 그의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잡힌 바 된 사람이 되었다. 즉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중심에 내가 있느냐 주님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주님이 내 무게중심의 자리에 오게 될 때 나는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주님께 소유된 자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유익해 보이는 재산이든 권력이든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잃는다 할지라도 손해보는 사람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요 현명한 사람이요 손해가 아닌 이익이 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V. 우리의 지체들이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사업하고 활동한다. 쌓아 올리라. 많은 것을 소유하라. 그러나 버리기 위해 갖는 것이다. 이때 돋보이게 된다.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자격이 된다는 것이고 우리에게 특권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과 같은 결단은 우리에게 의무가 아니요 특권이며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할 일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 콜링은 차출이 아니라 발탁인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겠다고 하면 재수없이 걸린 것이 아니라, 국가대표로 발탁된 것이다. 주님이 내 삶의 중심에 계실 때 우리는 다 잃은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요 최선의 삶이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의 영원한 적이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좋은 것을 잃으라. lose what is good to get what is better. good is the eternal enemy of b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