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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선지자 아모스와 어용 제사장 아마샤

작성자권순태목사|작성시간16.10.31|조회수372 목록 댓글 0

성경: 아모스 7 : 10-17

제목: 아모스와 아마샤

일시: 2016. 10. 30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환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싫어하는 것은 침묵하면 될 것이다. 불의하고 잘못이 많은 이 세상에 고개를 끄덕여 주면 친구라고 환영해 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환영을 받기 어려웠다. 진리를 가진 자들이 거짓과 불의로 가득찬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성경에 보면 진리를 가진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성도들은 환영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예수님 역시 거절을 당했다. 왜? 바른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이기에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으려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II. 오늘 본문의 아모스선지자도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선지자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모스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원래 선지자가 아니었다. 아모스는 어떠한 사람인가? 오늘날로 말하면 정통신학을 공부한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평신도 사역을 해왔던 사람도 아니다. 혹은 선교단체에서 선교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안이 사역자 가정도 아니었다. 그는 양을 치는 목자이자 뽕나무를 키우는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 미션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오죽 말씀을 전할 자가 없으면 그런 사람을 선지자로 세웠겠는가? 당시 유대민족은 북왕국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갈리워져 있었다. 아모스는 남왕국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북왕국에 와서 선교사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오죽 사람이 없었으면 남왕국 사람이 올라가서 말씀을 전했을까?


이스라엘백성들은 감각을 상실했다. 4장 1절을 보라.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바산의 암소들은 기름지고 살진 소를 말하는데 당시 사마리아의 고위관직의 아내와 딸들을 호칭하는 것으로 부정과 부패 온갖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감각을 잃어버려 진리를 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감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에 찔림이 없는 것이고 회개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뿐이지 어차피 죄인이고 형편없는 존재이다. 죄을 짓고 안 짓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은 죄를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이다. 진단을 하느냐 진단을 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죄인이냐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인이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임을 아는 죄인이고 비그리스도인은 죄인임을 모르는 죄인이다.


그러면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진리를 가진 사람이고 바른 말을 해야할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 사마리아의 절망은 감각을 잃어버린 지도자와 백성들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진리를 말해야 할 제사장도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아마샤라는 사마리아의 제사장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여로보암왕의 어용 제사장이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왕이었다. 진리를 말하는 아모스에게 “왕을 모반”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왕도 잘못했으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질책해야지 어찌 왕이 더 높이 있을 수 있는가? 아마샤의 관심은 제사에 있지 않고 떡에 있었다. 12절을 보라. “선견자야 너는 유다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예언하고” 라고 한다. 지금 아마샤는 아무 생각이 없다. 지금 진리가 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진리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시골 작은아버님을 방문했을 때 닭을 잡아주신 적이 있다. 닭장안에 있는 닭을 잡을 때 닭장 속에서는 난리가 난다. 푸덕거리고 꼬꼬댁거리고 안 잡히기 위해서는 이리 저리 달아난다. 그러나 결국 한 마리 희생닭이 생긴다. 그리고 나면 다른 닭들은 이전처럼 또 모이를 먹고 벌레를 잡아먹고 있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먹고만 살 뿐이다. 주인이 왜 우리에게 그토록 친절히 모이를 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았다면, 왜 울타리를 쳐서 여우나 밤도둑고양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았다면 그저 모이만 먹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것은 어둠속에서 감각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복음으로 깨우는 것이었다. 12세기 말 리용의 부자 상인 왈도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성경을 보급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이었다. 그 후 14세기 초에 위클리프가 나와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성경을 알게 함으로 진리에 무감각한 사람들을 깨운다. 얀후스는 프라하대학의 총장이자 베들레헴교회의 목사로서 성경을 번역하고 진리를 외치다가 1415년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해 죽는다. 그 역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나누면서 고난을 당한 것이다. 마르틴 루터 역시 성경을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사의 역사속에서 감각을 상실한 세대에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었다.

 

III. 감각을 잃은 자들을 위해서 진리를 선포되어야 한다. 얼빠진 녀석이라고 한다. 얼은 정신을 말하는데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이다. 얼빠진 녀석들은 얼이 들어가야 한다. 혼나야 한다. 혼나는 것은 감각하는 것이다. 혼이 살아나야 한다. 혼이 죽으면 육체의 욕망과 육체가 인도하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 사마리아가 그런 상태인 것이다. 여로보암이나 귀족들이나 백성들이나 심지어 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제사장 아마샤나 다 얼이 빠져 있다. 혼이 나야 할 사람들이다. 권력과 향략과 사치에 취해서 영혼이 잠자고 있는 사마리아를 깨우기 위해 아모스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간 것이다.

그러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고 선포한다. 이 말이 듣기 싫어서 아마샤는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예언금지령을 선포한다. 진리의 감각은 아프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바른 소리이다. 진리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안보면 편한데 보이기 때문이다. 안 들으면 신경 안쓸 수 있는데 들었기에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진리가 내 속에 있을 때 고통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몇 번 보았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주인공 네오, 트리니티, 시온, 느브갓네살, 오라클 등의 용어와 네오의 부활과 사랑 등이 나온다. 매트릭스는 슬쩍 보면 어려운 영화인데 한마디로 가상현실의 세계가 매트릭스의 세계라는 것이다. 2200년에는 인공지능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데 인간은 인공지능기계가 만든 세상이 매트릭스의 세계이고 사람들은 그 세계를 실제 진리의 삶으로 착각하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예수님), 트리니티(마리아), 모피어스(모세) 등은 그러한 거짓된 기계의 사회에서 구원을 하고자 한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구원자로 알아서 평범한 앤드슨이라는 컴퓨터회사원인 그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네오에게 진리에 대한 도전을 준다. 지금 그가 살고 있는 매트릭스의 세계는 거짓된 세계이고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준다. 하나는 파란 알약이다. 이것을 먹으면 생활이 평안해진다. 고난과 갈등과 아픔이 없다. 그리고 모피어스를 만난 것도 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취이다. 마비가 되는 것이다. 매트릭스 속에 갇혀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빨간약을 준다. 그것은 힘들다. 진실이기에 고통이 있다. 참담해질 것이다. 고난이 있을 것이다. 빨간약은 진실이기에 매트릭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힘들게 만든다. 네오의 결정은 편안할 것인가 고통스러울 것인가에 달릴 것인가? 그렇다면 파란알약을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거짓세계인 매트릭스가 아니라 진리를 알려고 하는가? 그러면 빨간약을 먹어야 할 것이다. 네오는 결국 어떻게 하는가? 빨간약을 먹게 된다. 그때부터 고통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전하는 자도 고통스럽다. 아모스도 그저 양이나 치고 뽕나무나 기르면서 이 부정과 부패와 거짓과 부도덕한 세계에서 벗어나면 더 편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예언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나가야했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목숨을 거는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음악을 들을 때 화음이 무너지고 기타줄이 맞지 않으면 나는 아주 불쾌하다. 그 속에 음악의 진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쯔윙글리의 도시 쮜리히와 칼빈의 도시 제네바를 여행하는 종교개혁지 여행을 하면서 스위스 산악 지역의 소들을 보면서 목사님이 “우생이 인생보다 편하다”라고 하신다. 재미있는 말씀이다. 인간의 매트릭스 속에 있으니 우유주고 고기주고 할 날을 알지 못하니 편하게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악역을 해야 한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 고통이 있어도 빨간약을 먹어야 한다. 진리를 가진 자들은 “악역”을 해야 한다. “역”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인가 해야 한다는 것이고 악역은 고통을 주는 것이다.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경고였다. 그러한 엘리야를 아합왕이 만났을 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열왕기상 18:17)라고 한다. 진리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힘들고 듣는 사람이 힘들어도 외쳐야 하는 것이다.

 

IV. 내일은 10월 31일이다. 할로윈 데이이다. All Saint Day 즉 만성절이라고 하는 11월 1일의 전야제 날이다. 그때는 죽은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며 정령이나 마녀들이 출몰한다고 하여 그것들을 놀래켜 주려고 유령이나 괴물복장을 하는 전통놀이를 한다. 이전부터 아주 큰 축제였다. 물론 우리 가정에는 내일이 24주년 결혼기념일이 되는 축하의 날이기도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괴롭게 하는 사람이었다. 입다물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자기도 편하고 사회도 다 편할텐데... 마르틴 루터는 499년 전 바로 그날 95개조항 논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슐로스키르세 정문에 대자보를 박아 놓은 것이다. 그 날을 택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 논박문은 면죄부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의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리의 선포는 무감각한 영혼을 깨우는 것이었다. 당연히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일이었고 고통과 아픔을 주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엘리야이고 사마리아를 괴롭게 하는자가 아모스인 것처럼 루터는 당시 교황청과 카톨릭사회를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본다. 진리가 구름에 가리워져 무감각해 있는 우리의 신앙을 늘 새롭게 해야 한다. 뚝살이 배기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내 생각으로 채워지고 있지 않는가! 지진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갤럭시와 한진같은 경제, 북핵이나 중국 등의 국제정치, 이제는 최순실게이트로 대통령과 한국의 사회가 혼란속에 있다. 내 가정이나 내 자신을 살펴본다. 진리에 무감각하고 바산의 암소들과 같이 마비되어 있지 않는가?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고 바른 소리를 하는 것에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진리 때문이라면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고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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